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의자가 작성한 사형선고문. | ||
마치 법정에서 판사가 피고인에게 형을 선고하는 장면인 듯하다. 하지만 이것은 최근 한 30대 사내가 변심한 자신의 동거녀를 찾아내 살해할 때 읽어줄 목적으로 작성해둔 ‘선고문’의 일부다. 실제 이 사내는 예전 동거녀와 그녀의 새 남자친구 등에게 복수하기 위해 살해계획까지 세워놓고 이 여성을 납치했다가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울산 남부경찰서는 지난 8월 27일 과거 자신의 동거녀였던 A 씨(19)의 집에 침입해 A 씨 등을 흉기로 위협하고 납치한 혐의(살인미수 등)로 B 씨(32)를 체포했다. 경찰 조사 결과 경남 지역의 한 주유소에서 일하는 B 씨는 13세 연하의 A 씨와 1년 가까이 동거를 해왔으나 A 씨가 자신을 떠나 다른 남성과 사귀게 되자 복수심에 범행을 결심한 것으로 밝혀졌다.
실제로 B 씨는 A 씨는 물론 A 씨의 새 남자친구, 이 남자친구를 소개시켜준 A 씨의 친구 C 씨(여·19) 등 3명을 모두 살해 대상으로 삼고 이들에게 읽어줄 ‘사형 선고문’을 미리 작성했는가 하면 따로 범행계획과 일정, 수법 등을 자세히 적은 범죄계획서까지 만들어놨던 것으로 드러났다.
대체 무슨 까닭에 B 씨는 변심한 동거녀는 물론 다른 두 사람의 생명까지 해치려 했던 걸까. 경찰 수사 결과를 토대로 이들 간에 얽히고설킨 사연을 재구성해봤다.
2005년 12월 피의자 B 씨가 일하고 있는 주유소로 10대 후반이던 A 씨와 A 씨의 친구 C 씨가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찾아왔다. 당시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생에 대한 관리 책임을 맡고 있던 이는 B 씨. 이것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함께 일하게 된 지 얼마 뒤 B 씨는 유독 자신을 잘 따르던 A 씨에게 호감을 느꼈고 A 씨 또한 자상한 B 씨에게 애틋한 감정을 가지게 됐다. 당시 유부남이었던 B 씨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려 했지만 결국 사랑에 빠졌고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했다.
B 씨는 이혼까지 감행할 정도로 A 씨에게 빠져들었다. 하지만 10개월가량 지속되던 두 사람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고 만다. A 씨와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던 친구 C 씨가 A 씨에게 회사원 K 씨(26)를 소개해줬던 것. 당시 B 씨에게 싫증을 느끼고 있던 A 씨는 K 씨와 사귀며 서로 가깝게 지내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B 씨는 A 씨에게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라며 설득도 해보고 그녀의 남자친구인 K 씨를 만나 헤어질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A 씨의 마음은 B 씨를 떠난 상태였다. 오히려 자신에게 매달리는 B 씨에게 더 매몰차게 대하며 그를 멀리했다. 그럼에도 B 씨가 계속해 다시 만날 것을 요구하자 A 씨는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몰래 친구 C 씨와 함께 울산으로 이사를 했다.
A 씨와 동거하면서 이혼까지 했던 B 씨로서는 사랑이 깊었던 만큼 배신감도 클 수밖에 없었다. A 씨는 물론 A 씨에게 남자를 소개해준 C 씨, K 씨를 향한 그의 증오도 하루가 다르게 쌓여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B 씨는 이 3명에게 복수하기로 작정하고 구체적인 행동요령을 담은 ‘살해계획서’를 만들게 된다. 또 이들을 살해하기 전에 각자의 ‘죄목’을 읽어줄 ‘선고문’까지 미리 작성했다. 그 자신이 ‘판사’요, 법의 집행자였고 A 씨 등은 단죄해야 할 ‘피고인’이었던 셈이다.
나중에 경찰에 압수된 A4용지 3장 분량의 살해계획서에 따르면 B 씨는 우선 8월 26일 범행에 필요한 도구들을 구입하고 다음날인 27일에는 C 씨가 병을 치료하기 위해 다닌다는 한 병원에서 C 씨를 미행해 A 씨의 거주지를 알아낸다는 계획을 세웠다. 또 9월 1일엔 범행 결행시간 및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결정하고 2일에는 예행연습을 하기로 계획했다. 최종 범행일은 9월 6일로 잡았는데 이는 5일이 B 씨의 월급날이었기 때문에 도피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범행 디데이로 잡은 6일의 경우 보다 자세하게 세부계획을 기록해놨는데 주거지 은신→…노끈과 테이프를 이용해 포박→‘피고인’들의 ‘체포’가 끝나면 선고문 낭독… 등의 순서로 적혀 있었다.
▲ 범행 당시 사용한 복면. | ||
범행 당일 B 씨가 A 씨의 자취방에 찾아갔을 때 친구 C 씨는 마침 외출한 상태였다. 열려 있는 문틈으로 보니 A 씨는 속옷차림으로 선풍기 앞에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더운 여름철이라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던 게 A 씨의 실수라면 실수였다. B 씨는 A 씨의 뒤로 다가가 입을 막고 엎드리게 한 후 미리 준비해 간 테이프로 손과 발을 묶고 입을 봉했다. 그런 후 가방에서 칼을 꺼내 A 씨의 속옷을 찢고 알몸이 된 A 씨를 화장실로 끌고갔다.
그때 C 씨가 집 안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B 씨는 재빨리 가방에서 복면을 꺼내 쓰고는 방 안으로 들어오는 C 씨를 칼로 위협했다. 그리고 역시 테이프로 팔다리를 결박하고 입을 막았다.
B 씨는 화장실에서 A 씨를 데리고 나와 C 씨와 함께 방 한구석으로 몰아넣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 준비한 흉기 등을 두 사람 앞에 진열한 후 ‘복면 쓰면 사람 죽이는 데 용기가 생긴다’라며 가방에서 손도끼를 꺼내 내리치는 시늉을 했다.
겁에 질린 두 사람은 그저 울기만 했다.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입은 테이프로 인해 막힌 상태였다. 이때부터 B 씨의 응징의 ‘재판’이 시작됐다. 그는 울고 있는 두 여성 앞에서 범행 전에 미리 작성한 선고문을 낭독했다. 선고문은 총 세 부분으로 되어 있었다. B 씨는 A 씨에 대한 사형 판결을 먼저 읽은 후 차례로 K 씨와 친구 C 씨의 것을 낭독했다.
그 자리에 없던 K 씨에 대한 선고문의 주요 내용은 ‘피고는 A 씨에게 동거인이 있음을 알고도 접근하여 유혹해 전 동거인에게 상처를 준 점이 인정되고 또한 이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였음에도 끝까지 그 뜻을 굽히지 않으므로 사형을 선고한다’는 것이었다.
C 씨에 대한 선고문은 ‘피고는 A 씨에게 엄연히 상대가 있음을 알면서도 K 씨를 소개시켜 주어 분란을 일으킨 점이 인정되고 계속 A 씨를 현혹하여 K 씨와 관계를 지속하게 한 점이 인정되어 사형을 선고한다’는 내용이었다.
▲ 피의자가 범행 전 치밀하게 준비한 각종 흉기들. | ||
B 씨는 이날 오후 2시경 C 씨를 집 안에 남겨둔 채 A 씨만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이때 B 씨는 두 사람이 신고할 것을 우려해 이들로부터 각서를 받았다. 두 사람이 서명까지 한 이 각서에는 ‘본인은 2007. 8. 27 발생한 모든 일에 대해 본인의 책임으로 인정하고 일체 거론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정도로 안심이 안 됐는지 B 씨는 자취방을 나오기 전 C 씨에게 ‘신고하면 A 씨가 위험할 것이다’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실제로 C 씨는 B 씨가 친구 A 씨를 데리고 나간 후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저녁때가 다 돼서야 경찰에 신고했다. 이것이 B 씨의 검거가 늦어진 이유였다고 경찰은 밝혔다.
자취방에서 나온 B 씨는 A 씨를 근처 여관으로 데리고 갔다. A 씨로부터 결혼 승낙을 받았다고 생각한 그의 감정은 많이 누그러진 상태였다. B 씨는 이곳에서 A 씨와 같이 동거하던 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얘기를 나누고 식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A 씨가 갑자기 복통을 호소했다. B 씨가 여관에서 본드를 강제로 흡입시켰는데 아마 이것이 문제가 된 것 같다고 경찰은 추정했다.
A 씨는 아픔을 참지 못하고 병원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B 씨는 선뜻 A 씨를 데리고 여관에서 나와 경주에 있는 한 병원으로 갔다. 이 무렵이 저녁 8시경. 여관에 들어간 지 6시간 만에 밖으로 나온 것이다.
한편 이 사이 C 씨로부터 A 씨의 납치신고를 접수한 경찰은 B 씨의 휴대폰 위치추적을 이동통신사에 의뢰했고 그 결과 B 씨가 경주의 한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급히 병원으로 출동한 경찰은 응급실에서 A 씨와 함께 있던 B 씨를 검거할 수 있었다. B 씨는 출동한 경찰에 순순히 몸을 맡겼고 이로써 그의 엽기적인 범행은 막을 내렸다.
B 씨는 검거된 후 “나는 A 씨 때문에 이혼까지 했는데 A 씨가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해 홧김에 저지른 것”이라고 범행 동기를 밝혔다. 하지만 우발적으로 저질렀다고 보기엔 범행준비가 너무 치밀했다는 것이 경찰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 관계자는 “피의자 B 씨가 비록 자신이 작성한 계획표대로 범행을 실행하지는 않았지만 사전에 피해자의 동선을 파악하고 범행도구 등을 구입한 것으로 봤을 때 만약 A 씨가 끝까지 결혼에 반대했더라면 잔인한 살인극이 벌어졌을 수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B 씨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다른 것은 인정하겠지만 납치는 아니다. A 씨가 순순히 따라 나온 것이다”라고 황당한 주장을 펴기도 했다. 하지만 B 씨를 검거한 경찰관계자는 이에 대해 “피해자인 A 씨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언제 흉기를 휘두를지 모르는 상황이라 B 씨를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울산=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