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현실을 부정하는 동시에 스스로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고 믿는 리플리증후군을 다룬 드라마 <미스 리플리>의 포스터.
1997년 당시 중학생이었던 김 아무개 씨(여·32)도 대한항공 괌 추락사고로 아버지와 오빠를 잃었다. 김 씨 옆에 남은 사람은 어머니뿐이었다. 어머니와 단둘이 남은 김 씨는 가족을 잃은 마음의 상처로 불행한 학창시절을 보내야 했다. 생활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김 씨는 아버지의 유산과 사고 보상금으로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했다. 김 씨가 사는 아파트는 시가 10억 원에 달했다. 하지만 경제적 풍요는 김 씨에게 의미가 없었다. 사고로 가족을 잃은 충격과 함께 시작된 우울증은 극복하기 힘들었다.
20대가 된 김 씨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한국에는 불우한 학창시절의 기억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미국으로 가면 불행한 기억을 잊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유학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김 씨는 미국유학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온 김 씨는 결혼을 선택했다. 회계사와 결혼식을 올린 김 씨는 결혼을 통해 자신이 원하던 행복한 삶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김 씨의 어머니와 남편은 사사건건 부딪히는 일이 많았다. 김 씨의 우울증은 또 다시 깊어졌다. 뒤늦게 김 씨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남편과의 관계를 개선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후였다. 결국 김 씨는 임신한 몸으로 이혼을 했고, 다시 한 번 가족이 깨지는 경험을 해야 했다.
유학과 결혼도 완전한 도피처가 되지 못했다. 김 씨는 과거를 잊고 새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에 개명까지 했다. 그렇다고 자신의 기구한 인생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 씨는 5년 전 화장실에서 우연히 주워 보관하고 있던 한 여대생의 지갑이 떠올랐다. 5년 만에 다시 꺼내든 지갑에는 음대에 다니는 여학생의 학생증과 주민등록증이 그대로 들어있었다. 지갑 안에 있던 신분증을 이용해 찾아낸 여대생의 SNS에는 김 씨가 꿈꾸던 행복한 일상이 올라와 있었다.
순간 김 씨는 ‘이 여대생의 삶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릴 적부터 음악을 하고 싶었던 김 씨에게 음대에서 첼로를 전공하는 여대생의 삶은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김 씨는 다른 사람의 삶의 복제하고 싶다는 위험한 생각을 결국 행동으로 옮기기 에 이르렀다.
김 씨는 여대생의 이름으로 금융권에도 손을 뻗쳤다. 김 씨는 여대생 명의의 통장과 증권계좌를 개설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김 씨는 본래 개설돼 있던 여대생의 통장 계좌로 체크카드까지 발급받았다. 김 씨가 체크카드를 발급받아 사용한 곳은 일반 여대생처럼 카페에서 빵과 음료 등을 사먹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한몫’을 챙길 목적과는 거리가 멀었던 김 씨는 여대생 명의의 체크카드로 식료품을 사거나 수수료를 결제하는 등 소소한 일상을 누렸다.
한번 시작된 김 씨의 ‘복제인생’은 점점 더 대범해졌다. 여권이 필요했던 김 씨는 “성형수술을 해서 얼굴이 변했다”고 둘러대며 여권을 발급받았다. 여대생이 사용하던 이메일이나 SNS를 뒤져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비밀번호를 바꿔놓기도 했다. 급기야 지난해 12월 김 씨는 제2금융권에서 여대생 명의로 600만 원을 대출받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제2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으면서 김 씨의 가짜인생도 덜미를 잡혔다. 대출통지서가 본래 여대생의 집으로 발송된 것이다. 대출통지서를 받아든 여대생의 어머니는 깜짝 놀랐다. 미국에서 유학중인 딸이 국내 제2금융권에서 대출을 받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여대생 가족은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고, 대출을 받던 김 씨의 모습이 찍힌 CCTV가 확보되면서 곧이어 김 씨가 검거됐다.
김 씨를 검거하고 나서 경찰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김 씨가 임신 4개월에다 우울증까지 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 씨의 혐의는 사기·사문서위조·주민등록법위반·점유이탈물횡령 등 13개에 이르렀다. 결국 경찰은 김 씨의 영장을 신청하고 구속기소 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3일 서울남부지법 형사2단독(김석수 판사)은 남의 신분증으로 다른 사람의 신분을 사칭해 대출 받은 혐의로 김 씨에게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김 씨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재판부는 “명의를 도용당한 여대생과 합의하고 범행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가 모두 회복된 점, 사고로 아버지와 오빠를 잃어 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던 점, 건강 상태가 좋지 않고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있는 점 등을 참작하였다”고 설명했다.
대한항공 괌 참사의 어두운 그림자는 지금까지도 유족들의 삶에 길게 드리워져 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