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4년 검거된 지존파의 현장검증 모습. | ||
이 책에는 고 과장이 일선 형사로서 겪었던 갖가지 에피소드와 함께 경찰관으로서 그리고 아버지와 한 인간으로서 느꼈던 단상과 삶의 애환이 솔직하게 담겨 있다. 책 속에서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지난 90년대 한국 사회를 공포와 충격 속에 빠트렸던 ‘지존파 사건’의 뒷얘기를 전한 대목이다.
‘지존파 사건’은 1994년 김 아무개 씨 등 젊은이 6명이 ‘지존파’라는 범죄단체를 만들어 10억 원을 빼앗는다는 목표 아래 네 차례에 걸쳐 5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이들 일당은 전남 영광에 아지트를 만들어 생활했으며 납치한 피해자들을 이곳에서 살해하고 신체를 소각했다. 이 과정에서 인육을 먹었다는 소문까지 흘러나와 많은 사람들을 경악케 하기도 했다.
이들 일당의 주요 범행 대상은 고가의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 즉 부자였다. 이들은 자신들만이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이 사회는 불공평하다며 부자들을 해치고 돈을 뺏는 행위를 합리화하려 했다. 이들 일당은 강남 백화점을 자주 다니는 사람들과 오렌지족, 야타족 등을 다음 범행 대상으로 미리 점찍어 놓기도 했었다. 실제로 검거 당시 이들의 아지트에선 서울 강남의 백화점 단골 150여 명의 명단이 발견된 바 있다.
지존파 일당은 이들의 아지트로 납치당했던 한 여성이 극적으로 탈출해 신고함으로써 경찰에 검거됐다. 그리고 1995년 11월 이들 일당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면서 이 희대의 살인사건 또한 막을 내리게 됐다.
책 속에서 ‘지존이라는 이름의 이야기’라는 소제목으로 당시를 회상한 고 과장은 지존파 두목인 김 씨가 했던 최후 법정진술을 언급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당시 김 씨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다. 학교에 미술도구를 챙겨가지 않으면 선생님이 때려서 훔쳐서 갔더니 때리지 않았다. 세상에서 배운 대로 살았을 뿐이다”고 말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고 과장은 지존파 사건을 가난에 찌든 젊은이들이 헤쳐갈 수 없는 현실적 불만을 범죄를 통해 보상 받으려 했던 사건으로 기억했다. 그리고 이들 일당의 원래 조직 이름이 ‘마스칸’(희랍어로 야망이라는 뜻)이었으나 수사 과정에서 당시 많이 읽히던 무협소설 속의 ‘지존’을 차용해 ‘지존파’로 부르게 됐다는 뒷이야기도 전했다.
고 과장은 이들 일당에 대한 안타까웠던 기억도 털어놓았는데 이들이 형사들이 배달시켜준 ‘잡탕밥’을 너무나 맛있게 먹으면서 “태어나서 처음 먹어봤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검거 당시 지존파의 아지트에 1억여 원의 돈이 쌓여 있었지만 이들은 잡탕밥 한 그릇 사먹지 않을 정도로 돈을 아꼈다는 것.
특히 아이러니한 부분은 지존파 일당 중 한 명이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 범행에 가담했다는 사실이었다. 고 과장은 당시 그의 얘기가 그냥 웃어넘기기엔 너무 진지했었다고 기억했다.
한편 고 과장은 지존파의 강령 중 ‘여자는 어머니도 믿지 말라’는 항목이 있었는데 결국 이 강령을 지키지 않아 지존파가 막을 내리게 된 셈이라고 밝혔다. 일당 중 한 명이 납치한 한 여성을 좋아했고 바로 그 여성이 탈출해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윤구 기자 trus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