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모의총기와 모의총알 등을 이용해 취객들의 취한 정도를 테스트한 뒤 금품을 털어온 이른바 ‘탄치기’피의자들. 비밀번호 해독기까지 동원해 신용카드 현금서비스까지 받아냈던 지능범들이기도 했다.
이번에 수서경찰서 강력3팀 한동수 팀장이 전하는 비화가 바로 이들 탄치기범 일당의 범행과 검거 과정에 얽힌 이야기다. 한 팀장은 “이들 일당이 철저한 역할분담과 지능적인 수법으로 수사망을 피해왔다”면서 “그러나 아무리 날고 뛴다고 해도 결국 범죄자는 엄정한 법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싶다”고 밝혔다. 기나긴 잠복과 추격 등 마치 한 편의 영화와도 같았던 신종 탄치기범 소탕 작전 속으로 들어가보자.
지난해 초 ‘술에 취해 지갑과 신용카드를 분실했다’는 한 남성의 신고가 수서경찰서에 접수됐다. 단순 절도나 분실사고로 여겨질 수도 있었던 평범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머리가 아프다’는 피해자의 진술을 전해들은 경찰은 폭력을 휘두르는 치기배들의 범행으로 가닥을 잡고 수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당시 만취 상태였던 피해자가 주변 정황이나 범인의 얼굴을 기억할 리 만무했다. 단서는 피해자의 신용카드를 이용해 현금을 인출할 당시 CCTV 화면에 찍힌 용의자의 모습뿐이었다. 수사팀은 화면에 찍힌 용의자의 모습을 확대해 동일수법 전과자들과 비교했다. 하지만 수만 건에 달하는 동일수법 전과자의 데이터에서 CCTV에 찍힌 남성의 얼굴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수사팀은 또 다른 단서를 찾기 위해 피해자의 진술 등을 다시 훑어나갔다. 이 과정에서 다른 치기배 사건과는 달리 이상한 점이 하나 발견됐다. 범행 당시 범인이 금품과 함께 피해자의 휴대전화까지 가져갔던 것. 해당 휴대전화의 통화내역을 조회한 결과 대부분은 경마 정보업체와 성인음란물 업체에 걸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끈질기게 조회 작업을 계속하던 어느 날 수사팀은 피의자가 일반 휴대전화에 걸었던 한 건의 통화기록을 발견하게 된다. 형사들은 서둘러 피의자가 전화를 건 상대를 조회했다. 치기배 동일수법 전과자인 조흥수 씨(가명·33)가 바로 피의자와 통화했던 장본인이었다.
한 팀장은 “당장 조 씨를 추궁해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사건 가담 여부 등을 알아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문 치기배들은 검거시 공범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는 특성이 있다. 또 조 씨가 주범인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일단 우리는 조 씨의 동일전과 처벌의견서를 작성하고 과거 사건 공범들의 인적사항을 발췌, 용의자를 추적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과거 조 씨의 공범들의 휴대전화 통화기록을 샅샅이 조회했음에도 의심할 만한 점은 없었다. 그렇다고 조 씨를 용의선상에서 배제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수사팀은 조 씨에게 동일수법 전과가 있는 데다가 피의자와 통화한 점으로 보아 어떤 식으로든 범행에 연루되었을 거라고 판단했다. 일단은 조 씨를 미행해 그가 접촉하는 인물들을 파악해보기로 했다.
미행을 우려한 범죄자의 본능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습관이었을가. 조 씨는 서울 강남과 서초, 잠실 등지를 매일같이 걸어다녔다. 덕분에 형사들의 발바닥은 성할 날이 없었다. 수사팀은 조 씨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한편 그의 전화 통화내역을 체크했다. 수백 명에 이르는 통화자의 인적사항을 모두 뽑아 동일수법 전과자들의 사진과 일일이 비교했던 것.
그러던 어느 날 수사팀은 조 씨와 통화한 인물 중에서 동일수법 전과자인 김동수 씨(가명·34)를 발견하게 된다. 조금씩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고 있었다.
“피해자 휴대전화의 통화내역에서 동일수법 전과자인 조흥수가 나왔고, 조흥수의 통화내역에서 역시 동일수법 전과자인 김동수가 나왔다는 사실은 이들 간에 분명 어떤 연결고리가 있으며 범행이 조직적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고 있었다.”
수사팀은 조 씨보다는 ‘뉴 페이스’인 김 씨 쪽을 밀착 감시하기로 결정했다. 여러 날 동안 조 씨를 미행했지만 특이사항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동수 미행작전’은 번번이 실패했다. 이어지는 한 팀장의 얘기.
“김동수의 운전솜씨는 서커스를 방불케 했다. 추월은 기본이고 눈깜짝할 사이 차선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등 총알택시보다 더한 난폭운전을 했다. 미행을 눈치채지 않게 하기 위해 형사들은 고급 차량까지 빌려 4대의 차량으로 추격했지만 김 씨를 끝까지 따라간 것은 딱 한 번뿐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김 씨가 누구와 접선하는지를 꼭 알아내야 했다. 그를 놓치면 그동안의 수사가 수포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처절한 추격전을 벌였다.”
잠복해있던 형사들은 동시에 탄성을 내뱉었다. 돈을 인출하던 사내는 ‘CCTV 속의 용의자’였던 것. 그 사내는 대체 누구이며 김 씨와는 무슨 관계일까.
“당장 검거할 수도 있었지만 사내의 신원과 범행 증거가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달려들었다가는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다. 우리는 김 씨와 그 사내가 함께 행동할 때 동시에 검거하기로 결정했다.”
김 씨에 대한 미행은 계속됐다. 그리고 3일 후 마침내 강원랜드에서 김 씨와 의문의 사내가 직접 조우하는 현장을 포착하고 형사들은 마침내 두 사람의 손목에 수갑을 채울 수 있었다.
그간 수사팀이 ‘애태워’ 찾던 CCTV 화면의 사내는 최인구 씨(가명·36)로 밝혀졌다. 전과 경력이 하나도 없는 평범한 인물이었다. 범죄고수답게 김 씨는 형사들 앞에서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초짜인 최 씨는 순순히 범행을 시인했다. 최 씨는 김 씨와 한 팀을 이뤄 ‘탄치기’ 범행을 해왔으며 주범 김 씨가 ‘일’을 저지르면 돈을 인출해오는 역할만 맡아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동일전과가 있었던 김 씨는 CCTV에 찍힐 경우 경찰이 동일범죄 전과자 기록에서 자신을 금세 발견할거라는 점을 예상하고 전과가 없는 최 씨를 끌여들여 돈을 인출해오는 역할을 맡겼던 것이다. 환상의 복식조가 따로 없었다.”
‘고수와 초짜’ 2인 1조로 움직이던 김 씨와 최 씨를 검거하자 수사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수사팀은 최 씨를 추궁한 결과 이들이 ‘필살기’로 사용하던 ‘비비탄치기’ 수법의 내용은 물론 이들 외에도 2인 1조로 움직이는 다른 팀들이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
한 가지 남은 의문은 이들이 어떻게 신용카드 비밀번호를 파악했는가 하는 점. 최 씨는 이에 대해 “외제 승용차를 타고다니는 신원미상의 남자에게 신용카드와 휴대전화를 넘겨주면 비밀번호를 해독해줬다”고 털어놨다.
비록 이들이 2인 1조로 움직이고는 있지만 모두 한 통속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수사팀은 나머지 멤버들도 모두 잡아들이기로 계획한다. 그리고 며칠 후 휴대전화 실시간 위치 추적 등을 통해 ‘외제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남자’ 최용석 씨(가명·34)와 그의 조수 격인 김승범 씨(가명·33)를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수사팀은 최 씨의 차 트렁크에서 그 동안의 범행을 입증해줄 모의총기와 비비탄을 찾아냈다. 차 안에는 비밀번호 해독프로그램이 깔려 있는 노트북도 함께 놓여 있었다. 이들의 검거를 시작으로, 그동안 경찰의 추적을 피해 종횡무진 암약하던 비비탄 치기범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꼬리를 물고 수사망에 걸려들었다. 그 결과 경찰은 강남지역에서 활동하던 2인 1조 탄치기범들을 대거 소탕할 수 있었다.
수사 결과 주범 최용석 씨와 김동수 씨가 저지른 탄치기 범행의 전모는 이러했다.
최 씨와 김 씨는 73년생 동갑내기로 교도소에서 만나 친분을 쌓아왔다. 출소 후에도 끈끈한 우정(?)은 계속됐지만 학식도 변변한 기술도 없는 데다가 절도전과까지 있던 터라 두 사람은 좀처럼 무직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들에게 유일한 생계수단은 ‘아리랑치기’였다. 그중에서도 두 사람의 ‘전공’은 만취한 사람을 부축해주는 척하다가 지갑을 슬쩍해 유유히 사라지는 ‘부축빼기’였다.
▲ 이들은 장난감용 비비탄을 사용했다. | ||
이런저런 사정으로 ‘수입’이 변변치 않자 이들은 머리를 맞대고 색다른 범행수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가장 염두에 둔 것은 범행의 ‘안전성’. 며칠간의 궁리 끝에 이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장난감 소총이었다. 이 모의소총에 들어가는 비비탄은 크기는 작지만 멀리 있는 사물을 정확히 맞출 수 있는 데다가 사람이 맞을 경우 즉각적인 반응을 보일 만큼 상당한 위력을 갖고 있었다. 겉으로 봐선 범행대상이 얼마나 취했는지, 의식이 있는지를 알 수 없었던 터라 비비탄은 범행 대상을 찾는 데 더없이 적합한 도구였던 셈이다.
M16 모의소총과 비비탄을 구입한 이들은 본격적인 ‘탄치기’에 들어갔다. 범행에 앞서 이들은 철저히 역할을 분담했다. 두 사람이 같이 움직이지 않고 전과가 없는 초짜들을 각기 한 명씩 끌여들여 2인 1조로 팀을 이루었던 것.
“이들의 범행은 한 명이 비비탄을 쏘고 망을 보는 사이 다른 한 명이 취객에게 접근해 현금을 빼내오는 식으로 이뤄졌다. 범행시간과 장소도 미리 파악해뒀다. 이들은 고급 술집들이 밀집해 있는 데다 부유층이 많은 강남 일대를 범행지역으로 삼았다. 또 유동인구가 적은 심야시간에 범행을 시도했다.”
2004년 7월의 어느 늦은 밤, 서울 삼성동 골목에서 쓰러져 잠든 한 남성을 발견한 이들은 이내 범행을 개시했다. 일당 중 김 씨가 이 남성을 향해 비비탄 한 발을 쐈다. 남성은 비비탄을 맞고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만취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 이들은 남성에게 다가가 지갑을 빼내 유유히 사라졌다.
비비탄을 이용한 범행 성과는 이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만취상태가 아닌 이상 비비탄을 맞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반응을 보였고 이내 정신을 차리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제법 강한 비비탄을 맞고도 미동이 없으면 백발백중 만취상태였다”는 게 한 팀장의 설명이다.
신종 수법에 자신이 붙은 이들은 범행대상을 차츰 넓혀나갔다. 그동안 길가에 쓰러져 있던 취객만을 상대해왔던 이들은 술에서 깨기 위해 자동차 안에서 자는 사람과 대리운전 기사를 기다리는 사이 잠이 든 사람에게까지 비비탄을 쏘아댔다.
“자동차 유리에 비비탄을 쏴서 범행대상을 가려냈다. 비비탄이 차창에 부딪히는 소리가 제법 크기 때문에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장 차에서 내렸을 것이다. 반면 차 주인이 반응이 없으면 만사 ‘OK’였던 셈이다. 특히 피해자의 대부분은 잠깐 눈을 붙이려는 생각으로 차에 머문 것이었기에 대개 차문을 잠그지 않은 무방비 상태였다.”
이들의 범행은 날로 대담해졌다. 한번 돈맛을 보자 취객의 지갑 속에 있던 소액의 현금만으론 만족할 수 없었다. 이들은 신용카드에까지 손을 뻗쳤다. 문제는 신용카드 비밀번호를 알아내는 방법이었다. 주범인 최 씨는 수년 전부터 바로 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이어지는 한 팀장의 설명.
“40~50대의 상당수가 휴대전화와 신용카드 비밀번호를 동일하게 해놓는다는 점을 이용했다. 이들은 금품과 휴대전화를 함께 훔친 뒤 최용석의 노트북에 깔아놓은 휴대전화 비밀번호 해독프로그램을 이용해 비밀번호를 알아냈다. 그리고 돈을 인출하는 일은 초짜에게 시키는 치밀함을 보였다.”
특히 2005년 10월경 이들 일당은 삼성동의 노상에 차를 세우고 잠들어 있던 한 중년 남성에게 탄치기를 시도, 한 번에 5400만 원을 손에 넣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이들이 2004년 7월부터 2006년 4월까지 70여 회에 걸쳐 갈취한 금액은 6억 5000여만 원에 달했다. 범인들은 이 돈을 가지고 사채놀이를 하거나 유흥비에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