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위험한 질주극은 해운대경찰서 강력반 형사들이 검문 중 달아난 한 수상한 차량을 뒤쫓으며 벌어진 일이었다. 대체 무슨 까닭에 이 차량의 운전자는 필사적으로 도주했던 걸까. 아슬아슬한 추격전이 끝난 뒤 놀라운 사실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도주 차량에는 희대의 연쇄성폭행범과 그가 납치한 여성이 함께 타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부산 해운대경찰서 강력 3팀 정일권 팀장이 전하는 사건이 바로 당시 검거한 성폭행범에 대한 것이다. 40여 일 동안 부산 일대를 휘젓고 다니며 엽기적인 납치강간 행각을 벌여온 한 남자의 검거 과정과 그로 인해 드러난 범죄행각에 얽힌 얘기다. 정 팀장은 기억 너머에서 이 사건을 다시 들춰내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범인은 여성들에게 동물마취제를 주사한 뒤 강간을 저질러왔는데 조사결과 그는 아내와 아들까지 둔 평범한 가장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어찌 보면 우리나라 여성들은 성범죄의 사각지대에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범인이 아무리 지능적이라 해도 성폭행범은 반드시 붙잡힐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울러 취업을 미끼로 젊은 여성들을 무참히 짓밟은 한 남성의 범죄행각을 통해 날로 지능화되고 있는 강간범죄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한다.”
이날 추격전이 벌어지기 몇 시간 전부터 경찰은 해운대 장산역 인근을 집중적으로 순찰하고 있었다. 이 순찰은 최근 수년간 관내에서 발생한 성폭력 범죄를 분석한 결과 ‘오전시간대 해운대 신시가지에서 피해자를 납치한 뒤 정오경 기장 방면으로 끌고가 강간하는 유형이 가장 많다’는 사실에 따라 실시된 것이었다.
문제의 차량이 발견된 것은 이날 오전 11시 30분께. 해운대구 송정동 옛 삼양라면 건물 인근 도로변에서 이상하리만큼 늦은 속도로 어물쩡거리는 흰색 그랜저 승용차가 경찰의 눈에 포착됐던 것이다. 다음은 정 팀장의 회고.
“당시 우리는 젊은 여성들을 상대로 한 수 건의 납치강간 범죄에 대한 첩보를 입수하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특히 그간 사건이 발생한 시간대와 장소, 요일 등을 분석한 결과 수요일에 범행이 자주 일어난 것으로 나타나 우리는 수요일에 쉬는 직업군에 종사하는 동일범죄 전과자 등을 상대로 수사를 진행했다. 동시에 첩보 속의 용의자인 젊은 남자가 타고 다닌다는 그랜저 XG 차량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너무 짙게 선팅이 된 데다가 뭔가를 물색하는 듯 천천히 주행하는 그랜저를 발견하고 이상하다 싶어 번호판을 조회했는데 도난신고가 되어 있는 마티즈 번호판이었다.”
경찰은 검문을 위해 문제의 차량에 접근했다. 그때였다. 차량 운전자가 갑자기 차를 후진해 경찰차와 형사들을 들이받은 뒤 도주하기 시작했다. 형사들이 삼단봉으로 차 앞 유리를 깨며 저지시켰지만 운전자는 기장군 기장읍 내리 방면 14번 국도를 시속 100㎞가 넘는 속도로 질주하며 경찰과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용의차량은 앞바퀴가 파열되어 전복 위험까지 있었지만 운전자는 필사적으로 차를 몰았고 차량은 기장군 청강리의 한 마을회관 출입문을 들이받고서야 멈춰섰다. 형사들은 차에서 뛰어내려 달아나던 운전자 김 아무개 씨(32)를 치열한 격투 끝에 인근 야산에서 붙잡았다.
하지만 정작 ‘사건’은 이제부터였다. 김 씨의 차량을 살펴보던 경찰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뒷좌석 창문을 모두 점퍼로 가려놔서 이상하다 생각했다. 문을 열어보니 한 젊은 여성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게 아닌가. 대학 1년생인 A 양(19)이었는데 흔들어 깨우니 우리를 범인으로 생각했는지 ‘살려달라’고 싹싹 빌더라. 더 이상한 것은 A 양이 구토를 하는 거였다. 차량을 수색한 결과 10여 장에 달하는 여성들의 이력서와 신분증, 이상한 액체가 담긴 플라스틱병 10개와 1회용 주사기 84개, 장난감 수갑, 도난 번호판 6개 등이 발견됐다.”
A 양은 왜 김 씨의 차량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던 걸까. 또 차 안에서 발견된 수상한 물품들은 대체 어떤 용도를 지닌 것이었을까. 이어지는 정 팀장의 설명.
“김 씨는 이날 오전 10시 40분경 해운대구의 한 아파트 앞에서 학교에 가던 A 양에게 접근, ‘아르바이트를 시켜주겠다’며 차에 태웠다. 그리고 동물마취제를 주사해 의식을 잃게 한 뒤 성폭행했다. 김 씨는 A 양을 외딴 곳에 내려놓기 위해 마취가 풀릴 때까지 싣고 다니던 중 검문에 걸려 필사적으로 도주했던 것이다.”
충격적인 것은 그간 김 씨에게 동일한 수법으로 피해를 당한 여성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경찰이 차량에서 발견된 여성들의 신분증과 이력서들의 출처를 추궁한 결과, 이력서에 기재된 십수 명의 여성들 역시 그간 김 씨에게 같은 수법으로 당한 피해자로 드러났던 것. 조사 결과 40일 남짓한 기간에 김 씨에게 당한 여성들은 무려 17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앞날이 창창한 미혼 여성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긴 김 씨. 대체 그는 어떤 인물일까. 경찰 조사 결과 밝혀진 사실은 이렇다.
“김 씨는 아내에게 차마 실직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김 씨는 아내에게 이전과 다름없이 생활비를 갖다줬고 카드빚은 다달이 늘어갔다. 카드 돌려막기마저 한계에 이르자 김 씨는 사채를 끌어다 쓰게 되고 그 결과 빚은 1억 2000만 원으로 늘어났다. 도저히 빚을 감당할 수 없자 김 씨는 위험한 범행을 계획하게 된 것이다.”
김 씨가 생각한 방법은 젊은 여성들을 유인해 강도강간 행각을 벌이는 것이었다. 젊은 여성들의 경우 속이기 수월하고 범행시 제압이 쉬울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또 강간을 당한 피해여성들이 수치심에 신고하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계산도 있었다. 김 씨는 20대 여성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취업’이나 ‘아르바이트’를 미끼로 접근하기로 결심했다. 더구나 범행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동물마취제와 주사기를 구입하는 등 치밀한 범행계획을 세웠다.
“김 씨는 실직 전 매일 아침 아내를 직장에 데려다주고 출근을 했는데 아내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실직 후에도 동일한 생활패턴을 유지했다. 김 씨의 아내는 당연히 남편이 출근하는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내를 내려다 준 뒤 김 씨는 범행대상을 물색하기 위해 여기저기를 배회하고 있었다.”
경찰이 파악한 김 씨의 첫 범행은 지난 2006년 2월 8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내를 출근시킨 후 범행대상을 찾아다니던 김 씨는 김해시 구산동의 한 아파트 앞 노상을 지나가던 B 씨(여·20)를 발견했다.
“아가씨, 잠깐만요. 전 ○○회사 인사담당자인데요. 지나가다가 눈에 띄어서요. 혹시 일자리 필요하지 않으세요? 마침 적당한 관리직 자리가 하나 비었는데….”
고급 차를 타고 있는 데다가 말쑥한 정장 차림을 하고 있는 김 씨의 말에 B 씨는 관심을 보였다. 특히 무직 상태였던 B 씨는 그럴싸한 회사의 인사 담당자라고 소개하는 김 씨에게 더욱 흔들렸다. B 씨가 관심을 보이는 기미가 보이자 김 씨는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길거리에서 이러지 말고 일단 제 차에 타서 이력서를 작성하세요. 그래야 이력에 알맞은 적당한 자리를 알아봐드리죠.”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김 씨가 미리 준비해둔 이력서 종이와 펜을 건네자 B 씨는 의심을 풀고 차에 올랐다. ‘대낮인 데다가 아파트가 밀집해있는 노상에서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B 씨가 차에 타자 김 씨는 대화할 만한 장소로 가자며 차를 몰았고 그 사이 B 씨는 김 씨의 요구대로 꼼꼼히 이력서를 작성했다. 그때였다. 돌연 김 씨는 흉기로 B 씨를 협박한 후 동물마취제가 들어 있는 주사기로 B 씨를 찔렀다. 그리고 테이프로 입을 막고 손발을 묶은 후 세 차례에 걸쳐 몸을 유린하고 B 씨의 카드를 이용해 50여 만 원을 빼앗았다. 김 씨는 마취약에 취해 의식을 잃은 B 씨를 몇 시간 동안이나 차에 태우고 다니다가 B 씨가 정신을 차리자 인적이 드문 길가에 버려두고 달아났다.
첫 범행이 쉽게 성공하자 김 씨의 범행은 더욱 대담해졌다. 김 씨는 경찰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훔친 차량 번호판을 달고 다니는가 하면 경계가 덜한 오전 시간 한적한 도로변을 걸어가는 여성들을 타깃으로 삼았다. 또 범행횟수가 늘어날수록 좀 더 구체적이고 세련된 수법으로 여성들을 유인했다. 김 씨는 ‘매니저’나 ‘지배인’ ‘학원원장’ 등 그럴싸한 직함으로 자신을 소개해 여성들의 환심을 산 후 ‘인형전시회 모델을 시켜주겠다’ ‘쇼핑몰 아르바이트를 시켜주겠다’ ‘학원 강사로 취업시켜주겠다’ ‘고등학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해주겠다’ 고 속였다. 개중에는 김 씨의 제안을 무시하고 지나친 여성들도 있었지만 상당수의 여성들은 김 씨의 ‘호의’를 믿고 차에 올랐다가 변을 당했다. 갑작스레 마취약이 든 주사를 맞은 여성들은 반항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의식을 잃었고 그 사이 처절하게 유린당하는 수모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전과도 없는 데다가 한 가정의 평범한 가장인 김 씨가 며칠 간격으로 범행을 계속 저질러왔다는 사실에 형사들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특히 김 씨는 성도착증을 의심케할 정도로 가학적인 방법으로 성폭행을 일삼아 경찰을 경악케 만들었다. 다음은 정 팀장의 설명.
“김 씨의 범행은 단지 돈 때문에 저질렀다고 보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엽기적이었다. 실제로 김 씨가 17명의 여성들을 유린하고 손에 쥔 돈은 500만 원 상당에 불과했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20대 초반의 여대생이었으며 심지어 여고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김 씨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가학적이고 변태적인 방법으로 이들을 유린했다. 성도착증 기질이 있다고 판단될 정도였으니 피해여성들이 받은 육체적·정신적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김 씨는 어떻게 짧은 기간에 이처럼 많은 여성들을 유린할 수 있었던 걸까. 정 팀장은 김 씨가 사용한 동물마취제에 주목했다.
“김 씨가 범행에 사용한 약물은 항정신성의약품으로 분류되어 있는 ‘△△△’이었다. 피해여성들의 진술에 따르면 맞는 순간 따끔하다가 이내 정신을 잃게 된다고 한다. 몇 시간이 지나면 의식은 희미하게 돌아오지만 당시 상황을 정확히 기억할 수 없을뿐더러 몸이 움직이지 않으니 여성들이 탈출은 꿈도 꿀 수 없었던 거다. 김 씨는 마취가 풀릴 때까지 이들을 차에 싣고 다니다가 한적한 길가에 내다버리는 수법을 썼다.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한 결과 ‘△△△’은 외국에서 강간 목적으로 사용되곤 하는데 과다 사용시 사망에 이를 수도 있는 위험한 약품이라고 하더라. 사람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칠 수 있는 위험한 약품이었지만 김 씨에게는 범죄를 쉽게 저지를 수 있게끔 도와주는 범행도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 같은 김 씨의 행위는 피해여성들을 두 번 유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향후 이와 비슷한 약물류가 악용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철저한 법적·제도적 보완책이 절실하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