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해를 한 채 포항에서 발견된 일가족 살인사건의 피의자 김 씨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모습. 감정 결과 그는 충동조절장애를 앓고 있었다. 뉴시스 | ||
신고를 한 사람은 성남시 산성동에 거주하고 있던 김 아무개 씨(여·44). 이 날 새벽 잠자리에서 깨어난 김 씨는 자신의 집 거실에 떨어져 있는 핏자국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고 이내 작은 방에서 자고 있던 여조카 김슬기 양(가명·당시 14세)이 흉기에 찔려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다급히 인근 지구대에 신고를 한 김 씨는 뭔가 불길한 생각에 자신의 집에서 300m 정도 떨어진 어머니의 집으로 달려갔다. 집 안에 들어선 김 씨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어머니(당시 67세)와 조카 김우석 군(가명·당시 13세) 역시 피투성이가 된 채 방과 거실에서 처참하게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지난해 가을 시민들을 공포와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던 ‘성남 일가족 살인사건’의 시작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검거된 피의자는 뜻밖에도 이 집안의 가장 격인 김재호 씨(39). 일가족을 비명에 숨지게 한 김 씨의 범행에는 충격적인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성남 수정경찰서 강력5팀 장석영 팀장은 다음과 같이 소회를 피력했다.
“불과 몇십 분 간격으로 일가족 세 명이 몰살당한 끔찍한 사건이었다. 한 가장이 자신의 노모와 아들, 그리고 조카를 살해한 것이다. 아들에 의해 살해된 노모와 아버지에 의해 살해된 자식, 작은아버지에 의해 살해된 조카의 한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겠나. 사랑하던 가족을 상대로 살인행각을 벌인 범인 역시 평생을 죄책감과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지 않겠나. 출소자와 정신병력자에 대한 세심한 관심과 철저한 관리가 이뤄졌다면 막을 수도 있었던 비극이기에 더욱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당시 사건 현장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참혹했다. 장 팀장이 전하는 당시 상황은 이렇다.
“(범인이)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찔러댔는지 집 안에는 혈흔이 가득했다. 사체의 상태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참혹했다. 이들은 등과 배, 가슴 부분에 각각 17~30군데 이상 난자당한 상태로 처참하게 죽어 있었다. 현장감식 결과 두 사건은 신고가 들어오기 직전인 새벽 6시께 연달아 발생한 것으로 판단됐다. 피해자는 일흔을 앞두고 있는 할머니와 그녀의 어린 손자손녀였다. 할머니에게서 ‘반항흔’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할머니는 자다가 일어나자마자 변을 당했고 각각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던 손자손녀는 잠을 자고 있는 동안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됐다. 또 일가족을 상대로 끔찍한 살인행각을 저지른 것으로 보아 면식범이자 동일인의 소행으로 추정됐다.”
일가족이 동시간대에 살해된 점, 노인과 어린 학생들까지 죽인 점, 참혹했던 현장 분위기 등으로 봐서 강도나 외부인에 의한 범행으로는 보기 어려웠다는 것이 장 팀장의 얘기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왜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걸까. 수사팀은 사건 직후 연락을 끊고 잠적한 노인의 아들 김재호 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바로 어젯밤까지만 해도 전화통화를 했지만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김 씨 누나의 진술이었다. 다음은 장 팀장의 얘기.
“김재호는 지난 96년 친형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되어 1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사건이 일어나기 약 석 달 전인 7월 말께 만기 출소한 인물이었다. 김재호는 산성동 집에서 어머니와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 우석 군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출소 후 특정한 직업을 갖지 못하고 공사판 일용직을 전전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처음 현장을 목격하고 신고를 한 사람은 김재호의 누나였다. 그녀는 10년 전 김재호가 죽인 형의 딸인 슬기 양을 키우며 김재호의 집과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었다. 오빠에 이어 한순간에 어머니와 두 조카를 잃게 된 그녀의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일단 수사팀은 얼마 전 출소한 김 씨가 평소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다툼도 잦았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그가 가정사를 이유로 어머니와 아들, 조카를 살해한 것으로 판단했다.
수사팀은 김 씨의 주변 인물들을 상대로 그의 행적을 파악하는 한편 예상되는 도피지역들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특히 김 씨는 젊은 시절 여러 어촌지역을 떠돌아다니며 오징어잡이를 했던 특이한 경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김 씨가 연고가 있거나 자신이 머물렀던 곳으로 도피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수사팀은 김 씨에 대해 수배를 내리는 한편 형사들을 각 지역에 급파, 김 씨의 행방을 추적해나갔다.
그러던 중 같은 달 21일 오후 9시 50분께 포항 북부경찰서에 한 시민으로부터 다급한 제보 전화가 걸려온다. 포항시 북구 두호동의 모 마트 앞길에 한 중년 남자가 다량의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다는 제보였다. 자해를 한 것으로 보이는 이 남자는 배와 양쪽 다리, 팔 등 무려 12곳에 심한 자상을 입고 있었는데 상처가 워낙 깊어 피를 상당히 많이 흘린 상태였다.
경찰에 의해 즉시 응급실로 후송된 이 남자는 신원을 묻는 의사들의 질문에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이를 수상히 여긴 경찰은 결국 신원확인을 위해 남자의 지문을 채취했고 그 결과 그가 성남 산성동 일가족 살해 용의자로 수배 중이던 김 씨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성남 수정경찰서는 다음날 김 씨를 인계받아 조사를 벌였고 그 결과 드러난 사실은 이렇다.
앞서 밝혔듯이 김 씨는 형을 살해한 혐의로 10년을 복역한 인물이었다. 형을 살해한 김 씨가 다른 식구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을 터. 이러한 껄끄러운 관계는 김 씨가 출소한 후에도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변변한 직업도 없고 고정 수입조차 없던 김 씨가 제대로 된 가장 노릇을 할 리 만무했다. 김 씨는 산성동의 좁은 집에서 늙은 어머니, 어린 아들과 함께 하루하루 빠듯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비밀로 묻어두려 했던 수치스러운 사실을 가족들이 알게 되자 김 씨는 밤새 술을 마시며 고심한 것으로 보인다. 새벽이 다가오자 김 씨는 다시 감옥에 가야 한다는 두려움과 초조감 속에서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지고 만다. 결국 김 씨는 부엌에 있는 주방용 칼을 집어 들었고 때마침 잠에서 깨 거실로 걸어 나오던 어머니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건넛방에서 자고 있던 자신의 아들의 등에도 칼을 꽂았다. 피를 본 김 씨는 이미 이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두 사람을 상대로 무자비하게 흉기를 휘두른 그는 그 길로 이웃에 있는 누나네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잠들어 있던 조카 슬기 양마저 처참하게 살해하고 만 것이다.
“김재호는 범행 후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통장에 있는 돈 40만 원을 찾아 들고 포항으로 도주했다. 포항은 김재호가 젊은 시절 6개월 정도 머물며 오징어잡이 배를 탔던 곳이었다. 하지만 포항에 도착한 김재호는 길거리를 배회하다 괴로운 마음에 자살을 결심하고 자해를 했던 것이다. 당시 피를 상당히 많이 흘리긴 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였다.”
무엇보다 수사팀을 궁금하게 만든 것은 범행 동기였다. 당시 수사 상황에 대해 장 팀장은 이렇게 술회한다.
“일가족을 살해한 것으로 보아 범상치 않은 사연이 있을 거라고 짐작은 했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어린 아들과 조카는 물론이고 어머니까지 죽여야 했는지 우리로서도 정말 의문이었다. 김재호는 자신의 범행을 순순히 인정했지만 범행 당시의 상황에 대해 정확한 진술을 하지 못했다. 또 범행동기에 대해서도 쉽게 입을 열지 않아 애를 먹었다. 그러나 조사결과 출소 후 김재호가 벌여온 엽기행각이 드러나게 된다. 김재호는 이미 수차례에 걸쳐 아들의 여자친구와 친조카를 상대로 욕정을 채워온 것이었다. ‘어린 아이들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김재호는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다가도 술을 마시면 그 애들이 여자로 보여 참을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미성년자를 상대로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수사팀은 분개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상대는 아들의 여자친구와 자신이 죽인 친형의 딸이 아니었던가. 기가 막혔다. 어린 두 소녀들을 상대로 몹쓸 짓을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살인까지 저질렀으니 정말 당시에는 인간으로 안 보였다.”
뿐만 아니라 김 씨는 당시 집에서 기르던 개까지 잔혹하게 죽인 것으로 드러나 수사팀을 경악케 만들었다. 하지만 양쪽 집을 오가며 무자비하게 흉기를 휘두른 김 씨가 당시 슬기 양과 같은 집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자신의 누나를 살려둔 것은 의문이었다. 이에 대해 김 씨는 ‘누나는 나를 인간적으로 대해주고 잘 보살펴줬다. 그래서 차마 누나만큼은 죽일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당시 언론들은 출소 석 달 만에 끔찍한 살인극을 벌인 이 파렴치한 남성에 대해 앞 다투어 보도했다. 사건이 보도되자 피의자인 김 씨에 대해 온갖 비난 여론이 쏟아진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장 팀장은 사건 그 자체에 대한 보도도 중요하지만 사건이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제대로 보도한 언론이 없었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나타냈다.
“사건이 발생한 원인이 무엇인가를 분석하는 일은 범인을 잡는 것만큼 중요하다. 추후 비슷한 범행을 예방하거나 막을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김재호는 불우한 집안환경 때문에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으며 판단능력이나 지능적인 면에서도 일반인들에 비해 떨어지는 인물이었다. 조사결과 김재호는 과거 정신병을 앓은 전력이 있었는데 범행을 저지른 당시에도 신경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을 복용하고 있던 상태였다. 경제적인 여건이 되지 않아 입원치료 한 번 받지 못하고 개인병원에서 약을 타 먹는 상황이었던 거다. 한마디로 말해서 김재호는 심신상의 문제가 있던 인물이었다.”
장 팀장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김 씨는 정상적인 정신을 지닌 것으로 보기 어려운 인물이었고 어머니와 아들까지 잔인하게 죽인 것 역시 이런 김 씨의 정신 상태와 무관치 않다는 가정도 가능하다. 경찰에서 김 씨는 “술에 취하면 그냥 생각나는 대로 행동하게 되는데 가족들을 숨지게 했을 때엔 술에 많이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장 팀장은 김 씨가 조사를 받던 당시 ‘죽고 싶다. 살기 싫다’는 말을 반복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이어지는 장 팀장의 얘기.
“교소도에서 10년을 복역하고도 정신을 못 차린 점, 미처 피지도 못한 두 소녀들을 성적으로 유린한 점, 출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또다시 이런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점 등으로 볼 때 김재호는 분명 ‘나쁜 자’이며 그에 상응하는 죗값을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내가 볼 때 김재호는 분명 치료가 필요한 인물이었다. 김재호의 범행이 전적으로 정신병력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그것이 범행을 하게 된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음은 확실해 보인다. 실제로 우리가 용인정신병원 측에 정신감정을 의뢰한 결과 김재호는 ‘충동조절장애’라는 병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충동조절장애가 위험한 이유는 도무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이다. 범행으로 직결되는 상황이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정신분열증과는 또 다른 증상을 보인다고 한다. 실제로 김재호는 ‘흥분해 모든 걸 포기한 상태에서 범행을 저지른 것 같다’고 진술했다. 그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던 김재호가 결국 큰 사고를 치고 만 것이다. 김재호는 순박한 시골농부 스타일로 대화를 나눠본 결과 본성이 독하거나 악질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만약 입원조치 되어 적절한 치료를 받았더라면 이런 참극만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까웠던 사건이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