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용의자에 대한 추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한 경찰관의 집념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살인을 저지르고 12년 동안이나 전국을 떠돌며 도피생활을 하던 피의자가 최근 경찰에 덜미를 잡힌 것.
지난달 23일 경기도 고양경찰서는 지난 1995년 일어난 ‘고양 내연녀 살인사건’의 피의자 김 아무개 씨(66)를 12년 만에 붙잡아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김 씨는 1995년 10월 17일 오전 10시 30분경 경기도 고양시의 한 여관방에서 내연 관계에 있던 여관 종업원 A 씨(여·당시 68세)를 흉기로 목을 찔러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공소시효가 3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자칫 미제사건으로 끝날 뻔했던 사건을 해결한 주인공은 고양경찰서 과학수사팀 윤광상 형사(45). 피의자 김 씨의 기나긴 도피생활과 그 시간만큼이나 김 씨를 끈질기게 쫓아다닌 윤 형사의 극적인 검거과정을 뒤쫓아가봤다.
사건은 1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양시의 한 여관방에서 장기 투숙을 하며 일산 신도시 공사현장에서 잡부로 일하던 김 씨는 자신보다 14세 연상인 여관 종업원 A 씨와 내연관계를 맺게 된다. 얼마 뒤 김 씨는 A 씨에게 동거를 하자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A 씨는 그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김 씨는 이에 앙심을 품고 살해 계획을 세운다. 범행 기회를 노리던 김 씨는 1995년 10월 17일, 여관 2층으로 혼자 객실 청소를 하러 가던 A 씨를 뒤따라가 미리 준비한 흉기로 A 씨의 목을 찔러 살해했다. 범행을 저지른 김 씨는 비어 있던 옆방으로 들어가 자신이 입고 있던 피 묻은 잠바를 벗어 던지고 손을 씻은 뒤 곧바로 도주해 버렸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현장 조사 결과 사건 현장 옆방에서 피 묻은 잠바를 발견했다. 잠바 안주머니에서 김 씨의 도장이 나오고 피해자의 사체에서 김 씨의 정액이 검출되자 경찰은 유력한 용의자로 김 씨를 지목하고 신병확보에 나섰다.
하지만 경찰은 떠돌이 생활을 하던 김 씨를 추적하는 데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다. 전국에 지명수배를 하고 1996년 8월 SBS <추적 사건과 사람들>과 1997년 10월 MBC <경찰청사람들> 등 방송을 통해 김 씨를 공개 수배 했지만 수사에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경찰은 전국에 1만여 장의 수배전단지를 배포하고 다각적인 수사를 계속 벌였으나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다.
경찰관계자에 따르면 일반적으론 과거 행적에 대한 수사로 피의자의 행동반경을 추측할 수 있지만 김 씨의 경우엔 고향의 가족이나 친지들과 왕래가 전혀 없어 수사가 힘들었다고 한다. 김 씨의 고향집에 형이 한 명 살고 있었지만 오래전부터 김 씨와 연락이 두절된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는 것. 또한 김 씨가 어렸을 때부터 집을 나와 외톨이 생활을 계속해 주변에 김 씨를 아는 사람도 없는 상태였다. 이런 가운데 도피생활을 이어가던 김 씨의 주민등록이 경기도 평택에서 말소되고 만다. 범인을 추적할 유일한 단서마저 사라지면서 사건은 장기 미제사건으로 남게 됐다.
김 씨의 12년간의 도피생활은 한마디로 외로운 떠돌이 생활이었다. 김 씨는 주로 숙식을 제공하는 농장이나 양계장, 부화장 등에서 2~3개월 단위로 머물며 일하는 식으로 전국을 떠돌아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일까. 그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 중에서 김 씨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김 씨는 자신이 머물던 각 지역에서 10세 이상의 연상의 여자들과 동거를 하기도 했다.
▲ 12년 만에 검거된 피의자 김 씨가 조사를 받고 있다. SBS 화면 캡처 | ||
윤 형사는 피의자 김 씨의 사진을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사건을 잊지 않으려고 애썼다고 한다. 김 씨의 주민등록 상태를 정기적으로 체크하고 휴가나 비번일 때도 되도록이면 김 씨의 고향 쪽으로 가서 주변을 탐문하기도 했다.
윤 형사의 끈질긴 노력이 마침내 12년 만에 빛을 보기 시작했다. 오랜 도피생활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김 씨가 주위 사람들로부터 ‘주민등록증만 있으면 생활이 어려운 이들에게 나라에서 돈을 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2007년 9월 27일 ‘기초생활보장수급자생계비’(기초생계비)를 받기 위해 충남 천안에서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은 사실이 확인된 것.
윤 형사는 동료 형사들과 함께 김 씨의 주민등록상의 주소지인 천안시 외곽의 이른바 ‘쪽방집’ 인근에서 잠복에 들어갔다. 김 씨가 등록한 주소지는 6세대 정도가 모여 사는 집이었다. 수사팀은 직접 탐문수사를 하려고 했지만 누가 김 씨와 연계돼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움직이면 김 씨가 도망갈 것을 우려해 무기한 잠복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김 씨는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용의주도한 김 씨가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자신과 상관없는 이웃 동네의 주소지를 주민등록주소지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0년이 넘도록 김 씨의 행적을 쫓았던 윤 형사에게 이 정도의 난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수사팀은 주민등록주소지인 쪽방집이 김 씨와 관련이 없음을 파악하고 차츰 그 주변으로 범위를 넓혀가며 탐문수사를 벌였다. 김 씨가 기초생계비를 신청한 이상 비록 실제 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행동반경 안에 주민등록주소지를 뒀을 것으로 추정했던 것. 이러한 수사팀의 판단이 적중해 주민등록지인 쪽방집의 옆 동네에서 살고 있던 김 씨를 지난 11월 21일 검거할 수 있었다.
김 씨는 경찰 조사과정에서 “12년의 도피생활 동안 고생을 많이 했다. 형사들도 고생을 많이 했을 것”이라면서 “이제는 팔과 다리에 힘도 없다”고 자포자기의 심정을 드러냈다고 한다. 사건을 해결한 윤 형사는 “다른 큰 사건들을 해결하면서도 미제 사건으로 남은 이번 사건이 항상 마음에 남아 다른 부서로 발령난 뒤에도 계속 행방을 좇았다”고 밝혔다.
윤 형사는 과학수사팀에 근무하면서 OHP필름을 이용한 새로운 지문 채취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신원 파악을 보다 용이하게 해주는 이 기법 덕분에 얼마 전엔 20년 전 실종됐던 한 정신지체 장애인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윤구 기자 trus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