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7월 11일 금정역에서 벌인 현장검증 장면. 사진제공=인천일보 | ||
이번에 경기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강성수 팀장이 전하는 사건은 46일 동안 3명의 여성을 살해·유기한 연쇄살인마에 대한 것이다. 군포경찰서 근무 당시 이 사건을 담당했던 강 팀장은 살인마를 뒤쫓던 지난해 여름을 ‘잔인한 계절’로 기억하고 있었다. “강간이나 하고 치우려고 했지 살해할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하던 이 파렴치한은 조사 결과 대학까지 마친 평범한 회사원으로 밝혀져 더욱 충격을 안겨줬다. 강 팀장이 잔인한 ‘살인의 추억’을 다시 들추게 된 이유는 이렇다.
“그동안 살인은 ‘특정동기’를 지닌 저학력, 저소득층의 전과자에 의해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 살인범을 기존의 정형화된 틀에 맞춰 특징 지을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즉 과거의 전력은 물론이고 학력이나 생활수준, 외모나 성별과 무관하게 누구든 수사선상에 오를 수 있다는 얘기다. 이 사건은 ‘악마’의 기질을 가진 사람도 평범한 사람인 양 자신을 숨긴 채 얼마나 철저히 이중생활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단기간에 3명의 무고한 목숨을 빼앗은 범인에게서 나는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두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지난해 5월 15일 밤 11시 50분경 안양시 안양 8동의 한 횡단보도 앞. 회사원 윤 아무개 씨(여·당시 22세)는 교통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홀로 서 있었다. 윤 씨는 모처럼 친구와 술자리를 가진 뒤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그때였다. 승용차 한 대가 윤 씨 곁으로 슬며시 다가왔다.
“어디까지 가세요?”
차창문을 내리면서 친절한 말투로 말은 건넨 사람은 김진철(가명·27). 핸섬한 외모에 유난히 동안인 김 씨는 전형적인 모범생의 모습이었다. 젠틀해 보이는 김 씨의 외모와 태도에 안심한 윤 씨는 “같은 방향”이라는 얘기에 차에 올랐고 잠시 후 그녀를 태운 쏘렌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하지만 얼마 뒤 쏘렌토 안에서는 상상치도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윤 씨의 날카로운 비명과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당시 상황에 대한 강 팀장의 설명.
“김진철은 윤 씨의 집과는 다른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윤 씨가 항의하자 김진철은 흉기로 위협한 채 성폭행했다. 그리고 충격과 공포로 떨고 있는 윤 씨의 신용카드를 빼앗고 비밀번호를 알아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김진철은 자신의 얼굴을 본 윤 씨가 신고할 것을 우려해 살해를 결심한다. 결국 김진철은 소리를 지르며 반항하는 윤 씨의 입에 팬티를 물린 뒤 평소 차에 싣고 다니던 나일론 끈으로 손발을 결박하고 포장용 테이프로 윤 씨의 얼굴을 수십 차례 감아 살해하고 말았다.”
윤 씨는 실종 닷새 만인 5월 20일 새벽 2시 30분께 군포 금정역 인근 전철 방호벽 옆에서 불에 탄 채로 발견됐다. 화재신고를 받고 소방대원이 현장에 출동했을 때 사체는 육안으로 신원확인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하지만 굽어 있던 일부 손가락과 과거 치과기록 등을 토대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에서 감식한 결과 실종된 윤 씨로 판명됐다.
엽기적인 살인에 수많은 사람들이 치를 떨었다. 수사에 나선 경찰은 실종 이틀 뒤 윤 씨의 신용카드 8장이 사용된 사실을 파악했다. 범인이 윤 씨의 신용카드로 산본역 내의 현금인출기에서 13차례에 걸쳐 280여 만 원을 인출했던 것. 경찰은 우선 해당 인출기 주변의 CCTV 화면을 분석하려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현장의 CCTV는 작동이 되지 않는 ‘깡통기계’였다. 수사는 곧 난관에 부딪혔다.
경찰은 윤 씨가 발견된 현장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는 한편 윤 씨의 주변인물들을 상대로 탐문수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단서나 증거물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고 탐문수사에서도 특이점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날 갑자기 벌어진 한 여성의 실종과 5일 만에 드러난 죽음. 이것은 연쇄살인을 알리는 서막에 불과했다. 6월 9일 또 한 명의 젊은 여성이 사라졌다는 신고가 접수된다. 두 번째 피해자는 의왕시에 거주하고 있던 대학생 김 아무개 씨(20)로 산본역에서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
“그날 김 씨 앞에 ‘악마의 쏘렌토’가 나타난 시각은 밤 11시 30분께. ‘집에 데려다 주겠다’는 김진철의 말에 아무 의심 없이 차에 올랐던 거다. 둘은 차 안에서 남자친구와 학교생활 등의 얘기를 나눴으며 서로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진철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다음은 강 팀장의 이어지는 설명.
“첫 범행에서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300만 원에 가까운 돈을 손에 쥔 김진철의 범행은 이때부터 발동이 걸렸던 듯하다. 김진철이 신체를 더듬자 낌새를 눈치 챈 김 씨는 차에서 내리려고 했고 김진철은 흉기를 들이대며 위협했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여자가 반항할 수 있었겠나. 김 씨는 신용카드도 갖고 있지 않았고 현금도 없었지만 김진철의 얼굴을 봤다는 이유로 역시 윤 씨와 같은 방법으로 능욕당하고 잔인하게 살해되고 말았다.”
김 씨는 실종 3주일이 지난 7월 3일 오전 의왕시 청계동 공동묘지 근처에서 나체 상태로 발견됐다. 경찰을 더욱 경악케 한 것은 발견 당시 김 씨의 처참한 모습이었다.
“웅크린 채 발견된 사체는 더없이 참혹했다. 얼굴은 테이프로 휘감겨 있었는데 양손이 결박된 것은 물론 중요 부위 윗부분이 예리한 흉기로 도려져 있었다. 김진철은 사체훼손을 부인했지만 그 상처는 벌레에 의해서나 우연히 생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국과수에서도 의도적으로 도려낸 자국이라는 소견을 보였다.”
두 명의 여성이 연달아 살해되자 경찰에 비상이 걸렸다. 경찰서 내의 모든 인력이 동원돼 두 사건의 연계성을 파악하기 위한 수사가 시작됐다. 경찰은 우선적으로 동일수법 전과자를 수사망에 올려놓고 용의자를 좁혀갔다. 또 범인의 예상가능 동선을 설정하는 동시에 광범위한 통신수사를 통해 피해자와 같은 동선에 있었던 인물들을 하나 하나 추적해나갔다.
하지만 이 무렵엔 이미 세 번째 피해자의 출현이 ‘예고’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피해자가 사체로 발견되기 이틀 전인 7월 1일 밤 11시경 또 한 명의 여성이 실종됐다는 신고가 접수됐던 것. 실종자는 허 아무개 씨(27)였다. 당시 정황으로는 허 씨에게도 살인마의 마수가 뻗쳤을 가능성이 있었다.
“초비상이 걸렸다. 동시에 수사진은 일대 패닉상태에 빠졌다. ‘도대체 이 악마는 누구란 말인가. 범행을 저지른 이유는 무엇일까. 더구나 손발을 결박한 채 강간한 것도 모자라 얼굴을 테이프로 휘감고 사체를 태우거나 칼로 도려내는 등 잔인하게 훼손한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혹시 여성혐오증을 갖고 있거나 성도착증이 있는 인물은 아닐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그럴수록 우리는 범인을 잡기 위해 피가 끓었다.”
▲ 지난해 7월 5일 경기도 의왕시 백운호수 인근 도로변에서 경찰이 마지막 희생자 허 씨의 시신을 찾고 있다. 연합뉴스 | ||
“김진철은 첫 번째 피해자인 윤 씨의 돈을 인출했던 예의 현금지급기의 CCTV가 작동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김진철은 허 씨의 신용카드를 갖고 또 다시 그곳을 찾았다. 하지만 수사팀은 범인이 동일장소를 다시 찾을 가능성이 크다는 범죄심리학적 이론에 근거해 현금자동지급기 관리회사에 강력히 요구해 CCTV를 다시 설치해둔 상태였다.”
예감은 적중했다. 경찰은 허 씨가 실종된 이틀 후인 7월 3일 김진철이 허 씨의 신용카드로 120만 원을 인출하는 장면을 확보, 그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경찰은 그 다음날 새벽 아파트 주차장에서 김진철을 긴급체포했다.
“김진철은 증거물 앞에서도 떨기만 할 뿐 무조건 범행을 부인했다. 범행을 교묘히 둘러대다가 국과수의 DNA 분석결과가 나오자 그때야 단념한 듯 모든 범행을 자백했다. 하지만 허 씨의 생사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우리는 공식 수사발표 직전까지도 허 씨가 살아있으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런데 기자회견을 한 시간 앞둔 5일 오후 2시경 김진철이 면담을 요청해왔다. 울면서 ‘허 씨도 죽였다’고 하더라. 허 씨는 의왕시 백운호수 인근의 풀숲에서 발견됐는데 감식 결과 앞의 두 피해자와 동일한 수법으로 살해되엇다.”
사실 첫 번째 피해자 윤 씨의 경우 처음엔 김진철의 범행이라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었다. 하지만 수사팀은 윤 씨가 군대 간 남자친구의 생일을 신용카드 비밀번호로 삼았다는 사실을 김진철이 알고 있었던 점을 근거로 그를 추궁해 범행을 자백받았다. 이로써 김진철의 범행전모가 드러나게 된다.
“김진철은 밤늦게 귀가하는 20대 여성에게 접근했는데 하나같이 긴 생머리에 스커트를 입고 있는 날씬하고 준수한 외모의 여성들이었다. 김진철은 이들을 차에 태운 뒤 나일론 끈으로 손을 결박하고 강간한 뒤 투명테이프로 얼굴을 완전히 감아 질식시켜 살해하는 끔찍한 수법을 사용했다. 우리는 김진철의 차량 조수석에서 피해자들의 혈흔과 모발을 채취하는 한편 피해여성들의 카메라와 신용카드, 범행에 사용된 과도와 나일론 끈 등을 증거물로 압수했다.”
그렇다면 김진철은 과연 어떤 인물이기에 이토록 잔인한 살인마가 되었던 걸까. 수사과정에서 드러난 김진철의 실체에 경찰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전문대를 졸업하고 수년간 컴퓨터부품회사의 영업사원으로 근무해온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것이다.
“보통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범행을 저지른 사람은 직업이 불안정하거나 무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김진철은 전과 하나 없는 지극히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래서 주변사람들의 충격이 더욱 컸다. 가정에서는 효자요, 평소 활달한 성격으로 문제 없이 직장생활을 하던 동료가 밤에는 무시무시한 살인행각을 벌이고 다녔다는 게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인가.”
하지만 김진철의 범행은 초범의 짓이라 하기에는 그 수법이 너무도 잔인했다.
“그의 집을 수색한 결과 수십 건의 포르노 동영상이 발견됐다. 동영상에는 여성을 테이프로 결박하거나 강압적으로 성행위를 갖는 장면, 여성이 고통스러워하는 가운데 실제로 강간하는 장면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김진철이 평소 이런 테이프를 즐겨보면서 범행에 활용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또 김진철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형만 편애한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듯하다. 여성에 대한 구체적인 증오심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범행이 잔혹했다는 점으로 볼 때 내면에 일종의 분노가 잠재되어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김진철 스스로 밝힌 범행동기는 너무도 단순했다. 카드빚 1000만 원이 그 이유였다는 것. 강 팀장에 따르면 김진철은 150만 원의 급여를 받고 있어 생활하기에는 별 무리가 없었다. 또 가정형편도 범행을 저지르지 않고는 생활할 수 없을 정도로 쪼들리는 상황도 아니었다고 한다. 문제는 범행 수 개월 전 아버지 명의로 구입한 차량이었다. 차 할부금과 대출금의 이자만 해도 그의 한 달 월급을 웃돌았다고 한다. 그동안은 주위에서 돈을 빌려 상환금을 충당했는데 그것이 누적되다보니 범행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김진철의 엽기적인 행적은 조사과정에서 속속 드러났다. 특히 그가 피해자의 물품을 자신의 애인에게 선물한 대목은 유가족들의 분노를 다시 불러일으켰다.
“범행 후 김진철은 피해자에게 뺏은 돈과 카메라를 가지고 결혼을 약속한 애인과 유흥을 즐기고 피해자의 명품 핸드백을 애인에게 선물로 주는 파렴치한 행동을 했다. 또 피해여성의 카메라로 자기 사진을 찍기도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범행을 하면서도 회사에 정상적으로 출근을 했다는 점이다. 낮에는 평범한 회사원인 김진철이 밤이면 연쇄살인행각을 벌인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철저히 이중생활을 해왔던 것이다.”
무엇보다 강 팀장이 주목한 것은 김진철이 범행에 점차 능숙해지는 살인마적 면모를 보였다는 점이다.
“평균 20여 일 간격으로 살인을 했다는 것은 결코 그냥 간과할 문제가 아니다. 범행횟수가 늘어날수록 범행의 완성도가 높아지고 대담해진 흔적도 역력하다. 김진철 자신도 범행에 중독되어가는 상태를 은연중에 표현하기도 했다. ‘첫 번째는 몰랐는데 두 번째 피해자를 살해할 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는 김진철의 진술은 그가 살인에 익숙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연쇄살인범에게서 발견되는 가장 큰 특징은 처음에는 어떤 목적으로 범행을 하다가 나중에는 범행 자체를 즐겼다는 점이다. 김진철 역시 동기(범죄)에서 무동기 범죄로 넘어가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