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6일 납치 이틀 만에 탈출한 H 골프장 사장(왼쪽). 연합뉴스 | ||
이번 사건의 주요 등장인물은 모두 네 사람. 첫 번째 인물은 지난 2월 26일 납치를 당한 H 골프장의 강 아무개 사장(59)이다. 강 사장은 피랍 이틀 만인 28일 오후 탈출한 직후 자신의 외삼촌을 납치 배후로 거론했다. 여기서 강 사장의 둘째외삼촌 윤 아무개 씨(66)가 두 번째 인물로 등장한다. 이들 두 사람이 앞서 언급한 ‘대립축을 이뤘던 두 주연배우’다.
당초 골프장 소유권 다툼을 둘러싼 강 사장과 윤 씨의 친인척 간 다툼으로 여겨졌던 사건은 지난 13일과 16일 각각 김 아무개 변호사(41)와 사업가 정 아무개 씨(39)가 납치 공모 혐의로 구속되면서 또 다른 반전을 이뤄냈다. 관심이 쏠리는 것은 결코 예사롭지 않은 이들 두 사람의 면면 때문이다. 정 씨는 지난 1970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정인숙 피살사건’의 주인공인 정인숙 씨의 ‘숨겨진’ 아들이다. 김 변호사 또한 지난 2005년 부장검사까지 지낸 인물. 경찰은 이들 두 사람과 윤 씨가 강 사장의 납치극을 서로 공모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사건 초기부터 제기됐던 갖가지 의혹들은 여전히 가시질 않고 있다.
재일교포 기업가인 강 사장의 부친은 2001년 3월 삼남인 강 사장의 동생에게 경영권을 물려줬으나, 그해 12월 강 사장이 소송을 제기해 동생과 외삼촌 윤 씨가 각각 대표이사직과 전무이사직을 박탈당하고 배임혐의로 구속됐다. 이때부터 강 사장은 H 골프장을 경영해오고 있다.
하지만 복잡한 지분 문제로 인해 여전히 ‘분쟁’의 뇌관을 안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H 골프장의 전직 관계자 A 씨는 “골프장 매각 문제가 상당히 오래전부터 주된 관심사였고, 몇몇 대기업에서도 탐을 냈는데 복잡한 지분 문제 때문에 매각 자체가 안 됐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이번 사건을 애초 계획하고 주도한 이는 누구일까. 일단 납치 공모자로 구속된 세 사람이 우선적으로 거론될 수 있다. 여기에 피해자인 강 사장 주변을 둘러싼 의혹의 시선도 여전히 남아 있다.
1.정 씨 주도설
첫 번째 시나리오는 정 씨의 납치극 주도설이다. S 사 대표로 사업을 하는 정 씨가 16일 새벽 전격 검거되기 전까지만 해도 경찰 주변에서는 이 시나리오가 가장 유력하게 떠올랐다.
즉 정 씨가 먼저 윤 씨에게 강 사장의 납치 계획을 제안하면서 ‘만약의 경우 뒤탈을 없애기 위해 강 사장을 죽일 수도 있다’는 뜻을 전했다는 것. 이 같은 내용은 윤 씨가 경찰 조사 과정에서 털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 변호사 또한 “납치 직전 정 씨의 협박에 의해서 가짜 체포영장을 작성했으며 26일 범행 현장에도 가보게 되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정 씨는 구속 직후 “모든 범행은 윤 씨와 김 변호사가 주도했는데도 마치 내가 한 것처럼 두 사람이 뒤집어씌우고 있다”고 반박했다.
그렇다면 정 씨는 과연 어떻게 해서 강 사장과 윤 씨의 골프장 소유권 다툼에 적극적으로 끼어들게 됐을까 하는 의문점이 제기된다. 경찰은 그 중간에 김 변호사가 자리 잡고 있다고 설명했다. 즉 정 씨가 평소 친분이 있던 김 변호사를 통해 H 골프장 사태에 대해 얘기를 들으면서 관심을 갖게 됐고 그의 소개로 윤 씨를 직접 만나게 됐다는 것. 이때 정 씨가 윤 씨에게 강 사장을 납치하면 그 사이에 서류를 변경해서 골프장 매각을 성사시킬 수 있다며 납치계획을 밝혔다는 것이다. 그 대가로 매각대금 3500억 원 중 자신에게 1500억 원을 줄 것을 요구했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납치범행을 위해 한 경호업체 팀을 끌어들이는 일 역시 정 씨가 담당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 씨가 자신이 주도했다는 것을 완강하게 부인한 데다 범행 직후 납치범들에게 해외 도피 자금 2000만 원을 건넨 사람이 김 변호사였던 것으로 밝혀져 또 다른 의문이 제기된다.
2.김 변호사 주도설
골프장 소유권을 되찾기 위한 총체적 계획과 그에 따른 강 사장 납치 필요성 등의 아이디어가 김 변호사에 의해서 나왔을 것이라는 시나리오다. 만약 그렇다면 김 변호사는 H 골프장 내부 사정을 어떻게 파악하게 됐는가 하는 점이 의문으로 떠오른다.
이에 대해 인천공항경찰대 수사본부의 한 관계자는 “김 변호사가 검사 시절 강 사장과 윤 씨의 횡령 혐의 소송 수사를 담당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윤 씨와 친하게 됐고, 따라서 H 골프장 내부 사정에 대해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경찰에 따르면 김 변호사는 조사 과정에서 자신이 윤 씨의 법적 대리인이라고 밝히기도 했다는 것.
▲ 지난 16일 조사를 받는 정 씨. 연합뉴스 | ||
무엇보다 김 변호사가 납치범들에게 가짜 체포영장을 만들어줬고 또한 납치극을 벌일 때 범인들이 ‘국정원 직원’을 사칭한 것 또한 김 변호사의 경력과 무관치 않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확인 결과 김 변호사는 검사 재직시 지난 2003~2004년경 국정원에 파견 근무를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에 대해 김 변호사 측은 “납치 계획 등의 모의는 정 씨와 윤 씨 두 사람이 주로 했다”며 “김 변호사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묵묵히 듣기만 한 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한 경찰 관계자는 “부장검사까지 지낸 김 변호사가 이런 황당한 납치극을 주도했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고 말할 정도로 상식적인 선에서는 김 변호사 주도설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많다.
3.윤 씨 주도설
가장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직접적 이해당사자인 윤 씨의 배후설이다. 즉 윤 씨가 현재 조카 강 사장과 소송 전쟁을 치르는 상황에서 골프장 소유권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법적 대리인인 김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했고, 납치극을 벌일 인물로 정 씨를 소개받았을 것이라는 시나리오다.
하지만 윤 씨가 경찰에서 “납치극이 벌어진다면 내가 첫 번째로 의심을 받을 것이 뻔한데 그런 계획을 주도했겠느냐”고 한 말도 설득력이 있다. 윤 씨는 정 씨가 직접 살해 가능성까지 밝힐 정도로 상당히 적극적으로 납치 계획을 자신에게 설명한 것을 들었을 뿐, 납치극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앞서의 A 씨는 “윤 씨의 평소 성향으로 봐서 자신이 직접 납치극을 주도했다기보다는 주변에서 그럴듯하게 설명하고 설득하면 거기에 휩쓸려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의뢰인과 법적 대리인으로 오랫동안 공감대를 형성해온 윤 씨와 김 변호사가 치밀하게 공모하고 여기에 악역으로 정 씨를 끌어들였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4.강 사장 자작극설
김 변호사 측은 수사 과정에서 일관되게 강 사장의 자작극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강 사장이 골프장 경영권 방어를 위해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살피기 위해 범행 현장인 공항에 갔다”고 밝혔다. 김 변호사 측은 13일 구속 직후 “(김 변호사가) 납치의 모의와 실행이 자작극임을 밝혀내기 위해 이 사건에 개입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동안 강 사장과 그의 부친, 그리고 동생 등의 H 골프장 경영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 현재 이 골프장은 소유 지분 문제가 명확하게 해결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외삼촌 윤 씨 등이 강 사장의 불법적인 경영권 탈취를 주장하며 소송을 준비하는 등 계속 압박해오자 강 사장 측에서 그 타개책으로 모종의 음모를 꾸몄을 수도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사건이 알려진 직후 취재기자들 사이에서도 강 사장이 지난달 26일 납치 과정에서 비교적 순순히 납치범의 차량에 탑승한 점, 그리고 28일 납치장소에서 비교적 손쉽게 탈출한 점, 탈출 직후 경찰에서 곧바로 자신의 외삼촌 윤 씨를 범인의 배후로 지목한 점 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A 씨는 “보도에서 강 사장 납치 사건을 접한 직후 회사의 몇몇 전직 관계자들은 ‘혹시 자작극이 아닐까’하는 의심을 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심지어 강 사장과 정 씨가 납치 차량 안에서 일본어로 대화했다는 김 변호사의 진술에 근거해서 두 사람이 혹시 사전에 아는 사이가 아닐까 하는 의혹도 나오고 있다. 강 사장은 일본 국적을 가진 재일교포이고, 정 씨 또한 일본을 드나들었던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
그러나 경찰의 한 관계자는 이 같은 일부의 시선에 대해 “강 씨는 어디까지나 피해자”라면서 “관계자들의 일관된 진술로 볼 때 자작극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