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씨의 현장검증 모습. 거짓말탐지기까지 무사통과했던 김 씨는 결국 범행을 자백하고 평생 속죄하며 살겠단 뜻을 밝혔다. | ||
경찰에 따르면 김 씨는 4년 전 대구 수성구의 한 미용실에서 주인 A 씨(여·당시 40세)를 주먹과 발 등으로 때려 실신시킨 뒤 목을 졸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당시 현장에 증거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미제사건으로 기록될 뻔했던 사건이 4년여가 지난 뒤 경찰의 끈질긴 수사로 인해 해결된 것이다.
사건을 담당한 김동욱 형사는 “피의자를 검거하고 자백을 받아내기까지의 과정이 한 편의 영화와 같았다”고 수사 과정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한 여인의 죽음에 얽힌 비밀이 4년여 만에 세상에 드러나게 된 과정을 뒤쫓아가봤다.
끔찍한 살인은 아주 사소한 일에서 비롯됐다. 2003년 6월 30일, 여름의 문턱을 넘어 후텁지근한 날씨가 계속되던 날이었다. 출장을 갔다 오느라 머리를 감지 못해 찝찝함을 느낀 피의자 김 씨는 평소 안면이 있던 A 씨의 미용실에 찾아갔다. 사채업을 하던 김 씨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200m쯤 떨어진 이 미용실을 몇 차례 이용했기 때문에 머리만 감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하지만 A 씨는 김 씨의 요구를 “첫손님인데 아침부터 재수 없게 머리만 감으려고 하느냐”고 힐난하며 무시했다. 이날 따라 A 씨가 남편과 전화로 부부싸움을 한 뒤 기분이 안 좋은 상태라서 A 씨의 어조는 더 신랄하고 퉁명스러웠다고 한다.
평소 왜소한 체격 때문에 콤플렉스가 있던 김 씨는 여자인 A 씨가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얘기를 하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순간적으로 A 씨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A 씨가 대들자 주먹과 발 등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연이은 폭력에 A 씨가 갑자기 의식을 잃자 김 씨는 당황하게 된다. 예전에도 폭력으로 불구속 입건돼 벌금 80만 원을 내고 합의금으로 몇 천만 원을 날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채업을 하면서 그나마 있던 재산도 거의 까먹은 김 씨. 자신의 얼굴을 아는 A 씨가 깨어나서 경찰에 신고하면 형사처벌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에 김 씨는 순간적으로 살인을 결심했다. 그는 실신한 A 씨를 방 안으로 옮긴 다음 머리 깎을 때 입는 앞치마 끈으로 A 씨의 목을 졸라 살해하고 도주했다.
사건 발생 후 경찰은 두 달 동안 여러 갈래로 수사를 벌였으나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 치정이나 원한 범죄로 볼 만한 정황도 없었고 현장에서 지문이나 머리카락 등 어떠한 직접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때 경찰은 피해자 A 씨와 사이가 원만치 않았던 남편을 주요 용의자로 보고 수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편에게선 아무런 의심할 만한 점이 드러나지 않았다.
사실 당시 피의자 김 씨도 용의선상에 올라 세 번이나 경찰의 조사를 받았지만 무사히 수사망을 피해간 것으로 밝혀졌다. 김 씨가 용의선상에 오른 이유는 사건 발생 전에 자신의 휴대폰으로 정 씨의 미용실로 전화를 건 사실 때문이었다. A 씨가 방에서 다른 이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을 때 김 씨가 사람이 있나 알아보기 위해 미용실로 전화를 걸었던 것.
하지만 단지 전화 한 통화만으로 살인범죄에 연루됐다고 보기 어려워 경찰은 김 씨를 상대로 거짓말탐지기 검사를 실시했다. 놀라운 것은 김 씨가 거짓말탐지기 검사 결과 ‘진실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이었다. 즉 검사 결과로는 살인과 무관한 것으로 추정됐던 것.
이와 관련해 경찰관계자는 거짓말탐지기 검사를 할 때 용의자에게 묻는 질문의 수위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4년이 지난 후 김 씨를 체포해 다시 거짓말탐지기 검사를 했을 때는 ‘거짓반응’이 나왔다고 한다.
당시 경찰의 수사 방향은 남편 혹은 머리를 깎으러온 사람 중 한 명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따라서 머리도 깎지 않고 전화통화만 시도한 김 씨에게는 치밀한 질문을 하지 못했던 것. 이러한 실수로 인해 김 씨가 거짓말탐지기 ‘관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수사는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경찰 수사에서도 자신의 살인행각이 밝혀지지 않자 김 씨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감’이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사건 발생 두 달 후 “A 씨의 남편이 살인사건 범인으로 구속됐다”는 헛소문을 들은 뒤부터는 아예 자신이 살인을 했다는 생각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고 한다.
사실 살인을 저지른 뒤 두 달 정도는 김 씨도 심적으로 많은 갈등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외국으로 도망갈까’ ‘아니 자수를 할까’ 고민을 했지만 거짓말탐지기 검사도 통과하고 A 씨 남편이 구속됐다는 헛소문까지 듣자 안심하고 생활했던 것이다. 이후 김 씨는 사채사무실을 정리하고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 사행성 PC방을 운영했다. 살인을 저지르고 도피를 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자칫 미제사건으로 남을 뻔했던 사건이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은 그로부터 4년이 지난 뒤였다. 지난 8월 초 대구 북부경찰서 TSI팀이 절도 등 범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던 중 한 정보원으로부터 ‘4년 전 김 씨가 미용실 여주인을 살해했다는 이야기를 술자리에서 들은 적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게 됐다. 떠다니는 많은 정보 중에는 거짓 정보도 많기에 우선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작업부터 시작됐다. TSI팀 관계자는 “사건 관할 경찰서에 사실을 확인한 결과 내가 정보원한테 들은 내용과 당시 사건이 아주 흡사했다”며 “담당 형사만이 알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까지 일치해 수사에 착수하게 됐다”고 밝혔다.
먼저 TSI팀은 미용실 근처 사채업체들을 조사하고 김 씨의 가족 관계부터 평소 성향, 행동거지 등에 대해 다각적인 수사를 벌였다. 그 결과 혐의점이 어느 정도 확인되자 팀원들이 김 씨의 소재 파악에 나섰다. 하지만 김 씨는 당시 교도소에서 복역하던 처지로 11월 4일 출소할 예정이었다. 지난해 ‘바다이야기’ 파문 와중에 도박개장(사행성 PC방 운영)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아 수감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
TSI팀은 일단 김 씨가 출소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직접 증거가 없는 상황이라 피의자의 진술만이 유일한 증거인데 김 씨가 미리 선수를 쳐서 범행 자체를 부인하면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교도소 안에서 피의자들이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처벌을 피하는 방법 등에 대해 다른 수감자들에게 배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마침내 11월 4일. 팀원들은 이날 새벽 출소하던 김 씨를 대구교도소 앞에서 긴급체포했다. 그뒤 제보자의 진술과 ‘거짓반응’이 나온 거짓말탐지기 검사결과 등을 토대로 김 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그러나 김 씨가 혐의에 대해 무조건 모르쇠로 일관하는데다 직접적인 증거도 없어 영장은 기각됐고 결국 그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TSI팀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살인에 대한 김 씨의 ‘취중 진담’을 직접 들은 또 다른 증인의 진술을 확보해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마침내 영장이 발부됐다. 하지만 출소 후 김 씨는 일정한 주거지도 휴대폰도 없는 상태였다. 팀원들은 김 씨 부인의 휴대폰을 추적하는 등 3일간 잠복한 끝에 11월 8일 오후 4시경 부인이 거주하는 원룸에 나타난 김 씨를 체포할 수 있었다.
김 씨는 두 번째 체포를 당한 뒤에도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하지만 제보자들의 진술 등을 바탕으로 팀원들이 끈질기게 추궁하자 결국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담당형사가 “죽은 사람 영혼이 아직도 구천에서 떠돌고 있다. 당신은 호의호식하고 살지는 몰라도 죄를 지은 사람은 반드시 업보를 받는다”면서 “자식에게 당신의 업보가 갈 수도 있는데 그것은 피해야 하지 않느냐”고 설득하자 김 씨가 울면서 자백하기 시작했다는 것.
당시 김 씨는 “이제 털어놓으니 마음이 편하다. 감옥에서 얼마를 살든지 받아들이겠다”며 “죽은 사람에게 정말 미안하다. 복역 후 평생 고인에게 잘못을 빌면서 살겠다”고 심경을 털어놓기도 했다고 한다.
이윤구 기자 trus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