▲ 검거된 사기단. YTN 촬영 | ||
한창 외모와 타인의 시선에 민감한 10대 소녀들에게 근사한 남자친구는 최고의 로망이자 판타지다. 그 나이대 소녀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집안이 좋은 귀공자풍의 남자친구를 사귀어보고 싶은 꿈을 꾸게 마련. 특히 완벽한 ‘그’가 경호원까지 대동해 고급승용차로 자신을 데리러 오고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고가의 선물공세를 펼친다면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백마 탄 왕자’가 따로 없을 것이다.
순진한 10대 소녀의 이 같은 심리를 이용, 엽기적인 사기행각을 벌여온 레즈비언 사기단이 경찰에 붙잡혀 충격을 주고 있다. 지난 2월 27일 충북경찰청에 사기 등의 혐의로 구속된 레즈비언 일당 5명은 채팅으로 만난 소녀들에게 재벌가의 ‘꽃미남’ 자제 행세를 하며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을 해 한 피해 소녀의 부모로부터 수억 원의 돈을 뜯어온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이들은 피해 소녀가 뒤늦게 ‘진실’을 알게 되자 감금과 폭행을 일삼으며 성매매까지 강요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 일당의 영화 같은 사기행각의 시작은 지난 2003년 2월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년 전부터 동성애 연인 사이였던 박 아무개 씨(여·33)와 홍 아무개 씨(여·23) 등은 인터넷 채팅으로 당시 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윤 아무개 양(19)을 알게 됐다. 마땅한 수입이 없었던 박 씨 등은 대화과정에서 윤 양이 전교에서 1, 2등을 다투는 모범적인 학생인 데다가 어느정도 사는 집안의 귀한 딸이라는 것을 알고 윤 양을 이용해 돈을 뜯어내기로 공모한다.
우선 박 씨는 자신을 국내 굴지의 기업체 사장의 외아들로, 부산의 고교 1학년에 재학 중인 ‘강태민’이라고 소개했다. 박 씨의 화려한 거짓 프로필에 윤 양이 관심을 보인 것은 당연했다. 채팅을 통해 윤 양과 가까워지자 완벽하게 남자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박 씨는 윤 양에게 매일같이 전화를 걸어 호감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또래 여중생들이 좋아하는 나즈막하면서도 달콤한 속삭임에 윤 양은 점점 박 씨에게 빠져들었다.
이들은 어느새 실제 만남을 갖기로 약속하게 된다. 박 씨는 나이도 어린데다가 곱상한 외모를 지니고 있는 연인이자 공범인 홍 씨를 ‘강태민’으로 둔갑시켜 윤 양과 만남을 갖도록 했다. 윤 양을 감쪽같이 속이기 위해서는 홍 씨의 중성적인 매력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 포인트였다. 실제로 가슴을 압박붕대로 동여매고 ‘미소년’다운 차림새를 한 홍 씨는 영락없는 ‘꽃미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윤 양 역시 인기 아이돌 스타를 닮은 홍 씨를 보고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이들은 윤 양의 환심을 사기 위해 또래 소녀들의 심리를 철저히 이용했다. 멋진 외모에 돈까지 많은 부잣집 도련님은 사춘기에 접어든 윤 양 같은 소녀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던 것.
박 씨 등은 윤 양의 기를 세워주기 위해 보란듯이 공개적인 구애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윤 양 앞으로 장미 꽃다발을 보내는가 하면 재벌아들에 걸맞게 호화 귀금속 등의 선물공세를 펼쳐 사춘기 소녀의 환심을 샀다. 또 홍 씨는 윤 양을 만날 때는 임시로 고용한 경호원 두 명을 이끌고 에쿠스 차량을 이용해 윤 양의 학교 정문 앞에서 기다리는가 하면 윤 양의 주변사람들 앞에도 ‘남자친구’ 행세를 하며 버젓이 나타나기도 했다. 홍 씨는 자신의 ‘여비서’라며 박 씨를 항시 대동하고 다녔고 윤 양에게 그런 홍 씨의 존재는 마치 백마 탄 왕자나 다름없었다.
부러운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친구들의 시선에 윤 양은 홍 씨를 더욱 흡족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윤 양의 친구들과 가족들도 몇 차례 홍 씨를 봤으나 그가 여자일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수 개월 동안 공을 들인 탓일까. 윤 양은 홍 씨에게 급속히 빠져들었다. 줄곧 최상위권을 유지하던 윤 양은 결국 학교도 그만두게 됐고 그해 9월경에는 아예 집에서 나와 박 씨 일당을 따라갔다.
윤 양을 부산의 숙소로 데려간 이들은 본격적으로 ‘돈 되는’ 사기행각을 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함께 생활을 하게 된 이상 윤 양이 자신들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들은 윤 양을 감쪽같이 속이기 위해 ‘주술’과 ‘빙의’ 등을 이용하는 터무니없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박 씨 등은 윤 양에게 ‘빙의현상’에 대해 설명하며 홍 씨와 또 다른 공범 박 아무개 씨(여·24)의 몸이 뒤바뀌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또 전라도의 한 사찰로 윤 양을 데리고가 ‘누군가 네 부모를 죽이려고 한다. 네가 주술을 외워 그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집요하게 세뇌시켰다.
순진한 윤 양은 자신이 실제로 살인을 했다고 믿고 밤잠을 못 이루며 심한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하지만 이들 일당은 윤 양 앞에서 일부러 ‘사체를 처리하는 방법’, ‘사건을 수습하는 방법’에 대해 짐짓 심각하게 논의하는 등 오히려 윤 양의 불안한 심리를 자극했다.
이들의 리얼한 연기와 지속적인 세뇌에 윤 양은 무엇이 진실이고 옳은 것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일종의 환각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이 사태를 해결하는 방법은 박 씨 일당을 믿고 의지하는 방법이 최선이라고 믿게 된다.
이들은 그해 9월 초 윤 양으로 하여금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사람을 죽여 돈이 필요하다”고 허위로 고백하게 만든 뒤 수습 대가로 5000만 원을 송금받았다. 또 “일이 잘못될 경우 딸이 북송선을 타야 된다”며 6000만 원을 편취하고 이후에도 사건 처리와 신변보호 등을 빌미로 윤 양의 부모로부터 수차례에 걸쳐 돈을 뜯어냈다. 이들은 ‘딸의 살인행각이 밝혀지면 모든 게 끝’이라고 겁을 줘 경찰에 신고조차 못하도록 했는데, 이들 일당이 2003년 9월부터 지난해 10월 20일까지 약 3년 동안 뜯어낸 돈은 무려 6억 4000만 원에 달했다.
사기행각에 재미를 붙인 박 씨 등은 또 다른 공범들과 짜고 2004년 2월경 채팅을 통해 알게 된 이 아무개 양(19)에게도 접근, 이중 사기행각을 시작했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 양 역시 윤 양과 마찬가지로 박 씨 등의 사기행각에 감쪽같이 속아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수법으로 박 씨 일당이 두 명의 부모로부터 뜯어낸 돈은 총 12억 8000만 원. 이들은 갈취한 돈으로 수시로 일본을 오가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렸으며 무리를 지어 합숙해가며 문란한 동성애행각을 벌여온 것으로 드러났다.
그 와중에도 이들은 윤 양 등의 부모에게 ‘신변보호를 위해 윤 양을 호주로 유학을 보냈다’고 거짓말을 하고 부모를 안심시키기 위해 매일 전화를 걸어 딸의 안부까지 전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들의 사기행각을 알 리 없던 윤 양 등의 부모는 살인을 저지른 딸이 행여라도 잘못될까 전전긍긍하며 이들 일당의 말을 철석같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려 3년여간 이어진 이들의 사기행각은 지난해 10월경 윤 양이 이들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면서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윤 양이 이들과 합숙생활을 해오면서 눈치 챈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것. 특히 어느날 이들의 엽기적인 동성애 행각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윤 양은 그동안 자신이 완벽하게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윤 양은 도망칠 기회를 노렸고 탈출시도가 실패할 때마다 감금과 무지막지한 폭행이 이어졌다. 특히 박 씨 등은 자신들의 사기행각이 들통날 것이 두려운 나머지 윤 양을 일본 오사카의 성매매업소에 팔고 성매매까지 강요했던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지난해 11월 이들로부터 극적으로 탈출한 윤 양은 부모에게 진실을 털어놓고 올 1월 경찰에 신고했다.
이처럼 영화와 같은 여성 동성애자 일당의 사기행각은 지난 2월 24일 박 씨 등이 김해공항을 통해 입국하던 중 출입국관리사무소와 공조한 경찰에 붙잡히면서 꼬리가 잡혔다.
하지만 윤 양 등이 받았을 정신적 충격과 고통은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게 경찰 관계자의 말이다. 특히 어린 딸을 지키기 위해 수억 원을 ‘갖다바친’ 윤 양 등의 부모는 그동안 집과 땅을 팔고도 모자라 사채까지 끌어들인 결과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한창 예민하고 중요한 시기에 있는 사춘기 소녀의 순수한 마음을 농락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죄질은 더없이 나쁘다”며 “마치 영화 속에서나 나옴직한 이들의 기막힌 사기행각에 조사를 하면서도 적잖이 놀랐다”고 전했다. 더욱이 이들은 경찰에서 조사를 받으면서도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주술을 외는 등 교주 행세를 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 경찰을 아연실색케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