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재 현장 검증 당시 카메라에 잡힌 박한상의 모습. 정원에 불에 탄 옷가지와 가재도구들이 널려 있다. 사건 당시엔 아들 박 씨가 부모를 그렇게 잔인하게 살해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사진제공=문화일보 | ||
이번에 경찰청 특수수사과 조상복 경감이 전하는 사건은 당시 부유층 ‘패륜아’의 대명사로 불렸던 박한상에 대한 것. 남부러울 것 없던 수백억대 부잣집 아들이 도피성 유학을 떠났다 향락과 도박에 빠져 결국 돈 때문에 부모까지 끔찍하게 살해하고 만 사건이다.
조 경감은 “박한상 사건은 부모자식간의 의사 단절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또 의미 없는 도피성 유학이 한 인간을 어떻게 타락시키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던 사건”이라면서 “황금만능주의가 만연한 우리 사회에 다시 한번 부모란 그리고 자식이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고 13년 전의 사건을 다시 펼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지난 1994년 5월 19일 오전 부유층이 모여 사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 주택에서 다급한 화재신고가 들어왔다. 화재가 발생한 곳은 당시 대한한약협회 서울지부장인 박 아무개 씨의 자택으로 신고를 한 사람은 박 씨의 아들 박한상(당시 23세)이었다.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이뤄진 이 집은 당시 내부 수리 중이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지하 1층에서 임시로 생활하고 있던 상태. 이 ‘사고’로 지하 1층은 전소됐고 안방에서 잠을 자고 있던 박 씨의 부모는 처참한 사체로 발견됐다. 졸지에 부모를 잃은 박 씨는 “자다가 불이 난 것을 알고 급히 빠져나오느라 미처 부모님을 구출하지 못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이 같은 박 씨의 모습에 처음엔 단순 화재사건인 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살인사건’으로 결론을 내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강남경찰서에 근무할 당시 이 사건을 담당했던 조상복 경감의 얘기.
“두 구의 시신을 옮겨놓고 보니 이상했다. 화상으로 인한 상처는 피가 흐르지 않는데 시신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는 게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시신을 뒤집어 보니 등이고 뭐고 온몸이 흉기에 찔려 엉망이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경찰은 한약상을 운영하던 이들 부부가 수백억대에 달하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 누군가 재산을 노렸거나 원한에 의해 저지른 살인사건으로 보고 수사에 착수했다. “자그만치 40~50군데나 찌르고도 모자라 범인은 사체를 태워 범행을 덮어버리려고 했다. 보통 원한을 산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할 만큼 살해수법이 잔인했다”는 것이 조 경감의 얘기다.
경찰은 박 씨 부부와 채무나 치정, 사업을 둘러싸고 갈등관계에 있던 사람이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용의자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평소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정직하고 신실한 생활을 했던 이들 부부가 어느 누구에게도 원한을 살 만한 일은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여러 가능성을 놓고 수사를 진행했지만 좀처럼 용의자의 윤곽은 드러나지 않았고 수사는 제자리를 맴돌기만 했다. 하지만 조 경감은 사건 직후부터 이들 부부의 아들 박 씨를 눈여겨봤다고 한다. 부모가 그토록 처참히 흉기에 찔릴 동안 전혀 몰랐다는 것이 이상했을 뿐 아니라 박 씨의 진술도 석연치 않았던 것. 또 유학생인 박 씨가 방학도 아닌데 귀국했다는 점도 의문스러웠다.
“박 씨는 횡설수설하며 당시 상황에 대한 진술을 번복하다가 나중에는 자다가 황급히 뛰쳐나오느라 아무것도 몰랐다고만 했다. 하지만 경황이 없어 신발도 신지 못하고 맨발로 뛰쳐나왔다는 박 씨의 발바닥이 금방 씻은 듯 너무도 깨끗한 것부터 이상했다.”
그동안 용의선상에서 제외됐던 박 씨에 대해 ‘조용히’ 조사를 진행하던 조 경감은 박 씨네 집안 내부적으로 남모를 갈등이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공부에 취미가 없는 아들 때문에 평소 부자간 갈등이 깊었다고 한다. 지방대에 간신히 들어가긴 했는데 부모 자존심상 그게 허락되지 않았던 거다. 돈이 있으니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는데 거기서도 박 씨는 학업은 뒷전이고 속을 썩였다고 한다. 박 씨는 부모의 기대수준에 미치지 못해 완고한 아버지와 적잖은 갈등을 겪어왔으며 박 씨의 어머니는 사사건건 부딪히는 부자 사이에서 전전긍긍하며 아들을 감싸느라 애를 태우고…. 경제적으로는 풍족했지만 집안은 한시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는 거였다.”
하지만 박 씨를 용의선상에 올리는 것에 대해 수사팀 내에서도 말이 많았다고 한다. 조 경감은 “당시만 해도 아들이 부모를 그렇게 끔찍하게 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어떻게 아들이 부모를 그렇게 잔인하게 죽이겠냐. 또 사체를 태우고 뻔뻔하게 신고까지 할 리가 있겠나. 미국 유학생인 부잣집 아들이 부모를 죽일 리 없다. 박한상은 절대 아니다’라는 의견이 대세였다”고 술회했다.
박 씨의 친척들은 아예 경찰이 박 씨에게 접근조차 못하게 막았다고 한다. 조 경감은 “뭐 하나 물어보려 해도 친척들이 박 씨 옆에 딱 붙어서 끼고다니는 바람에 도무지 접촉이 어려웠다. ‘부모를 잃은 것만도 불쌍한데 건드리지 말라. 안 그래도 큰 충격을 받았을 텐데 애 붙잡고 조사해서 뭘 어쩌자는 거냐’는 식이었다”며 당시의 어려웠던 수사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던 어느날 조 경감은 박 씨가 화상 치료를 위해 입원해 있던 한 병원의 간호사로부터 뜻밖의 얘기를 듣게 된다.
“박 씨의 머리에서 피가 나오는 것 같아 그 간호사가 자세히 살펴봤다고 한다. 그런데 머리에는 흉터 하나 없고 머리카락에만 여기저기 피가 묻어 있어서 이상하게 생각했다는 거다.”
간호사의 말을 듣는 순간 조 경감의 뇌리속엔 불현듯 범죄 시나리오가 그려졌다고 한다. 이미 조 경감은 박 씨의 발목 부분에 있던 의문의 상처도 눈여겨 봐둔 터였다. 사람의 이빨자국과 흡사한 이 상처는 생긴 지 얼마 안 된 듯 미처 아물지도 않은 상태였다.
“조사 결과 박 씨의 머리카락에 묻은 혈흔은 그의 부모의 피로 밝혀졌고 다리의 이빨자국은 박 씨 아버지의 치아구조와 일치했다. 사건 당시 박 씨의 아버지가 고통에 못 이겨 박 씨의 발목을 물어뜯은 상처였다. 범행 상황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충분히 짐작케 하고도 남았다.”
▲ 부모 살해 장면을 재연하는 박한상(왼쪽)과 그의 선고 공판 당시 모습. | ||
90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방 모 대학 토목과에 입학한 박 씨는 공부에 뜻이 없어 좀처럼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93년 여름 방위병으로 제대한 후에도 박 씨는 복학을 하지 않고 유흥가를 들락거렸고 아버지와의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보다 못한 아버지는 다니던 교회의 목사와 상의해 그해 박 씨를 미국 LA 근교의 한 컬리지에 유학을 보내게 된다. 일종의 도피성 유학이었던 셈. 박 씨는 월 500달러짜리 월세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매월 2000달러의 생활비를 받아 왔는데 그뒤 그의 유학생활은 그야말로 방탕한 생활의 극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 경감의 이어지는 설명.
“박 씨는 비슷한 처지의 ‘도피성 유학생’들과 어울렸다. 고삐 풀린 망아지가 따로 없었다. 돈은 많고 할 일이 없자 박 씨는 인근의 라스베이거스에서 도박을 즐겼는데 하룻밤에 5000달러를 잃는 일도 다반사였다고 한다.”
밑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돈을 도박에 탕진한 박 씨는 결국 그해 1월 귀국한다. 박 씨는 아버지에게 승용차를 사달라고 졸라 1만 8000달러를 받아 출국, 그 돈마저 도박판에서 모두 잃고 만다. 박 씨는 그해 4월 다시 비밀리에 귀국해 은행에서 카드를 발급받고 이 카드로 사채업자에게 현금을 빌린 뒤 호텔 나이트클럽 등을 전전하며 전형적인 오렌지족 생활을 했다. 하지만 사흘 만에 부모에게 발각돼 미국으로 쫓겨갔다고 한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 무작정 유학을 간 박 씨가 제대로 공부를 할리가 있었겠나.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새는 법. 술과 도박, 비디오에 빠져 살던 박 씨는 유학생활 중 오히려 3700만 원의 빚만 졌다. 평소 아버지가 못마땅하던 차에 빚을 갚아주지는 않고 ‘호적을 파겠다’며 꾸짖자 살인을 결심하게 된 거다. 특히 미국에서 범죄비디오를 많이 봤던 모양인데 그것을 보고 범행을 계획하게 된다. 나중 일은 생각하지 못하고 부모만 죽이면 빚도 해결되고 모든 재산이 자기 것이 된다는 생각이었다.”
5월 13일 귀국한 박 씨는 범행 사흘 전부터 세운상가를 돌며 범행에 필요한 등산용 칼과 플라스틱 기름통을 사고 신사동의 한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사서 집안 차고에 숨겨놓는 등 치밀한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드러났다.
“부모가 잠든 것을 확인한 박 씨는 피가 튈 경우 범행이 발각될 것을 우려해 옷을 완전히 벗고 들어가 부모를 무참히 찔러 살해했다. 그후 샤워를 한 박 씨는 범행에 사용된 도구들을 내다버리고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불을 지르고 신고를 했다. 그런데 머리에 피가 튀었을 거란 생각을 못하고 머리를 안 감은 거였다.”
박 씨에 대해 의심을 눈길을 거두지 않고 수사를 진행해왔던 조 경감이었지만 막상 모든 것이 박 씨의 범행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부모를 그렇게 끔찍하게 죽이고서도 박 씨는 표정의 변화 하나 없었다. 혹시나 해서 박 씨의 통화내역을 감청하기도 했는데 박 씨는 애인과 낄낄거리며 대화를 하는 등 죄책감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 오죽하면 ‘내가 잘못 짚은 게 아닐까. 얘가 범인이 아닌가보다’라는 생각까지 했겠나.”
박 씨의 자백 후 중요한 것은 증거물 확보였다. 박 씨는 처음에는 새벽에 오는 청소차에 흉기를 던져버렸다는 등 계속 거짓말을 하다가 추궁 끝에 집 근처 공터에 버렸다고 털어놨다. 경찰은 범행에 사용된 등산용 칼 등을 증거품으로 압수하고 6월 2일 현장검증을 끝으로 박 씨를 존속살인 및 방화혐의로 구속했다. 이 사건은 ‘패륜범죄’가 생소했던 당시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키며 국민들의 충격과 분노를 자아냈다.
“많은 사람들이 ‘설마 그럴 리가 있겠나. 뭐가 잘못된 거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당시 유명한 한 변호사는 ‘가만 있어도 유산을 상속받게 될 아들이 부모를 죽였을 리가 없다’며 박 씨의 무료변론까지 자청하고 나섰다. 기껏 사건의 전모를 밝혀냈는데 잘못된 수사라느니, 경찰의 강압수사로 인한 허위자백이라는 얘기를 들으니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조 경감은 이 사건을 통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언론에서는 ‘패륜아 박한상’의 잔인한 범행만을 자극적으로 보도했지만 중요한 것은 참극을 만들어낸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이냐는 거였다. 박한상이 패륜아인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자식을 키우는 아버지로서 많이 생각해봤다. 기대에 못 미치는 아들과 자식에 대한 욕심이 컸던 부모간에 생긴 감정의 골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박 씨에게는 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어릴 때 친척집에 입양을 보내 사실상 박 씨는 외아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경제적 능력이 있었던 박 씨 아버지로서는 하나뿐인 아들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해왔고 아들이 자신의 기대에 어느정도 따라주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런데 현실은 사뭇 달랐다. 그렇게 부모와 자식 간 의사의 단절이 서로에게 지울 수 없는 앙금으로 남아 있었고 그것이 한순간 분출되면서 살인이라는 엄청난 비극을 불러온 것이라고 본다.”
또 조 경감은 아무 계획도 없이 이뤄진 도피성 유학이 박 씨의 타락을 부추겼다면서 그 문제점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당시는 유학이 드문 때였다. 한국에서 변변치 못한 대학에 다녀봤자 자존심만 상하고 별 비전이 없다는 이유로 도피성 유학을 보낸 것도 문제였다. 90년대 사회를 뒤흔들던 오렌지족은 실패한 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방탕하고 퇴폐적인 소비를 일삼으며 많은 문제들을 양산해냈다. 반면 유학파라는 프리미엄은 실로 대단했다. 박 씨 역시 비뚤어진 미국 문화에 젖어 술과 여자, 도박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했고 부모가 보내준 돈을 탕진하고 빚까지 지자 이처럼 엄청난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95년 8월 25일 대법원에서 사형을 확정받은 박 씨는 현재 13년째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
박한상의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다. 한때 박 씨가 교회 중·고등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것 역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하지만 박 씨는 여전히 굳게 마음을 닫은 채 변화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과연 무엇이 박 씨를 희대의 ‘패륜아’로 만들었을까. 또 대체 무엇이 그를 참회조차 모르는 냉혈한으로 만든 것일까.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