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년 항공기 승무원 최 아무개 씨의 사체가 발견된 국도변 제설함. 범인은 새벽 택시에 탄 손님 최 씨를 상대로 강도 행각을 벌이고 목을 졸라 살해한 것으로 드러났다. 연합뉴스 | ||
‘설마 설마’ 하며 딸의 무사귀가를 기다리던 최 씨의 어머니는 싸늘한 사체로 돌아온 딸의 주검 앞에서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실종신고가 접수된 뒤 범죄 정황을 파악하고 용의자를 추적해오던 수사팀 역시 한 여성의 안타까운 죽음 앞에서 말을 잃었다.
대체 누가 왜 최 씨를 살해한 것일까. 사체가 발견된 지 일주일 만에 용의자로 긴급체포된 인물은 택시 운전기사 민 아무개 씨(39). 마치 범인을 지목하기라도 하듯 최 씨의 하이힐 한 짝이 민 씨가 몰던 택시 좌석에 끼어 있었지만 민 씨는 체포 당시까지 그 하이힐을 발견하지 못했다.
수원 중부경찰서 오지용 형사과장이 이번에 전하는 사건이 바로 2년여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항공사 승무원 납치살해사건’이다. 분당경찰서에 근무하던 당시 이 사건을 담당했던 오 과장은 그때의 기억을 이렇게 떠올렸다.
“돈 앞에서는 사람의 생명조차 경시되는 풍조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사람 목숨을 파리만도 못하게 여기는 삭막한 세태에 더없이 착잡했던 기억이 난다. 특히 범행 후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하던 피의자의 모습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회의감까지 들었다. 친딸이 아닌 최 씨를 데려다 금지옥엽으로 키워온 어머니가 슬픔을 가누지 못해 울부짖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사건은 2005년 3월 17일 오후 3시경 분당경찰서로 한 건의 실종신고가 접수되면서 시작된다. 곧 집에 들어온다던 항공사 국제선 승무원인 최 씨가 하루가 지나도 귀가하지 않자 어머니(69)가 경찰에 실종신고를 낸 것이었다.
최 씨는 실종 당일인 16일 새벽 1시 10분께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의 한 나이트클럽 앞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신 뒤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지인들에게 목격된 최 씨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다음은 오 과장의 설명.
“실종신고가 접수된 날에 마침 내가 휴가 중이었는데 사건을 보고받고 깜짝 놀랐다. 앞뒤 정황상 단순가출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해 다음날 바로 수사팀을 구성했다. 범죄 연루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우선 최 씨의 금융거래내역을 조회했다. 그 결과 실종 당일 오전 6시 40분경 성남시 중원구의 한 대학교 인근 현금인출기에서 최 씨의 신용카드로 101만 원이, 다음날에도 안산지역 전철역 현금인출기에서 400여만 원이 인출된 사실이 확인됐다. 이런 식으로 최 씨의 카드에서 5일 동안 네 차례에 걸쳐 총 717만 원이 인출됐다. 우리는 누군가 최 씨의 금품을 노리고 저지른 전형적인 강도살인사건으로 가닥을 잡고 용의자를 찾아 나섰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 결과 최 씨는 납치 직후 목이 졸려 숨진 것으로 밝혀졌다. 허벅지와 무릎에 멍이 든 흔적과 목 부분에 끈으로 졸린 듯한 자국 외에는 특별한 외상이 없었으며 성폭행 흔적도 나타나지 않았다.
가장 시급한 것은 용의자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수사팀은 최 씨의 한쪽 하이힐이 벗겨져 있던 점에 주목, 사라진 하이힐을 찾아나서는 한편 범인이 최 씨의 카드로 돈을 인출할 당시 찍혔을 CCTV 화면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그 결과 17일 오후 7시경 안산시 고잔동의 한 현금인출기에서 모자를 눌러쓴 채 돈을 인출하는 신장 175㎝가량의 한 남성의 모습을 확보할 수 있었다. 수사팀은 CCTV 화면에 찍힌 남성을 현상금 500만 원에 전국에 공개수배하고 강도살인 전과자들을 용의선상에 두고 수사를 진행해갔다.
“수사팀은 최 씨가 택시에 탄 후 실종됐다는 점을 주목해 그 시각 최 씨를 태운 택시를 찾기 위해 탐문 수사를 계속했다. 그러던 중 한 택시기사로부터 ‘사건 당일 최 씨와 유사한 여성을 정자동 ○○아파트 앞에 내려준 적이 있다’는 제보를 받게 된다. 우리는 최 씨가 택시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도중에 납치되어 변을 당했을 수도 있다고 판단하고 목격자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최 씨가 거주하던 아파트 단지는 새벽시간에도 사람이 많은 곳으로 납치범죄가 일어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장소였다. 또 외진 곳이 아니라서 최 씨가 이 곳에서 누군가에게 납치됐다면 분명 목격자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최 씨가 납치되는 것을 봤다는 사람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제보한 택시기사의 차량 GPS를 확인했고 그 결과 운행기록이 최 씨가 택시에 탑승한 시간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했다. 즉 제보자의 택시에 탄 여성은 최 씨가 아니었던 것이다. 수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도대체 범인은 누구일까. 수사팀은 최 씨가 실종된 장소와 사체가 발견된 지점, 현금이 인출된 장소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볼 때 범인은 성남과 분당 인근에 상당한 지리감을 갖고 있는 인물일 것으로 추정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최 씨가 택시를 탄 이후의 행적이 묘연하다는 점이었다. 이에 수사팀은 분당 지역에서 영업하는 택시기사들 중 동일수법 전과자들을 우선 용의선상에 올리고 의심스런 이들의 행적을 하나씩 추적해 용의자를 좁혀나갔다.
“과거 전력으로 보아 민 씨는 또 다른 추가 범행을 저지를 수도 있는 위험인물이었다. 또 범행에 사용된 증거물들을 확보하는 일도 중요했다. 따라서 민 씨를 검거하는 일은 무척 다급한 일이었다. 또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도 안 될 만큼 신중을 요했다. 민 씨는 괜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였는지 범행 후에도 태연히 택시영업을 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경찰 수사망이 좁혀들어오는 것을 감지할 경우 민 씨가 증거를 인멸하거나 도주할 우려도 있었다. 우리는 치밀한 계획을 짰다. 그러던 중 같은 달 28일 오후 4시 10분경 서현역 인근에서 민 씨가 운행하던 뉴EF소나타 택시를 찾아냈다. 수사팀은 형사 두 명을 승객으로 가장해 민 씨의 택시에 타게 한 후 민 씨를 인근 파출소로 유인해 긴급체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민 씨에게서 자백을 이끌어내기까지 수사팀은 적잖은 애를 먹었다고 한다.
“확실한 범죄 정황이 있는데도 도무지 자백을 안 하는 거다. 민 씨는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는가 하면 몇 시간동안 묵비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민 씨가 운행한 차량의 운행기록을 들이밀었다. 또 민 씨의 차량 조수석에 끼어 있던 최 씨의 왼쪽 하이힐과 범행에 사용된 운동화 끈을 증거물로 제시했다. 그랬더니 민 씨가 갑자기 고개를 떨구더라. 그리고 자포자기한 듯 모든 것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민 씨는 왜 이런 끔찍한 범행을 저질렀던 걸까. 12일 만에 드러난 사건 당일의 정황은 이렇다.
“사건이 일어난 날 최 씨는 술에 취한 상태로 민 씨의 택시에 탑승했다고 한다. 택시에 타서도 최 씨는 술기운에 무척 힘들어했다는 거다. 운행 도중 급기야 최 씨는 택시 안에 오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그걸 본 민 씨가 뭐라고 하자 최 씨가 미안하다고 하기는커녕 짜증을 내며 되려 구시렁구시렁했던가보다. 그 문제로 서로 말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최 씨가 잠이 들어버린 거다. 안 그래도 기분이 잔뜩 상해 있던 민 씨는 최 씨가 잠들자 범행욕구를 느끼게 됐다고 한다. 그는 인적이 없는 탄천변 뒷길로 차를 몰았고 최 씨의 가방에서 카드를 훔쳤다. 그리고 최 씨에게 ‘죽이겠다’고 위협해 비밀번호를 알아냈다. 민 씨는 자신의 얼굴을 본 최 씨가 신고할 것을 우려해 결국 그녀를 목졸라 살해하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민 씨의 범행은 계획적이었을까. 경찰은 민 씨가 돈을 빼앗기 위해 범행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그날 작정하고 범행대상을 물색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민 씨의 내면에 깊숙이 잠재돼 있던 범죄심리와 사건 당일의 정황이 묘하게 맞아 떨어졌다는 것이 경찰의 분석이다. 이어지는 오 과장의 설명.
“앞서 밝혔듯이 민 씨는 강도 등의 혐의로 전과 9범인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수시로 교도소를 드나든 탓에 그는 정상적이고 안정된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 당연히 생활도 불안정했다. 가정도 꾸리지 않고 마치 하루살이처럼 살아오던 민 씨에게 유일한 낙은 경마였던 것으로 보인다. 택시기사로 일하면서 월 100여만 원 정도의 수입이 있었던 민 씨는 대부분의 돈을 경마에 탕진했다. 모아놓은 돈도 없던 그는 경마에 빠져 항시 쪼들리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돈이 궁할수록 돈에 대한 갈망은 날로 커져갔을 것이다. 그의 전력으로 판단컨대 민 씨는 일반 사람들에 비해 범죄에 대한 경각심이 떨어지는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최 씨를 태우게 된 거다. 한바탕 말다툼까지 있었고 술에 취한 최 씨가 잠들어버리자 돈이 아쉽던 차에 순간적으로 범행욕구를 느낀 것 같다. 밤늦은 시각이었던 데다가 만취상태로 저항력을 상실했던 최 씨는 모든 정황상 더없이 적절한 범행타깃이었던 셈이다.”
수사팀을 더욱 분노케 한 것은 범행 후 드러난 민 씨의 뻔뻔한 행각이었다. 먼저 그가 꽃다운 나이의 여성을 살해하고도 버젓이 택시운전을 계속해왔다는 사실에 수사팀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또 민 씨는 최 씨의 카드를 이용해 인출한 700여만 원 중 일부를 빚 갚는 데 쓰고 나머지는 인터넷 경마나 애인과의 유흥비로 탕진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 씨의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과 슬픔에 빠져 있을 때 정작 범행 당사자인 민 씨는 희희낙락하며 유흥을 즐겼다는 것에 수사팀은 더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고 한다. 더욱 무서운 것은 당시 민 씨에게서 이렇다 할 죄책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
사건이 해결된 지 2년여가 지났지만 오 과장은 조사 당시 민 씨에게서 받았던 느낌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민 씨는 삶에 대한 애착이 거의 없어 보이는 인물이었다. 한마디로 아무 계획도 없이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던 거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건전하고 적법하게 살아야 한다는 최소한의 책임감은 물론이고 범죄에 대한 죄책감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비록 최 씨 사건의 경우 사전에 치밀한 계획하에 저지른 범행은 아니었다 해도 돈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범행을 저지를 수 있는 요주의 인물이었던 거다. 특히 최 씨를 상대로 한 범행이 너무도 쉽게 이뤄졌기 때문에 민 씨가 이를 계기로 또 다른 범행대상을 찾아나섰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최 씨의 죽음은 더없이 안타깝지만 또 다른 추가범행을 막았다는 점에서 수사팀은 작은 위안을 얻었다.”
피의자 민 씨는 2005년 11월 2일 수원지법 성남지원에서 열린 1심 공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직후 법원 담장을 넘어 도주해 또 한 번 세상을 경악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 탈주극은 민 씨가 분당경찰서 형사에게 검거됨으로써 11시간 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