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돌아올 거라던 가족들의 희망과는 달리 A 씨는 실종 1년 만에 처참하게 부패된 사체로 발견된다. 그것도 다른 동네 아파트 상가에 있는 낡은 폐수처리용 수조 안에서 말이다. 이번에 구리경찰서 수택지구대 원태연 형사가 전하는 사건이 바로 실종 1년 만에 사체로 발견된 한 주부의 죽음에 얽힌 비밀과 그것을 풀기까지 힘겨웠던 수사과정에 대한 것이다. 구리경찰서 강력반 근무 당시 이 사건을 담당했던 원 형사는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혔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패된 사체 앞에서 막막했던 기억이 난다. 사체와 함께 발견된 슬리퍼 한 짝을 유일한 단서로 삼아 용의자를 짚어내는 과정이 상당히 까다로웠다. 끈질긴 탐문수사 끝에 사체 발견 약 일주일 만에 검거한 범인은 강간을 목적으로 피해자에게 접근했던 이삿짐센터 직원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 살인까지 동반하게 되는 강간범죄의 위험성을 다시 한 번 일깨우고자 한다. 아울러 완전범죄란 없다는 사실도 재차 강조하고 싶다.”
먼저 원 형사가 전하는 사건 당시 상황을 들어보자.
“2004년 2월 21일 오후 3시 30분경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서 여성으로 짐작되는 사체가 발견됐다. A 씨가 실종된 지 1년 만이었다. 사체는 아파트 상가 지하에 있는 수조에 들어 있었는데 처음에는 이 사건이 A 씨의 실종과 연관돼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 부검 결과 사체의 신원이 확인되면서 그동안 미궁에 빠져있던 A 씨 실종사건은 일대 전환점을 맞게 된다.”
사체를 발견한 이는 하수도를 청소하던 한 인부였다. 사체는 발견 당시에도 물이 가득 찬 수조에 잠겨 있던 상태였다. 이어지는 원 형사의 얘기.
“정황상 분명 살인사건이었다. 가장 먼저 드는 의문은 누가 왜 A 씨를 살해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또 통상적인 사체 유기 방법과는 달리 수조에 사체를 넣어둔 이유도 미스터리였다. 게다가 수조 안에 유기됐던 A 씨가 무려 1년 동안이나 발견되지 않은 이유도 의문이었다. 그러나 세 번째 의문은 쉽게 풀렸다. 조사 결과 A 씨가 들어있던 수조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좀처럼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관리인의 말에 따르면 주민들은 수조가 있는 지하에 내려갈 일이 없을 뿐 아니라 굳이 닫혀 있는 수조를 열어볼 일은 더 더욱 없었다고 한다. 그 수조는 담당 인부가 1년에 한 번꼴로 청소하는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A 씨의 사체가 발견된 날은 정기적으로 행해지던 수조 청소날이었던 것이다.”
이제 풀어야 할 의문은 누가, 왜 A 씨를 살해했는가 하는 부분이었다. 1년여 전 A 씨가 실종된 그날 대체 그녀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현장에 남아 있는 단서는 단 하나, 수조 안에 사체와 함께 들어있던 낡은 슬리퍼 한 짝이었다. 다음은 원 형사의 설명.
“닫혀 있던 수조에 슬리퍼가 빠져 있던 점으로 보아 슬리퍼의 주인이 용의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슬리퍼 역시 오랜 시간 동안 물에 잠겨 있던 터라 슬리퍼 자체에서는 어떠한 범인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추적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나. 나는 A 씨의 사체가 유기됐던 수조가 좀처럼 일반인들의 발길이 닿지 않던 곳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이는 모르는 사람은 쉽게 찾아갈 수 없는 곳이라는 말이 아니겠나. 따라서 범인은 ‘현장 사정과 주변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사건 발생 이후 의심스런 행적을 보인 사람 중 수조에 대해 잘 알고 있을 법한 사람을 찾아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작은 단서라도 잡기 위해 수사팀은 현장을 다시 한 번 샅샅이 살피는 한편 주변 상인들과 주민들을 상대로 끈질긴 탐문수사에 들어갔다. 이어지는 원 형사의 얘기.
“탐문수사 중 당시 상가 지하에 입주해 있던 이삿짐센터가 A 씨의 사망추정일로부터 한 달 남짓 지난 시점에 돌연 문을 닫았다는 얘기를 듣게 됐다. 수사팀은 당시 그 이삿짐센터에서 근무했던 인부들의 명단을 모조리 뽑아 현재 행적을 수소문했다. 그리고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만나며 A 씨 사건과의 연관성을 짚어 나갔다. 누가 용의자로 떠오를지 모르는 상황이라 수사팀은 만나는 사람들의 발 사이즈와 수조에서 발견된 슬리퍼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용의선상에 올릴 만한 인물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사망 추정 시간도 불확실했을 뿐 아니라 사건이 발생한 지 1년이나 지난 터라 이삿짐센터 관계자들의 알리바이를 일일이 확인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수사팀은 결정적인 제보를 듣게 된다. 다음은 원 형사의 얘기.
“탐문 과정에서 만난 어떤 사람으로부터 조성혁(가명·당시 30세)이라는 인물에 대해 얘기를 듣게 됐다. 조성혁은 당시 그 이삿짐센터 직원이었는데 특정한 주거지가 없었던지 상가 지하에 마련된 이삿짐센터의 숙소에서 줄곧 숙식을 해결해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A 씨의 사망추정일로부터 약 1주일 후에 갑자기 이삿짐센터를 그만뒀다는 것이었다. 즉 조성혁은 이삿짐센터가 폐점하기 전에 돌연 일을 그만둔 것이었다. 당시 조성혁이 머물렀다는 이삿짐센터의 숙소는 A 씨가 발견된 수조와 불과 5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따라서 상가 지하에서 생활하던 조성혁은 아파트 주민이나 다른 상인들과는 달리 수조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수사팀은 즉시 조 씨를 찾아 나섰다. 이삿짐센터를 그만둔 뒤 행적이 묘연했던 조 씨는 구리시에서 20~30분 정도 떨어진 장현의 한 이삿짐센터에서 일하고 있었다. 조 씨는 지난해 인창동 이삿짐센터를 떠난 뒤 울산으로 내려가 한 공사 현장에서 일하다가 다시 이곳에 취업한 것으로 드러났다. 다음은 원 형사의 설명.
“사건 당일 행적 및 사건 발생 이후의 행적을 조사한 결과 조성혁은 유력한 용의자임에 틀림없었다. 또 수조에서 발견된 슬리퍼의 크기도 그의 발 사이즈와 일치하더라. 나는 조성혁을 경찰서로 불러들였다. 그는 펄쩍 뛰며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다. 그러나 당시 행적에 대한 진술서를 쓸 때마다 그의 말이 자꾸 바뀌는 게 아닌가. 사람이 진실을 얘기할 경우 백 번 천 번을 반복해도 동일한 진술이 나오게 마련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감추고 있거나 거짓말을 할 경우 진술은 매번 바뀔 수밖에 없다. 자기가 내뱉은 거짓말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게 되는 셈이다. 조성혁 역시 그랬다. 하지만 조성혁은 쉽게 자백을 할 기세가 아니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그의 눈앞에 현장에서 발견된 슬리퍼 한 짝을 조용히 들이밀었다. 그랬더니 갑자기 조성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게 아닌가. 슬리퍼를 쳐다보지도 못하더라. ‘자, 한번 신어봐라’라고 했는데도 시선을 피하며 기어코 안 신고 버티는 거다. ‘이거… 누구 것이냐’고 했더니 조성혁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죽은 사람을 생각해봐라. 죄를 지었으면 뒤늦게라도 자백을 하고 뉘우쳐야 하지 않겠나’라고 설득을 계속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참 후 조성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조 씨의 자백으로 A 씨 살인사건의 전모가 서서히 드러났다. 2003년 2월 24일 새벽 A 씨는 친구가 사는 인창동 아파트에 들렀다가 인근 호프집에서 술을 마시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A 씨는 술이 너무 취한 나머지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상태였다. 친구와 헤어진 뒤 잠시 쉬었다 가야겠다고 생각한 A 씨는 주변 아파트 상가 1층 계단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A 씨에게는 엄청난 불행의 시작이었다. 다음은 원 형사의 얘기.
“당시 그 상가 지하에는 이삿짐센터에서 일하던 조성혁이 살고 있었다. 이날따라 새벽까지 잠이 오지 않았던 그는 잠깐 바람이나 쐬고 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슬리퍼를 신고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1층 계단에 웬 여자가 스커트를 입고 술에 취한 채 앉아 있었다고 한다. 바로 A 씨였다. 미혼이었던 조성혁이 야심한 시각 홀로 계단에 앉아 있는 여자를 보곤 순간적으로 욕정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는 만취상태였던 A 씨가 방어능력이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성폭행하기로 마음먹게 된다. 조성혁은 부축해주겠다며 A 씨에게 접근했고 그녀를 자신이 머물던 지하 숙소로 끌고 갔다. 그리고 강제로 옷을 벗기고 몹쓸 짓을 벌이려고 했다는 거다. 그런데 의외로 A 씨가 소리를 지르며 강하게 반항했다고 한다. 당황한 조성혁은 A 씨의 입을 막고 목을 조르다가 급기야 당시 정육점 업주가 문을 닫으면서 가게에 두고 간 칼로 A 씨를 마구 찔러 살해하고 말았다.”
불과 몇 분 사이에 벌어진 살인이었다. 하지만 워낙 늦은 시간인지라 목격자가 있을 리 만무했다. 범행 후 A 씨의 사체를 유기할 방법을 생각하던 조 씨는 평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상가 수조를 생각해내게 된다. 경험상 주민들과 상인들은 폐수처리용 수조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또 누가 정기적으로 특별히 점검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을 훤히 알고 있던 조 씨에게 수조는 사체를 유기할 최적의 장소였던 셈이다. 자신이 머물던 숙소와 지척거리에 있는 수조에 A 씨의 사체를 유기한 조 씨는 살해과정에서 피범벅이 된 자신의 슬리퍼 한 짝도 수조 속에 던져버리고 뚜껑을 닫아버렸다.
원 형사는 살인사건이 1년여 동안이나 완전범죄로 묻혀지는 듯했지만 손에 피를 묻힌 ‘그날 새벽’의 일들은 악몽처럼 조 씨를 따라다녔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조사 과정에서 속속 밝혀지는 살인의 진실 앞에 조 씨는 뒤늦은 참회의 눈물을 쏟은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생면부지의 무고한 여성을 상대로 욕정을 해결한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살해하고 엽기적인 방법으로 사체를 유기했다는 점에서 그의 범행에는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는 게 원 형사의 얘기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