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끌고 가던 감색 가방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본 역무원이 남자를 불러 세운 것이다. “가방에 뭐가 들어 있죠?” 역무원의 질문에 남자는 서툰 한국어로 “돼지고기 40㎏”이라고 말했다. 수상히 여긴 역무원이 가방을 열어 확인했지만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육안상 커다란 고깃덩어리처럼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곳에 이런 거 들고 못 들어가요. 피가 이렇게 떨어지는데…. 어휴~ 이 바닥 좀 보세요. 사람들 놀라잖아요. 얼른 가지고 돌아가세요.”
역무원의 강한 제지에 남자는 묵묵히 가방을 끌고 사라졌다. 그리고 약 30분 후 문제의 남자가 끌고다니던 가방은 1층 구내 남자화장실에서 순찰 중이던 다른 역무원에 의해 발견된다. 무심코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파헤쳐본 역무원은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비닐에 싸인 채 가방 안에 들어있던 것은 끔찍하게 잘려져 있는 여성의 사체였기 때문이다.
4개월여 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안산역 토막사체 유기사건’은 이렇게 시작된다. 예의 남자가 이처럼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안산 단원경찰서 강력2팀 문경연 팀장이 전하는 8일간의 숨가빴던 수사현장 속으로 들어가보자.
역 구내 화장실에서 토막사체가 들어 있는 가방이 발견됐다는 소식에 안산역은 발칵 뒤집혔다. ‘아차’ 했던 역무원들이 문제의 가방을 들고 있던 남자의 행방을 찾았지만 그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가방을 확인했을 때 가방 안에는 머리와 양손, 다리 부분을 제외한 몸통과 양팔의 사체토막만이 들어 있었다. 발견 당시 피가 흥건했던 점으로 보아 살해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듯 보였다. 다음은 문 팀장의 설명.
“사체는 더없이 끔찍했다.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이렇게까지 했나 싶을 정도였다. 가장 시급한 것은 피살자의 신원확인이었다. 하지만 얼굴과 양손이 없어 신원확인에 애를 먹었다. 20~30대의 여성으로 추정될 뿐 내국인인지도 확인할 수 없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부검을 의뢰했지만 ‘피살자의 위 속에 음식물이 없는 점 등으로 미뤄 당일 오전에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는 의견만을 보내왔을 뿐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다. 수사팀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발로 뛰는 탐문수사밖에 없었다.”
수사팀은 남자를 목격한 역무원의 진술을 토대로 그의 행방을 추적하는 한편 나머지 사체를 찾는 데 주력했다. 수사팀은 남자가 끌고온 가방에서 떨어진 핏물의 동선을 추적했고 안산역에서 약 800m 떨어진 지역에서 혈흔이 끊긴 점에 주목, 이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탐문 수사에 들어갔다.
동원이 가능한 강력반 형사들이 일제히 투입돼 그 일대 주택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수사팀은 용의자로 보이는 남자가 사건 당일 오전 원곡동의 할인마트와 편의점에서 사체가 담겨 있던 여행용 가방과 100ℓ짜리 쓰레기봉투를 구입한 사실을 알아냈다. 마트 주인의 진술과 CCTV 녹화기록에 따르면 검은 피부에 키가 172~175㎝가량 되는 용의자는 사체가 발견된 당일 오전 11시 30분께 쓰레기봉투를 사기 위해 편의점에 나타났고 그로부터 약 3시간 후인 오후 2시 16분쯤에 할인마트에 들러 여행가방을 산 것으로 확인됐다.
▲ 올 2월 2일 용의자 손 씨(위 사진 가운데)가 현장검증을 위해 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 ||
“그 여성이 살았던 주택을 수색했는데 화장실에서 ‘루미놀(혈흔 탐지 시약) 반응’이 나타났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방 안에서는 범행에 사용된 칼과 망치가, 주택 옥상에서는 심하게 부패된 채 비닐에 싸여 있던 두 다리와 피묻은 남성의 옷가지들이 발견됐다. 앞서 발견된 안산역 사체토막과 이 다리 부분을 대조한 결과 동일인이라는 사실이 파악됐다. 우리는 이 집에 살던 여성의 가족으로부터 ‘목과 가슴 부위에 사마귀가 있다’는 진술을 확보, 사체와 대조한 끝에 피살자의 신원을 밝혀낼 수 있었다.”
사체가 발견된 지 6일 만에 밝혀진 피살자의 신원은 한국 여성 정 아무개 씨(34). 그러나 피살자가 드러났음에도 수사의 실마리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당시 수사 상황에 대한 문 팀장의 설명.
“범인을 특징지을 만한 단서가 없었다. 피해자는 있는데 용의자의 윤곽을 좁힐 방법이 없어 정말 막막했다. 단서라고는 CCTV에 찍힌 남자의 얼굴뿐이었는데 그 남자의 신원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던 거다. 한국어가 서툴고 중국어를 구사했다는 상점 주인의 진술로 보아 용의자는 중국인으로 추정됐는데 안산 일대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등록조차 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게 문제였다. 이 일대 공단지역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인들은 1만 명이 넘는 데다가 지문자료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즉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연루된 사건이 일어나도 신원확인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았던 거다. 사건 해결에 필요한 결정적인 단서들을 좀처럼 확보하지 못해 점점 애가 타기 시작했다.”
수사팀은 범행수법이 상당히 엽기적이고 잔인하다는 점을 감안, 치정이나 채무 등으로 인한 살인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진행해나갔다. 하지만 용의자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 이상 곧 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답보상태를 계속하던 수사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것은 수사팀이 살해된 정 씨의 휴대전화를 찾아내면서부터였다.
“정 씨가 거주하던 집을 샅샅이 수색한 결과 깨진 채 버려져 있는 정 씨의 휴대전화를 쓰레기통에서 수거할 수 있었다. 살해 당시 정 씨가 평상복 차림인 데다가 범행이 집 안에서 일어난 점 등을 감안해볼 때 범인은 정 씨를 잘 알고 있는 면식범일 가능성이 높았다. 수사팀은 정 씨와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던 인물을 찾는 데 주력했다. 수사과정에서 정 씨가 중국인 한 아무개 씨와 6년간 연인관계를 유지해왔으며 지난해 10월 23일에 90일짜리 여행비자를 받아 중국으로 출국해 한 씨를 만나고 돌아온 사실을 확인했다. 정 씨가 한 씨를 만나고 돌아온 다음날 사체로 발견됐고, 연인 한 씨는 지난해 5월 강제출국당한 후 한국에 들어온 적이 없는 점으로 미뤄 범인은 둘의 관계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다른 남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수사팀은 망가진 휴대전화의 메모리를 복구하는 데 승부를 걸었다. 그 결과 정 씨의 휴대전화에 저장되어 있던 51명의 전화번호와 통화내역 자료를 추려낼 수 있었다.”
수사팀은 정 씨의 휴대전화에 저장돼 있는 사람들의 신원을 일일이 확인해가는 과정에서 CCTV에 찍힌 남자가 중국인 손 아무개 씨(34)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손 씨의 휴대전화 통화내역을 토대로 위치를 추적하던 수사팀은 지난 2월 1일 손 씨가 휴대전화 전원을 켠 상태에서 이동 중인 사실을 확인하고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 결과 마침내 사건 발생 9일 만인 2월 1일 밤 11시 30분경 손 씨를 금정역 구내에서 검거할 수 있었다.
잠복하고 있던 형사 두 명에 의해 순식간에 제압당한 손 씨는 대체로 담담한 표정으로 조사에 응했다고 한다. 경찰 조사 결과 밝혀진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 쓰레기봉투를 구입한 상점 앞 CCTV에 찍힌 손 씨의 모습. | ||
한편 1997년에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들어온 손 씨는 안산과 구로, 부산 지역을 전전하며 나염공장, 석재공장 등에서 근무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손 씨가 정 씨를 살해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손 씨가 진술에 따르면 ‘치정문제’ 때문이었다.
“사건 당일 오전 9시께 손 씨가 정 씨를 찾아갔는데 정 씨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더라는 거다. 화가 난 손 씨는 그 남자를 때려서 쫓아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남자와의 관계를 추궁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 간에 심한 다툼이 벌어졌고 홧김에 TV 위에 있던 망치로 정 씨의 머리를 가격해 죽였다는 거다. 범행이 드러날 것이 두려웠던 손 씨는 숨진 사체를 화장실로 끌고 가 생선가게에서 사용하는 네모난 토막 칼을 사용해 사체를 8조각으로 자른 뒤 사체 일부를 여행용 가방에 넣어 유기한 것이었다.”
하지만 문 팀장은 이 사건을 단순 치정에 의한 살인으로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고 말했다.
“손 씨는 정 씨가 자신의 친구이자 정 씨의 애인이었던 한 씨를 두고 다른 남자를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에 화가 나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손 씨의 진술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손 씨는 정 씨의 애인이던 한 씨가 중국으로 쫓겨간 이후 정 씨와 내연관계를 유지해왔다고 했다. 정 씨와 내연관계를 유지했다면서 자신의 친구를 배신한 것에 격분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진술은 이해하기 어렵다. 손 씨는 중국에 아내와 아이까지 있는 가장이었다. 더구나 사귀고 있는 여자도 따로 있었다. 특히 손 씨는 범행 후 정 씨의 예금통장 4개에서 1000만 원에 달하는 돈을 인출해 달아났는데 친구를 배신한 것에 대한 ‘응징’이었다면 굳이 돈을 훔칠 이유가 있었겠는가. 가진 돈이 없었던 손 씨에게 1000만 원은 더없이 큰돈이었다. 손 씨가 정 씨의 돈을 노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손 씨의 범행이 계획적이었는지 아니면 우발적이었는지 확실치 않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의문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사건 당일 정 씨와 같이 있었다가 손 씨에게 쫓겨나갔다는 남자는 끝내 누군지 밝혀지지 않았다. 손 씨가 진술한 사건 당일의 정황 또한 사실인지 확인되지 않은 것이다. 형사들의 추궁이 계속되자 손 씨는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만 진술하고 정확한 사실관계나 범행 당시의 정황 등에 대해서는 무조건 ‘모르쇠’로 일관했다고 한다. 또한 범행 당시 술에 취해 정확한 유기장소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진술해 정 씨의 양손은 영영 찾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 까닭에 문 팀장은 손 씨의 진술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크다고 보고 있다.
수사팀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범행 후 손 씨의 신출귀몰한 도피행각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후 경찰이 안산 원곡동 일대를 이 잡듯 뒤지고 있었을 때 이미 손 씨는 진주와 부산 등 전국을 떠돌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손 씨는 범행 후 즉시 지방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훔친 정 씨의 돈을 도피자금으로 사용했다. 처음 며칠간 그는 사귀고 있던 중국인 애인과 동행했는데 애인의 휴대폰을 갖고 다니며 경찰의 추적을 피해왔다. 도피 8일 동안 그는 각 지방의 허름한 여인숙과 사찰 등을 전전했다. 97년에 입국해 한국에서 10여 년을 석제공으로 생활한 손 씨는 중국인이었지만 국내 지리와 교통사정에 밝았다. 그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여러 지방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등 과감한 도피행각을 벌여왔다. 그러다 사건 현장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늦은 밤 전철을 타고 안산으로 이동하던 중 검거된 것이었다. 검거 당시 그는 머리까지 짧게 깎고 있었는데 언뜻 봐선 몰라볼 정도였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