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튀기는 보복과 가혹한 응징이 난무하는 조직세계의 얘기도, 어둠의 세계를 그린 느와르 영화의 시나리오도 아니다. 법보다 주먹을 앞세워 동업자를 ‘응징’한 어느 재벌 2세의 실제 이야기다.
신년벽두부터 폭력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재벌 2세의 도덕불감증이 도마에 올랐다. 지난해 아들을 위해 주먹을 휘둘러 사회를 공분케 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보복폭행 사건에 이어 재벌에 의한 폭행사건이 또다시 발생해 충격을 주고 있는 것.
채권·채무관계 및 사업상 갈등으로 빚어지는 각종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지만 유독 이 사건이 대대적으로 회자되는 이유는 사건의 장본인이 재벌 2세이기 때문이다. 당사자는 바로 국내 유명 제화업체 창업주의 차남 이 아무개 씨(47). 지난해 11월 13일 피해자 박 아무개 씨(42)로부터 피해 신고를 받고 수사에 착수한 서울 중부경찰서는 지난 3일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자택에서 이 씨를 강도상해 혐의로 체포했다.
경찰에 따르면 당시 컴퓨터 부품 개발과 관련된 벤처회사를 운영하고 있던 이 씨는 투자금을 회수하려는 목적으로 지난해 11월 8일 박 씨를 경기도 유명산의 한 펜션으로 유인해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 씨는 사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마치 영화에서나 나옴직한 잔혹한 방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을 주고 있다. 이 씨는 폭력배로 추정되는 두 명의 남성까지 동원해 이들로 하여금 각목 등을 사용해 가혹한 폭력을 행사하게 하고 심지어 물고문까지 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경찰에 따르면 두 사람의 ‘악연’은 지난 2004년 ‘야간 적외선 감지기 카메라’ 개발을 위해 동업자 관계를 맺게 되면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이 씨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박 씨에게 사업비와 사무실 운영비 등으로 총 17억 원을 투자했다. 하지만 신기술 개발은 생각처럼 신통치 않았고 개발 시기도 당초 계획보다 많이 늦어졌다.
이 씨로부터 거액을 지원 받은 박 씨가 기기를 개발한 것은 지난해 7월경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외국에서 같은 기능의 제품이 먼저 시판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이 씨는 박 씨가 오랜 시간을 들여 개발했다는 기술 역시 독자적인 신기술이 아니라 중국의 유사한 제품을 모방한 것과 별 다를 바 없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독자적인 기술을 개발해 시장을 독점할 경우 상당한 사업이익을 거둘 것으로 예상했던 이 씨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이 씨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박 씨를 믿고 거액을 투자했음에도 독자 기술 개발에 실패하고 사업성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이 씨는 박 씨에게 철저하게 속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급기야 이 씨는 박 씨에게 투자금을 돌려받아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하지만 박 씨가 순순히 투자금을 돌려줄 리 만무했다. 투자금과 손실금액을 회수하기 위해 이 씨는 자신의 회사 직원을 시켜 박 씨의 자산은 물론 처가의 재산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지를 조사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박 씨 개인은 투자금을 변제할 능력이 없었던 것.
하지만 별 성과도 없이 날려버린 투자금을 돌려받아야겠다는 이 씨의 생각은 확고했다. 그리고 급기야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투자금을 회수할 생각을 하게 된다. 이에 이 씨는 사건 당일 오후 ‘일본에서 바이어가 왔는데 같이 만나자’며 경기도 가평의 한 펜션으로 박 씨를 유인했다. 그리고 그곳에 미리 대기해 있던 신원 미상의 남성 두 명으로 하여금 박 씨를 무자비하게 폭행, 갈비뼈 4대를 부러뜨리는 등 전치 5주의 상해를 가하게 했다.
경찰은 피해자 박 씨가 현장에 이 씨 외에도 폭력배로 보이는 남성 2명이 함께 있었다고 진술함에 따라 범행에 가담한 이들의 소재를 파악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김승연 회장의 사건에서도 일부 드러났듯이 서로의 이해관계로 얽히고설킨 재벌-조폭 간 은밀한 거래에 대해서도 적잖은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선 경찰은 이들 2명이 조직폭력배인지 아니면 심부름센터 등에서 고용한 단순 폭력 가담자인지를 밝히는 동시에 폭행을 대가로 이 씨와 이들 사이에 금품이 오갔는지 여부도 조사할 계획이다. 만에 하나 현장에 동원된 남성 2명이 폭력조직과 연관이 있고 이 씨와 이들 사이에 ‘목적달성’을 빌미로 거액이 오갔다면 파문은 더 확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편 이번 사건의 피해자 박 씨를 둘러싼 의문도 풀리지 않고 있다. 경찰이 박 씨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사건의 전말도 일정 부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실제로 이 씨 측에서는 폭행을 한 것은 인정하면서도 일이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박 씨 측의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 씨의 대리인 권 아무개 변호사는 “박 씨가 2006년 초 의뢰인(이 씨)의 회사로 들어와 급여와 기술 개발비, 서버 구축비 명목으로 수억 원을 받아갔지만 이후 모 회사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는 과정에서 박 씨의 기술에 새로운 내용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박 씨가 지난 2005년 ‘야간 적외선카메라와 데이터 압축에 대한 원천기술을 보유했다’고 접근해 기술이전료 8억 원을 포함해 20여억 원을 투자했지만 원천기술 주장은 모두 거짓말이었다는 것이 이 씨 측의 주장이다. 즉 폭행 사건을 제외하면 이 씨는 박 씨의 기술사기로 인해 막대한 손해를 본 피해자이기도 하다는 얘기다. 이 씨 측은 박 씨를 상대로 지금까지 입은 손해에 대해 사기혐의로 고소하는 것도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반면 박 씨는 기술 개발에 매달렸지만 개발 시기가 늦어졌을 뿐이라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진다. 애초부터 이 씨를 속일 의도는 전혀 없었다는 주장인 셈이다. 경찰이 신변 보호를 이유로 박 씨의 신원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아 박 씨 측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이뤄지지 않았다.
과연 박 씨가 선의의 피해자인지 아니면 이 씨 측 주장처럼 사기 의도를 갖고 이 씨에게 접근했는지는 아직 불분명한 상황. 폭행의 불씨가 된 사건의 진상이 밝혀질 경우 향후 재판과정에서 또 다른 변수로 작용하게 될 전망이다.
그러나 설사 박 씨가 사업성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씨를 속이고 투자금 명목으로 거액을 받아냈다 해도 이 씨가 ‘주먹’으로 사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은 엄연한 불법이라는 점에서 법의 관용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씨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 누구보다 공익성과 도덕성이 요구되는 재벌가의 사람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