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택시기사의 사체가 암매장된 장소. 이 사건의 용의자인 70대 A 씨는 죽은 택시기사와 함께 아내를 살해한 혐의도 받고 있다. | ||
경찰 조사 과정에서 피의자 A 씨는 수시로 거짓말을 하며 수사에 혼선을 일으켰고 경찰은 A 씨의 혐의를 밝히기 위해 그의 친인척들 및 수십 명의 주변인들까지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하는 등 유난히 애를 많이 먹었다고 한다. 사건 조서만 해도 A4용지 수백 장에 이를 정도. 그러나 아직도 A 씨는 반성은커녕 꼿꼿한 자세로 살인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고 한다.
과연 A 씨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걸까. 70대 노인이 저지른 엽기적인 살인극 속으로 들어가 보자.
자칫 완전범죄로 끝날 뻔했던 이 사건은 우연히 걸려온 한 통의 신고 전화로 인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지난 3월 11일 오후 3시경 한 지역 주민이 경찰에 전화를 걸어왔다. “웬 자그마한 노인이 1년 전쯤에도 우리 텃밭 주변에서 흙을 메우는 이상한 공사를 하더니 방금 전에는 쇠말뚝까지 박다가 들키자 버스를 타고 도망갔다”는 것이었다. 출동한 경찰이 쇠말뚝이 박힌 자리를 파보자 사망한 지 1년이 훨씬 지난 듯한 변사체가 발견됐다. 하지만 시신은 신원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부패한 상태였고 변사체의 죽음에 연루된 것으로 추정되는 ‘자그마한 노인’을 찾아내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오후 사건의 실마리는 의외로 쉽게 풀렸다. 예의 노인이 버스를 타고 떠났다는 주민의 목격담에 따라 형사들은 아침 일찍 해당 버스회사를 찾아가 기사들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벌였다. 그러던 중 마침 운행 중이던 한 버스기사로부터 경찰에 전화가 걸려왔다. ‘○○정류장에서 용의자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노인이 버스에 올라타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다’는 제보였다. 형사들은 버스기사에게 최대한 천천히 운행하기를 당부한 뒤 순찰차를 동원해 전속력으로 버스를 따라잡고 안에 타고 있던 문제의 노인 A 씨를 긴급체포했다.
그러나 A 씨를 잡았다고 해서 이 사건의 진실이 곧바로 밝혀지지는 않았다. 경찰이 용의자로 지목했던 A 씨는 격렬하게 항의하며 혐의 사실을 부인했다. 마침 노인을 신고했던 텃밭 주인과 양자 대면도 했지만 텃밭 주인마저도 A 씨가 텃밭에서 본 어제 그 노인이 맞는지 자꾸 헷갈려 했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던 중 A 씨는 유치원에서 돌아올 손녀를 데리러 가야 한다며 초조해했고 결국 형사들은 A 씨와 함께 그가 아들 내외와 같이 살고 있다는 아파트로 향했다.
마침 A 씨가 사는 아파트 현관에는 CCTV가 설치돼 있었다. 형사들은 녹화자료를 입수한 뒤 변사체가 발견된 사건 당일 A 씨가 쇠막대가 든 배낭을 메고 현관을 나서는 장면을 확보할 수 있었다. 경찰 조사 때 “사건이 있던 날엔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고 이미 거짓말을 했던 A 씨는 형사들이 CCTV 녹화 자료를 내밀자 “근처 온천에 잠시 들르러 가면서 그저 대나무를 버리려고 배낭에 담았던 것”이라고 둘러댔다.
형사들은 ‘노인이 1년 전에도 한 젊은 남자와 함께 손수레에 흙을 가득 담아다가 현장을 꼼꼼히 덮은 적이 있다’는 텃밭 주인의 진술과 자꾸 범행 현장에 나타났던 A 씨의 행적으로 미루어 볼 때 혹시 가족이나 지인 간에 재산을 노리고 저지른 사건은 아닌지 의심을 했다. 그래서 우선 A 씨 주변 인물들을 파악하기 위해 호적등본 및 제적등본을 떼본 결과 한 가지 단서가 발견됐다. ‘지난 2005년 10월경 암으로 사망했다’고 했던 A 씨의 아내가 사실은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던 것. 게다가 아내가 사망한 지점은 바로 A 씨가 쇠말뚝을 박았던 곳 즉 변사체가 발견된 텃밭 인근이었다.
▲ 아파트 CCTV에 찍힌 A 씨. | ||
교통사고 피해자(A 씨의 아내)와 가해자(B 씨)의 석연치 않은 죽음과 A 씨는 과연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형사들은 의문을 풀기 위해 A 씨 주변을 다시 샅샅이 훑어나갔고 그 과정에서 A 씨가 부인이 숨진 뒤 보험회사로부터 교통상해보험금 2억여 원, 택시공제조합으로부터 피해합의금 5000여만 원 등 총 2억 6000여만 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해당 보험회사에 문의한 결과 A 씨가 아내가 사망하기 직전에 보험회사에 수시로 문의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도 파악했다.
가장 수상한 점은 A 씨가 교통사고를 내 아내를 죽게 한 가해자 B 씨에게 아무 조건 없이 합의서를 써주고 탄원서까지 제출해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 있도록 도와줬다는 사실이었다. 알고 보니 B 씨는 A 씨의 중학교 동창으로 10여 년 전 당시 A 씨가 운영하던 가게에서 우연히 만나 그뒤부터 각별한 친분을 이어왔던 친구 사이였다.
형사들은 그간의 증거와 정황을 토대로 A 씨가 B 씨와 공모해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던 아내를 교통사고로 위장해 숨지게 한 뒤 공범인 B 씨의 입을 막기 위해 추가로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하고 수사를 확대했다. 그러나 A 씨는 “아내는 교통사고로 죽었고 B 씨 또한 내가 직접 죽이지는 않았다”면서 “살인청부업자에게 300만 원을 주고 작업을 시켰다”고 주장해 수사에 계속 혼선을 일으켰다.
경찰 조사과정에서 A 씨는 “가족들이 없는 틈을 타 B 씨를 집으로 초대한 뒤 일부러 술을 먹이고 살인청부업자를 불렀다”면서 “B 씨가 살인청부업자가 휘두른 쇠파이프에 몸 여기저기를 맞고 결국 죽었다. 그래서 사체를 박스에 담아 이삿짐센터에 의뢰해 텃밭으로 옮겨다놓고 다음날 오후 살인청부업자와 함께 시신을 암매장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A 씨의 진술은 미심쩍은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B 씨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 A 씨의 진술처럼 온몸을 쇠파이프에 맞은 것이 아니라 망치와 같은 둔기에 의해 두개골이 함몰돼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상식적으로 볼 때 전문 살인청부업자가 ‘불과’ 300만 원을 받고 사람을 죽이고 더구나 대낮에 시신을 암매장하는 데 동참했을 가능성도 낮았다. 더구나 평소 꾸준히 일기를 써 오고 1년 5개월 전 시신을 암매장한 장소에 추가로 흙을 덮는 공사를 하면서 인부의 이름과 전화번호 따위까지 꼼꼼히 수첩에 적어놓았던 철두철미한 성격의 A 씨가 살인청부업자의 이름조차 모르겠다고 하는 점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