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4년 경기도 가평의 한 야산에서 실시된 현장검증에서 범행을 재연하고 있는 전용철 씨. | ||
과거 전 씨는 배 씨 밑에서 유명 스타의 로드매니저로 일하며 인연을 맺었던 사이. 당시 경찰은 배 씨로부터 인격적 모욕을 당한 전 씨가 원한과 금품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연예가 일각에서는 그의 범행 동기를 놓고 갖가지 뒷말이 무성했던 게 사실이다.
지난 2002년 옥중의 전 씨는 배 씨 살해사건과 관련해 ‘숨겨진 진상’을 폭로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또 한 차례의 핵폭풍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그는 ‘침묵’으로 일관, 수많은 의혹과 궁금증을 자아냈었다.
전 씨가 이처럼 수년간 가슴 속에 꽁꽁 담아두었던 그 ‘진실’들이 어쩌면 앞으로 출간될 그의 옥중 수기를 통해 세상에 드러날지도 모르겠다. ‘참회록’ 형식으로 집필하고 있는 이 수기에서 전 씨는 자신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당시 사건의 숨겨진 뒷얘기들을 고백할 것으로 알려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유명 스타들을 거느렸던 배 씨의 죽음 뒤에는 과연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 걸까. 지난 13일 원주교도소에서 전 씨를 만났다.
푸른색 수의를 입고 나타난 전 씨는 한눈에도 건강해 보였다. 불쑥 찾아온 기자를 보고 무척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이내 담담하게 근황을 전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는 질문에 전 씨는 “아주 잘 지내고 있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살인죄로 21세의 나이에 무기형을 선고받고 수감된 그는 어느덧 삼십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도 시간은 가더라. 처음에는 단 하루도 못 견딜 것 같았는데… 제일 정직한 게 시간인 것 같다.”
이젠 교도소 생활이 아주 익숙해졌다는 그는 소 내에서 이런저런 작업을 맡기도 하는 등 아무 탈 없이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 과거에 알고 지내던 연예 관계자들은 발길을 끊은 지 오래지만 친구들이 잊지 않고 종종 접견을 오고 있다고 했다.
“모든 것이 편안하다”고 말하는 전 씨. 하지만 순간의 실수로 찬란한 20대를 몽땅 날려버린 그의 심사가 어찌 편할 수 있었을까. 현재의 ‘평정’을 되찾기까지 그는 자기자신과의 혹독한 싸움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전 씨는 그동안 일부러 바깥 세상일을 잊고 지냈다고 한다. 세상과의 소통은 언제 세상에 나올 수 있을지조차 명확하지 않은 ‘무기수’인 그에게 어쩌면 더 큰 좌절을 안겨줄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신 그는 외부와 분리된 공간에 철저히 적응해나간 듯했다. 실제로 전 씨가 교도소 내에서 딴 자격증만도 무려 13개. 그가 만약 세상과 영원히 단절되어 살아가야 한다는 절망감에 빠져 지냈더라면 이런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전 씨는 살인이라는 중죄로 무기형을 선고 받긴 했지만 초범인 데다 착실한 수감생활로 인해 이미 수년 전부터 모범수의 신분을 유지해오고 있다. 옥중에서 기독교를 믿게 됐다는 전 씨는 이따금 마음이 흔들리거나 괴로울 때면 신앙에 의지해 마음을 다스리는 듯 보였다.
13년이 지난 현재 전 씨는 과연 ‘그때 그 사건’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을까.
이날 전 씨에게서 새로운 ‘폭탄발언’을 들을 수는 없었다. 대신 전 씨는 “이제는 마음을 비운 상태”라는 말로 현재 심경을 전했다. ‘사건의 진실’을 폭로하겠다던 2002년 당시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배후’가 있다는 주장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지만 전 씨는 살인을 한 자신의 잘못을 먼저 인정하고 뉘우치는 태도를 보였다.
▲ 살해된 배병수 씨. | ||
전 씨가 5년 전 세상에 끄집어내려다 다시 가슴 속 깊이 묻어둔 얘기는 앞으로 출간될 그의 수기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전 씨는 몇 년 전 수기 형태의 참회록을 내겠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몇 가지 문제로 상당한 고뇌를 거듭하다가 얼마 전에야 다시 출간에 대한 뜻을 굳힌 듯 보였다.
전 씨는 한참 망설이다가 “지금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그동안에도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이날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전 씨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사건과 관련해 몇몇 관계자들로부터 어떤 제의나 얘기들이 수차례 오고갔다’는 것이다.
전 씨에 따르면 현재 수기는 3분의 2가량 완성된 상태로 조만간 적당한 출판사를 알아볼 계획이라고 한다. 이 수기에는 아역 탤런트로 활동하던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자신이 겪었던 사건과 사람들에 대한 소회, 철없던 시절에 대한 참회, 앞으로의 계획 등이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사건 전까지도 너무 철이 없었다. 세상 무서운 줄 몰랐다. 내가 제일 잘났고 뭐든지 내 마음대로 될 것 같은 착각 속에 살았다.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니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겠더라. 바깥 세상에 있었더라면 지금도 한심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이제야 철이 든 것 같다.”
아역 탤런트 출신으로 연예인 로드매니저로 활동했던 그는 수기를 통해 화려해 보이는 연예계의 ‘뒷모습’에 대해서도 언급할 계획이다.
“연예계는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화려하기만 한 세계가 아니다. 현재 연예계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경으로 연예인을 지망하는 청소년들에게 또 다른 실상을 전해주고 싶다”는 것이 전 씨의 얘기.
물론 수기에는 운명적인 ‘그 사건’에 대한 내용도 포함될 것이다. 전 씨는 “연예인 매니저 일을 했던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밝혔지만 그날의 사건이 평범했던 한 청년의 운명을 바꿔놓았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전 씨가 수기에서 사건의 이면에 자리한 또 다른 진실에 대해 어느 정도 수위까지 기술할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 하지만 현재 그의 심경으로 보아 ‘폭로’보다는 ‘참회’에 가까운 글이 될 듯 보였다.
이날도 전 씨는 과거에 매니저 배 씨와 인연을 맺었던 유명 스타들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다소의 서운함과 아쉬움을 언뜻 내비쳤을 뿐이다.
한편 전 씨는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한 여성과 지난 2004년 초 옥중결혼을 올리기도 했다고 밝혔다. 아홉 살 연상인 그녀는 1년 동안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전 씨를 면회 왔다고 한다. 하지만 어렵게 맺은 부부의 연은 안타깝게도 오래가지 못했다고 한다.
“갇혀 있는 나보다 바깥에 있는 그 사람이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보내줬다”는 것이 전 씨의 얘기. 쉽지 않았지만 신앙으로 마음을 다스린 탓에 지금은 편안한 상태라고 한다. 요즘 그의 유일한 걱정은 부모에 대한 것이었다. 부모 얘기가 나오자 전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버지가 폐암으로 투병 중인데 다른 부위까지 전이가 되어 힘든 상태라고 한다. 어머니도 뇌 부분에 문제가 있는데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다. 부모님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내가 나갈 때까지 살아계실지 모르겠다. 아직 3~4년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전 씨의 표정에서 그의 옥중 수기가 ‘참회록’이 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