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을 훔쳐 살았던 영화 <화차> 스틸컷.
30대 후반이 넘어서 애인도 없던 정 아무개 씨(41)가 친구들에겐 항상 걱정이었다. 지난 2010년 모임에 정 씨를 불러낸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정 씨의 중학교 동창은 염 아무개 씨(여·42)를 자신의 고등학교 동창이라며 소개했다.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의 정 씨는 적극적인 염 씨가 마음에 들었다.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감정을 키워나가길 3개월째. 정 씨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잘 잤느냐’는 인사를 하려 아침에 염 씨에게 전화를 걸자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염 씨의 남편이라고 소개한 남성은 염 씨가 유부녀에 아이들까지 있으니 더 이상 만나지 말라고 요구했다. 황당함과 그간 속았다는 배신감에 정 씨는 “다신 만나지 말자”며 염 씨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그렇게 염 씨와의 만남은 충격적이지만 황당한 해프닝으로 끝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2013년 말, 염 씨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여전히 미혼이었던 정 씨에게 염 씨는 “이혼하고 혼자 지내고 있다. 다시 만나고 싶다”고 간절히 얘기했다. 수년 전 겪었던 배신감 때문에 정 씨는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염 씨의 지속적인 연락에 정 씨는 연민이 생겼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만나다가 두 사람은 다시 연인이 됐다.
하지만 여자친구의 수상한 행적은 계속됐다. 사소한 거짓말을 자주 해 두 사람은 종종 다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거짓말 때문에 염 씨에 대한 불신은 쌓여갔다. 관계 정리를 고민하던 중 염 씨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임신 3개월이다. 아이를 낳고 싶다”고 말하는 염 씨에게 정 씨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며 완강하게 버텼다. 정 씨의 뜻밖의 반응에 염 씨는 더 완고하게 나왔다. 아이는 혼자 낳아 기를 테니 상관하지 말라고 통보한 뒤 염 씨는 사라졌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나 뱃속의 아기는 5개월이 됐다.
“이제 아이 지우지도 못 해. 같이 낳아서 기르자.”
염 씨의 간절한 부탁에 정 씨는 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염 씨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가정을 꾸리자고 결심했다. 정 씨는 어머니에게 염 씨의 임신 사실을 알리고 신혼집을 꾸릴 채비를 했다. 정 씨의 어머니는 살던 집을 팔고, 두 사람의 신혼집을 성남시 중원구에 마련해줬다. 아들 내외의 오붓한 신혼생활을 위해 인근에 원룸을 얻어 나왔다. 그 사이 염 씨의 배는 점점 불러왔고, 초음파 사진을 가족들에게 보여주며 아이가 잘 크고 있다고 전했다. 산달이 다 되자 결혼식을 올리기 전 두 사람은 집을 합쳤다.
하지만 정 씨의 어머니가 걱정하는 문제는 따로 있었다. 출산 전 결혼식을 하려 했지만, 예비 며느리의 어머니가 편찮으신 바람에 차일피일 상견례 일정이 미뤄졌다. 염 씨는 “어머니 심장이 안 좋으시다. 얼마 전 수술을 받으셔서 회복 중이다”며 “회복되는 대로 상견례 날짜를 잡자”고 말했다. 하지만 몇 달에 걸쳐 “어머니가 다시 입원하셨다”, “어머니 얼굴이 다쳤다”는 등의 얘기를 해 결국 배가 다 불러 오도록 사돈의 얼굴도 보지 못 했다. 그 사이 염 씨의 어머니는 정 씨를 ‘정서방’이라고 부르며 전화해 병원비 명목으로 정 씨에게 수십만 원을 요구하기도 했다.
염 씨가 자신이 낳은 아기라며 시댁 가족에게 보낸 사진.
산달이 다 되자 염 씨는 예비 시어머니에게 산후조리를 부탁했다. 평소 며느리가 탐탁지 않았기에 망설였지만, 아들의 설득에 넘어갔다. 일도 그만두고 신혼집으로 가 며느리의 출산 준비를 도왔다. 하지만 예정일이라고 말한 1월 초가 지나도록 아이는 나오지 않았다. 예비며느리는 “병원에서 아기가 작다고 하더라. 내일모레까지 진통이 없으면 제왕절개 하기로 했다”며 기다려 보자고 말했다.
다시 수술날짜가 임박하자 염 씨는 직장에서 일하던 정 씨에게 “아기 낳으러 병원 간다. 평소 가던 병원 말고 경기도 양평에 있는 병원에 갈 거다”고 연락했다. 심지어 정 씨에겐 병원 이름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병원을 캐물었지만 염 씨는 답이 없었다. 며칠 후 인큐베이터에 들어있는 아기 사진과 함께 “아이가 조금 아프다”는 메시지가 왔을 뿐이었다.
평소 염 씨를 탐탁찮게 여기던 사람은 또 있었다. 정 씨 어머니의 친구 A 씨였다. 중원구 토박이인 A 씨는 웬만한 동네 유지는 꿰고 있었다. 염 씨와 대화를 하던 중 “아버지도 이곳에 사신 지 40년이 넘었다. 동네 토박이시다”는 얘기를 들었다. 염 씨의 수상한 행적이 마음에 걸렸던 A 씨는 조용히 염 씨의 아버지를 수소문했다. 염 씨 가족을 잘 안다는 또 다른 이는 “그 집엔 남매가 다 장성해서 출가했다”고 전했다. 설마 했다. 혹시 모르는 일이니 직접 염 씨의 친정을 찾아가 확인하기로 했다.
염 씨의 부모는 염 씨의 그간의 행적을 새까맣게 모르는 듯했다. 정 씨와 신혼집을 차리고 아기까지 낳으러 갔다고 A 씨가 전하자, 염 씨의 가족은 더 충격적인 얘기를 들려줬다. 이미 둘째 아이를 낳고 아기를 더 이상 갖지 못하게 하는 수술을 했기에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고 했다.
그제야 모든 의심의 퍼즐이 맞아 들어갔다. 산달이 다 되도록 나오지 않는 아기, 볼 때마다 모양이 달랐던 염 씨의 부른 배, 병원도 가르쳐주지 않고 잠적한 행적. 모든 게 염 씨의 거짓말이었다. 심지어 자신을 ‘정서방’이라고 부르던 장모님 역시 가짜였다. 염 씨의 남편은 신혼집을 찾아와 염 씨의 물건을 확인했다. 그간 말다툼 후 아내가 집을 비우곤 했던 사실을 떠올리며 남편 역시 분노했다.
모든 사실을 두 집안이 알게 됐지만 정작 염 씨 본인은 종적을 감췄다. 전화기도 꺼둔 채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정 씨의 어머니는 “그간 가구 산다, 병원 간다 하며 조금씩 돈을 가져갔다. 많은 돈을 가져간 것도 아닌데, 임신부 행세까지 하며 우리 아들 인생을 망쳐놓은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다”며 눈물을 쏟았다. 정 씨의 어머니는 억울한 마음에 염 씨의 친정집을 수시로 찾아가 염 씨의 행방을 따졌다. 염 씨의 실종으로 두 집안의 갈등은 점점 커지고 있다.
염 씨의 남편 역시 “나도 염 씨가 어디 있는지 안다면 꼭 찾고 싶다. 차라리 신문에 사진을 내 공개적으로 찾아주면 되겠느냐”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어 그는 “거짓말을 해서 큰돈을 얻은 것도 아닌데 왜 굳이 저런 수고를 들여가며 몇 년 동안 거짓말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서윤심 기자 heart@ilyo.co.kr
유사사례 모아보니… 거짓말 들통나자 청부살인까지 헉! 자신의 현실과 다른 인생을 살아가려 주변 사람들을 속이는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대부분 여성이라는 점,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치밀하게 거짓말을 한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전남편을 청부 살해한 피아니스트 사건의 주인공 피아니스트 이 아무개 씨(42) 역시 결혼 직전까지 아들이 두 명이나 있는 이혼녀라는 사실과 경력 등을 숨기거나 거짓으로 얘기했다. 이 씨의 거짓말을 알게 됐지만 예술가 채 아무개 씨(당시 40세)는 결혼을 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결혼 후에도 밥 먹듯이 이어지는 거짓말과 외도, 혼외자 임신에 결국 이혼했다. 이혼의 책임이 이 씨에게 있기에 위자료를 지급하기로 약속했지만, 경제적 사정이 어려워지자 이 씨는 심부름센터를 고용했고, 채 씨는 심부름센터 직원의 흉기에 찔려 숨졌다. 이 씨는 채 씨 살해를 사주한 혐의로 징역 13년을 선고받았다. [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