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그놈 목소리>의 한 장면. 납치자작극 커플은 이 영화를 보고 범행을 모의했다. | ||
애인 사이인 간호사 A 씨(27)와 이혼남 B 씨(40)가 사건의 장본인들. 이들 두 사람은 지난 3월 5일 A 씨가 강도에게 납치된 것처럼 꾸미고 A 씨의 부모에게 2억 원을 요구했다가 부모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 의해 범행 하루 만에 체포됐다.
전주 덕진 경찰서는 지난 3월 6일 공갈 협박 등의 혐의로 애인 B 씨를 구속하고 A 씨는 ‘친족 상도례’(친족 간 사기나 절도 등은 본인이 고소하지 않을 경우 처벌하지 않는 형법상 규정)에 따라 귀가 조치했다고 밝혔다. 경찰 조사 결과 이들 연인은 지난 2월 실제 소년 유괴살해 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 <그놈 목소리>를 보며 이 같은 범행을 모의한 것으로 드러나 경찰을 또 한 번 황당하게 했다.
한동안 전주 시내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철없는’ 연인의 납치 자작극. 과연 이들의 범행 뒤에는 어떠한 사연이 숨어 있었을까.
지난 2월 말 A 씨와 B 씨는 평소처럼 데이트를 즐기며 한 극장에서 영화 <그놈 목소리>를 보았다. 극장 밖으로 나오던 길에 B 씨가 A 씨에게 무심코(?) 한마디를 던졌다. “네 부모에게 전화해서 딸을 납치했으니 돈을 내놓으라고 하면 줄까?” 웬만한 사람들 같으면 꿈에서조차 입에 담지 못할 악담. 그러나 사랑에 눈이 먼 A 씨는 애인의 이 같은 말을 그저 농담으로 흘려듣지 않았다. “그럼, 우리 한번 실험해볼까?” 오랜 기간 실직 상태이던 애인을 위해 A 씨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납치 자작극을 벌일 결심을 하게 된다.
지난 3월 5일 새벽 4시 반께 B 씨는 아무 것도 모른 채 곤히 잠든 애인 A 씨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정이 지나 몇 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새벽녘에야 겨우 ‘연결’이 되었다. B 씨는 짜놓은 각본대로 “당신 딸을 납치했으니 2억 원을 주지 않으면 죽여서 묻어버리겠다. 5시까지 돈을 준비하라. 다시 전화하겠다”며 A 씨의 아버지를 협박했다. 범행을 성사시키기 위해 최대한 악랄한 것처럼 가장하기까지 했다.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A 씨의 아버지는 경찰에 신고하지 말라는 B 씨의 협박에도 일단 112에 신고부터 했다.
마침 야근 중에 무전을 통해 사건을 접수 받은 전주 시내 경찰들에게 비상이 걸렸다. 당직 후 퇴근해 집에서 휴식을 취하던 일부 경찰관들도 전원 비상 출동했다. 경찰은 협박 전화가 걸려온 B 씨의 휴대전화번호로 위치를 추적하는 한편 “딸이 아는 남자 때문에 2억 원이 필요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연관이 있는 것 같다”는 A 씨 부모의 말에 ‘아는 남자’ B 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B 씨의 차량을 긴급 수배했다.
경찰은 시내 곳곳을 탐색하던 중 한 모텔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B 씨의 차량을 발견했다. 이 모텔에는 A 씨와 B 씨가 함께 투숙해 있었다. 긴급 출동한 경찰차 8대가 모텔 주변을 에워싸고 지원 나온 지구대 소속 경찰까지 총 34명의 경찰관이 건물 곳곳에 배치됐다. 이윽고 몇몇 경찰관이 B 씨가 투숙하고 있던 7층 방문을 두드렸다. 협박전화 뒤에 휴대폰을 꺼놓았기에 경찰이 자신들을 찾아낼 줄은 상상도 못하고 있던 이들 연인은 ‘검문 나왔다’는 경찰의 말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문을 열지 않자 결국 비상키로 문을 따고 들어간 경찰은 당황한 모습의 A 씨와 B 씨를 붙잡아 경찰서로 연행했다.
아무리 사랑에 눈이 멀었기로서니 어떻게 부모 가슴에 못을 박으며 납치 자작극을 꾸밀 결심을 하게 됐을까. 특히 A 씨는 <그놈 목소리>라는 영화를 보면서 자식이 납치된 부모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을 테고 이혼남 B 씨 역시 장성한 대학생 아들을 키우는 부모 입장이었는데 말이다. 이들 연인이 납치 자작극을 벌여야 했을 정도로 돈이 필요했던 사연은 2003년 8월께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한 병원에 간호사로 취업한 A 씨는 당당한 사회인으로서의 설렘이 채 가시기도 전에 환자로 입원한 ‘연상의 남자’ B 씨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들은 곧 연인 사이가 됐고 B 씨가 퇴원한 후에도 계속 달콤한 데이트를 즐겼다. 그러나 B 씨는 회사원으로 일하다 그만두고 이런저런 사업에도 실패해 누나에게 용돈을 받고 살던 백수나 다름없던 처지. A 씨는 자신이 데이트 비용을 감당하면서도 마냥 행복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중 2005년 5월에 이르러 이들 연인이 납치 자작극을 벌이는 데 빌미가 된 사건이 발생한다. 간호사로 일하고 있던 A 씨는 친구 문병차 병원에 왔던 한 남자로부터 구애를 받으며 이런저런 실랑이를 벌이던 중 이 남자로부터 심한 모욕을 당하게 된다. 분에 못 이긴 A 씨는 B 씨에게 이러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자신의 애인에게 수작을 걸고 모욕까지 한 남자가 너무도 괘씸했던 B 씨는 A 씨로부터 남자의 연락처를 알아내 전화로 따졌다.
한 여자를 두고 대립한 남자들 사이에 어떤 말이 오고갔을지는 뻔한 일. 자신이 다른 지역에 있는데 찾아올 테면 와보라는 이 남자의 말에 B 씨는 결국 그곳으로 달려가게 됐고 약속 장소에 나온 남자 등 3명과 언쟁을 벌이던 끝에 그만 주먹을 휘두르게 된다. 운동선수처럼 몸이 좋았던 B 씨는 이들 세 남자에게 각각 실명, 치아 골절 등의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고 말았다. 결국 B 씨는 이 사건을 무마하는 조건으로 합의금 1억 원을 줘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 모든 게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생각한 A 씨는 결국 합의금으로 1억 원을 주었다는 B 씨의 말에 심한 자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망설임 끝에 자신의 부모에게 이 같은 사실을 말하고 도움을 청했다. 아는 남자가 있는데 자신 때문에 사고가 생겨 합의금으로 2억 원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 그 순간에도 애인에게 사업자금으로 웃돈을 얹어주고 싶어 1억 원을 부풀렸다. A 씨의 부모는 전주 시내 요지에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고 땅값이 오르던 중이라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B 씨는 경찰 조사에서 혐의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며 펑펑 울고 말았다고 한다. A 씨 또한 “부모님 뵐 낯이 없다”며 “따로 조사를 받게 해달라”고 사정했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A 씨는 “그 사람한테 미안하다”며 자신의 부모 속을 새까맣게 태운 B 씨를 계속 감싸기도 했다고 한다. 이들 연인의 어긋난 사랑 행각은 결국 부모와 경찰을 우롱하고 서로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장유지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