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시지 화백의 ‘해녀’ 진품(왼쪽)과 위작. 서명까지 거의 다르지 않을 정도로 정교한 모습이 놀랍다. | ||
경찰에 따르면 복 씨 등은 지난해 10월 초부터 노 씨 등 무명 화가 4명을 고용해 경기도 파주, 안양, 안산 등의 작업실에서 이만익, 변시지 등 유명 화가 24명의 그림 90점을 위조하고, 시중에 나도는 천경자, 이중섭, 박수근 화백의 위작 38점을 구입해 화랑과 수집가들에게 되파는 수법으로 1억 8000만 원 상당의 부당이득을 챙겼다. 이들이 유통한 위작 중에는 현 국내 최고 권위의 미술품 감정단으로부터 진품으로 평가받은 작품까지 있었다. 이들이 유통한 가짜 그림 108점의 진품 시가는 1011억여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 속으로 한번 들어가보자.
‘아트재테크’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요즘은 그림도 큰 돈이 되는 시대다. 지난 3월 K 옥션 경매에서는 박수근 화백의 유화 ‘시장의 사람들’이 국내 미술품 경매사상 최고가인 25억 원에 낙찰됐다. 유명 작가의 그림 등 미술품이 이렇게 수십억 원을 호가하다보니 화랑계의 생리를 잘 알고 있던 복 씨 형제는 가짜 명화를 만들어 유통시키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경찰에 따르면 동생 복 씨는 인사동에서 꽤나 알려졌던 인물로 10여 년 전 화랑을 운영하다 부도를 냈다. 그후 화랑과 미술애호가를 연결해주는 중간판매상으로 생활해오다 형편이 나빠지자 위조단을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형 복 씨 역시 중간판매상이었는데 거래 과정에서 그림값 횡령 등의 혐의로 전과가 생긴 후 막노동을 해가며 월세 20만 원짜리 방에서 근근이 살아가던 터라 동생의 제안에 쉽게 응했다.
복 씨 형제는 평소 알고 지내던 극장 간판 그림 전문으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던 노 씨를 찾아가 가짜 명화를 그려주기를 부탁했다. 그리고 비슷한 처지의 다른 무명 화가들이 합세해 각자 자신 있는 분야에 따라 인물화, 정물화, 풍경화, 추상화 등으로 나뉘어 ‘짝퉁’을 만들었다. 파주에 작업실을 가지고 있던 노 씨가 중요 위작인 이만익, 변시지 화백의 인물화를 맡고 박 아무개 씨 등 다른 세명은 안양, 안산 등지에서 다른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베꼈다.
먼저 유명 화가의 전시전 팸플릿이나 작품 도록 등을 보고 실제 크기로 확대 복사한 후 그 위에 얇은 습자지나 먹지 등을 놓고 밑그림의 본을 떴다. 그리고 진짜와 흡사하게 채색 작업을 마친 후 서명까지 똑같이 만들어 찍었다. 동생 복 씨는 녹슨 못 등을 이용해 교묘하게 ‘낡은 캔버스’를 만들어 이들 무명 화가들에게 공급하기도 했다. 그 결과 이제 막 미술품 수집에 입문한 애호가나 일반인들이 본다면 감쪽같이 속을 만큼 비슷한 가짜 그림들이 탄생됐다.
지난해 10월 초부터 지난 3월 말까지 이들이 직접 위조한 그림은 총 80여 점. 위작에 희생당한 작가들만 이중섭, 박수근, 천경자, 이만익, 변시지, 김창렬, 도상봉, 변종하, 장욱진, 이인성, 운보 등 24명에 이른다. 특히 이들 작가들은 대개가 이미 작고했거나 나이가 많은 노 작가들로 복 씨 일당은 작가 사후에 그림값이 더 뛰고 그림의 진위 여부를 판별하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점을 계산에 넣었다.
▲ 이만익 화백의 ‘달꽃 8호’의 위작. 이 작품을 본 이만익 화백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 ||
하지만 결국 화랑 주인에게 의심을 사면서 비밀리에 위작 사건을 수사 중이던 경찰에 단서를 제공하고 말았다.
경찰은 최 씨가 위작범들과 공모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통화내역을 조회하던 중 복 씨 형제를 주목하고 15일 동안 잠복, 미행한 끝에 복 씨 형제와 무명 화가 노 씨의 접촉 장면을 포착해 이들을 검거할 수 있었다.
경찰이 위조단을 검거한 후 이만익 화백을 직접 찾아가 위작을 보여주자 첫마디가 “자알~ 그렸네. 미대는 충분히 나온 실력이겠네”라며 기막혀 했다고 한다. 심지어 올해 초 기존의 감정위원회가 통합돼 국내 최고 권위의 한국미술품감정연구소가 발족했지만 지난 2월 이들이 유통시켰던 변시지 화백의 ‘조랑말과 소년’ 위작에 진품 감정서까지 발급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위조 작품을 한 미술애호가가 900만 원을 주고 사들였다가 작가에게 직접 작품의 진위를 묻는 과정에서 위작인 것이 드러났다. 그리고 이를 주목한 경찰에 의해 결국 전문 위조단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복 씨 형제가 이렇게 전문적으로 위조단을 만들어 활동할 수 있었던 데는 국내 미술계 일부에서 미술품 시장의 침체를 우려해 위작이 있어도 공공연히 묵인해오던 관행이 하나의 배경이 되고 있다. 그동안 미술계에선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놓고 위작 시비가 끊이지 않았지만 심지어 화가에게조차 쉬쉬하기를 강요하는 일도 벌어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단 위작 시비에 휘말리게 되면 해당 화가의 작품이 한동안 유통되지 않는 등 화가 입장에서도 손해가 크다는 점을 악용해왔던 것이다.
이번에 서초경찰서에서 전문 위조단을 검거하자 검찰에서는 지난 2005년의 이중섭, 박수근 위작 사건과 관련한 연관성을 찾았지만 복 씨 일당은 일단 그 사건과는 연관이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번 사건을 담당한 서초경찰서 강력 3팀의 윤일숭 경장은 “비록 강력계 형사지만 이번 수사를 통해 미술품 위작 사건의 심각성과 일부 미술계의 문제점을 새삼 깨달았다”면서 “이번 사건을 토대로 수사를 더욱 확대해 암암리에 활동 중인 위작범들을 끝까지 검거해나갈 것”이라고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또한 조직적인 전문 위조단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위작이 진품으로 둔갑하는 등 일련의 사태가 심각해지자 미술계 내부에서도 “더 이상 위작을 묵인해서는 안 된다, 감정 전문 국가 기관이 생겨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장유지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