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지난 10월 17일 한 아무개 씨(55), 이 아무개 씨(54), 박 아무개 씨(48) 등 세 명을 도박 및 상습사기 혐의로 구속했다. 한 씨 등은 재력가들에게 접근한 뒤 자신의 실력을 감춘 채 서로 짜고 내기골프를 치는 수법으로 2억 4000여만 원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한 씨 등의 사기 골프로 인해 적잖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으나 한 명의 피해자만이 경찰에 신고했을 정도로 이들 일당의 사기 수법은 교묘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타짜의 노하우를 골프에 접목시킨 이들의 지능화된 사기 행각을 뒤쫓아가보았다.
지난 7월 말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지능 1팀 1반에 자신이 골프 사기를 당한 것 같다는 피해자 김 아무개 씨(40)의 신고가 접수됐다. 김 씨에 따르면 올해 6월 서울 용산의 모 골프장에서 만난 한 씨 등과 춘천의 한 골프장으로 라운딩을 하러 가 내기골프로만 1억 200만 원을 잃었는데 뭔가 수상하다는 것.
하지만 피해자 김 씨 말고는 다른 피해자들이 나타나지 않고 달리 정황증거도 없어 경찰이 곧바로 수사에 착수하기는 어려웠다. 이런 와중에 김 씨가 인터넷의 한 포털사이트에 자신의 피해 경험담을 올렸고 똑같은 사기 수법에 당했다는 또 다른 피해자가 등장하면서 마침내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됐다. 그로부터 3개월 뒤 경찰의 기나긴 추적 끝에 한 씨 등의 사기 골프 행각 전모가 드러나게 된다.
경찰에 따르면 피의자 한 씨 등은 과거 10년 동안 서울의 도박판 등지를 전전하면서 서로 알게 된 사이라고 한다. 이들은 포커판을 벌이거나 사설경마(일명 맞대기)를 운영하다가 상습도박죄로 여러 번 처벌받은 전력도 있었다. 특히 한 씨는 상습도박 혐의로 수배 중인 상태에서도 골프 사기 행각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도박판 타짜 생활을 하면서 경찰 단속에 자주 적발되자 한 씨 등은 다른 ‘블루오션’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다름 아닌 골프. 평소에도 골프를 자주 치던 한 씨가 경찰이 단속하기 어렵고 부자들이 많이 찾아오는 골프장을 새로운 활동 무대로 삼기로 한 것. 한 씨는 이 씨와 박 씨를 끌어들여 3년여에 걸쳐 맹훈련을 했고 결국 싱글 골퍼와 맞먹는 수준까지 실력을 끌어올리게 된다.
어느 정도 ‘내공’을 쌓은 한 씨 등은 서울시 안팎의 골프연습장을 돌며 부유해 보이는 이들 가운데서 범행대상을 물색했다. 일단 범행대상이 정해지면 한 씨 등은 서로 모르는 사람인 듯 행동하며 피해자에게 접근했다. 골퍼의 심리를 꿰뚫고 있던 이들은 “사장님, 스윙 자세 좀 나오시네요” 등의 칭찬을 하면서 피해자의 호감을 사고 관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 같은 사전 정지작업이 끝난 뒤엔 으레 한 씨가 “골프장 예약을 할 테니 같이 가자”고 피해자에게 제의를 했고 박 씨와 이 씨도 여기에 동조하는 방식으로 골프 팀을 구성했다.
경찰 관계자는 한 씨 등이 골프의 속성과 골퍼의 심리를 사기 골프에 적절히 활용했다고 말한다. 우선 골프는 혼자 할 수 없는 운동이기에 세 명이 짜고 한 명의 피해자를 만드는 것이 그만큼 쉬웠다. 특히 한 씨는 80타의 실력을 갖추고도 90타로, 이 씨는 72~79타 싱글 수준이지만 90타 보기 플레이어로, 박 씨는 95타의 수준이지만 100타가 넘는다고 피해자들을 속였다.
먼저 한 씨가 “그냥 치면 심심하니까 내기라도 하자”고 제의하면 이 씨와 박 씨가 바람을 잡아 피해자도 함께 참여하도록 만들었다. 처음에 1타당 1만 원으로 시작한 내기 골프는 어느새 1타당 최대 500만 원짜리 도박 골프로 변질되곤 했다. 한 씨 일당이 번갈아가며 고의로 돈을 잃은 뒤 “만회해야 한다”며 판돈을 계속 키웠기 때문이다. 이들은 초반에는 피해자에게 돈을 잃어주다가 후반에 피해자의 돈을 모두 ‘회수’하는 전형적인 타짜의 수법을 썼는데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일당 중 한 명도 피해자와 같이 돈을 잃도록 했다.
한 씨 등은 피해자의 돈을 빼내기 위해 기발한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라운딩하기 전에 일당 중 한 명이 피해자에게 수표 2000만~3000만 원 정도를 보여준 뒤 ‘거래처에 급하게 돈을 부쳐야 한다’며 ‘이 수표를 줄 테니 우선 텔레뱅킹으로 아무개 계좌에 돈을 좀 부쳐 달라’고 부탁했던 것. 대개의 경우 피해자는 수표를 확인한 결과 이상이 없으면 자신의 은행계좌에서 돈을 이체시키고 대신 수표를 받았다. 이런 까닭에 피해자가 주머니에 거액을 지닌 상태에서 내기 골프가 시작됐고 이 수표는 결국 내기에서 이긴 한 씨 등의 주머니로 다시 들어갔다.
더욱 황당한 것은 한 씨 일당이 피해자의 현금이 떨어질 경우 ‘돈 잃은 역할’을 맡았던 공범으로 하여금 돈을 빌려주며 “우리 이번엔 잘해보자”는 식으로 내기를 계속 부추겼다는 사실. 이 공범은 라운딩이 끝난 뒤 피해자에게 빌려준 돈을 빨리 갚으라고 요구했고 피해자에게 현금이 없을 경우엔 골프장 근처에서 신용카드로 장뇌삼과 노트북, 골프웨어 등을 사도록 한 뒤 현물을 받아 챙겼다. 경찰에 따르면 한 씨 등은 이 같은 수법으로 올해 5월부터 9차례 걸쳐 피해자들로부터 모두 2억 4000여만 원을 챙긴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이 이번 사건을 해결하는 데 3개월가량의 시일이 걸렸는데 그 이유는 한 씨 등이 대포폰과 대포차 등을 이용해 자신들의 신분을 속였기 때문이었다. 골프장에 기재된 이들의 이름과 인적사항들도 모두 거짓이었다. 이들이 라운딩 전에 피해자로부터 송금 받은 계좌 역시 차명계좌였다.
한 경찰 관계자는 “골프장 주변에서 사기행각을 모색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소문이 있으니 모르는 사람과는 라운딩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며 또 다른 골프사기에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
이윤구 기자 trus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