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 10일 A 씨(43)는 몇 시간째 전화통을 붙들고 안절부절못했다.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에 살고 있는 어머니 박말자 씨(가명·당시 69세)와 하루종일 연락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가해 따로 살고 있긴 했지만 고령의 어머니와 매일 한 번씩은 안부를 주고받던 차였다. 그러나 웬일인지 이날 박 노인에게서는 아무 연락도 없었고 일체 전화도 받지 않았다. 큰아들인 A 씨는 혼자 살고 있는 어머니 걱정에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연락이 되지 않자 A 씨는 불안해졌다. 기다리다 못한 A 씨는 급기야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종일 연락이 닿지 않던 노파는 처참한 주검으로 큰아들에 의해 발견된다.
이번에 성남수정경찰서 강력3팀 문래식 팀장이 전하는 사건은 지난해 초 성남에서 발생한 ‘태평동 노파 살인사건’이다. 당시 이 사건은 정신이상자의 소행을 방불케할 정도로 범행수법이 잔혹한 데다가 사체 일부를 도려내는 엽기행각으로 인해 수사팀은 물론 세간에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당시 이 사건을 담당한 문 팀장은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혔다. “수사 결과 밝혀진 범인은 피살자의 지하방에 세들어 살고 있던 40대 남성이었다. 힘없는 노인을 살해한 이유가 ‘자신을 무시해서’였다는데 그래서 더욱 기가 막혔던 사건이 아니었나 싶다. 별별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요즘이지만, 정말 세상이 무섭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사람 목숨이 너무도 하찮게 여겨지는 요즘 사소한 이유로 발생하는 각종 강력범죄들에 경종을 울리고자 이 사건을 소개한다.”
우선 당시 상황에 대한 문 팀장의 얘기를 들어보자.
“A 씨가 다급하게 어머니를 부르며 들어갔는데 집안에서는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어머니를 찾아 집안 곳곳을 살펴보던 A 씨는 잠시 후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작은방에 어머니가 피투성이 상태로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흉기에 찔려 살해된 박 노파는 발견 당시 반듯하게 눕혀져 있었는데 온 몸에 심하게 구타당한 흔적이 역력했다. 또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범인은 박 노파의 목에 과도를 그대로 꽂아두고 달아났더라.”
사건 현장에 도착한 수사팀이 보기에 이는 분명 계획적인 잔혹한 살인사건이었다. 혼자 사는 노인의 집에 침입해 이처럼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수사팀이 용의자를 압축하기 위해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범인의 범행동기였다. 일흔을 앞둔 나약한 노인을 이렇게 죽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박 노인은 자녀들을 자수성가시키고 다세대주택에서 홀로 살아오던 그저 평범한 노인이었다. 일흔의 노인이 큰돈이 있었을 리도 만무했거니와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만한 성품도 아니었다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말이었다.
하지만 당시 현장과 사체를 면밀히 살펴본 문 팀장은 ‘원한’에 의한 살인사건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다음은 문 팀장의 얘기.
“단순 강도살인으로 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장롱 문이 열려 있고 집안 곳곳에 뒤진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돈을 노리고 침입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볼 수도 있었지만 정작 없어진 금품이 없었다. 하지만 수사팀을 더욱 경악하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범인이 박 노인의 유두까지 도려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강간을 목적으로 한 범행이었을까. 최근 어린 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물불 가리지 않고 범행을 저지르는 성범죄자들이 많다는 점을 알고 있는 수사팀은 엽기 강간범의 소행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특히 강간 범죄의 특성상 살인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하지만 정작 박 노인에게서는 성폭행당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수사팀은 노인의 신체부위를 도려낸 엽기행각으로 볼 때 정신이상자의 소행일 가능성에도 주목했다. 만약 신원 및 주거가 불분명한 정신이상자의 소행이라면 범행의 이렇다 할 특정 동기 또한 없을 가능성이 높았고 그만큼 사건해결에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 분명했기에 수사팀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살인사건은 사건이 발생한 후 최단기간 내에 용의자를 압축하는 것이 빠른 사건해결의 관건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정신이상자의 단순범행으로 보기에는 범행수법이 너무 잔악했다는 것이 문 팀장의 얘기다. 힘없는 일흔 노인을 무지막지하게 구타한 것도 그렇고 급소부위를 찔러 살해한 것도 그랬다는 것. 또 흉기를 목에 그대로 꽂아둔 것이나 유두까지 도려낸 것으로 볼 때 이는 박 노인에게 앙심을 품은 인물일 가능성이 높았다는 것이 당시 수사팀의 판단이었다.
“일단 박 노인을 알고 있는 인물일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수사팀은 피살된 박 노인의 주변인물들을 상대로 탐문 조사를 실시했다.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박 노인이 거주하고 있던 다세대 주택에 살고 있던 세입자들이었다. 당시 박 노인의 다세대 주택에는 반지하와 1층, 2층을 합해 총 7가구가 살고 있었다. 수사팀은 세입자들의 양해를 구한 뒤 한 명 한 명 일일이 조사를 실시했다. 하지만 모든 세입자들은 사건이 발생한 시각 확실한 알리바이를 갖고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다세대 주택에서 발생한 끔찍한 살인사건. 세입자들은 물론 온 동네사람들은 난생 처음 겪어보는 살인의 공포에 떨어야했다.
하지만 수사팀이 조사하지 못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바로 반지하 방에 세들어 살고 있던 고병만 씨(가명·48)였다. 당시 수사팀은 모든 세입자들을 상대로 일제 면밀 조사를 실시했는데 고 씨는 무슨 일인지 사건발생 이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수사팀이 세입자들을 상대로 일제 조사를 실시하던 그날에도 고 씨는 집을 비워 접촉이 어려운 상태였다.
이혼한 뒤 혼자 살고 있던 고 씨는 특정한 직업이 없이 이따금 막노동판을 전전하는 인물이었다. 세입자들 간에 긴밀한 교류도 없었던 고 씨는 주변에서 그다지 나쁜 평판을 받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세입자에 불과했지만 다른 세입자들과 마찬가지로 고 씨 역시 조사에 예외일 수는 없었다. 수사팀은 고 씨를 예의주시하기 시작했고 얼마 후 고 씨와 접촉, 조사를 실시했다. 다음은 문 팀장의 얘기.
“고병만은 박 노인이 피살된 사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태도였다. 사건 당일 행적을 물었더니 고병만은 집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 후의 행적에 대한 질문에 고 씨는 잠에서 깬 후 은평구의 한 동네에 가서 술을 먹었다고 진술했다. 사건 관련성에 대해 질문을 하면 고 씨는 오히려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펄펄 뛰더라. 심지어 고병만은 사건 당일 박 노인을 만났던 정황까지 자세히 진술해가며 자신의 범행 가능성을 부인했다. 사건 당일 오전 가스요금을 주기 위해 박 노인의 집에 가서 커피까지 얻어 마시고 돌아왔으며 그 후에는 박 노인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 고 씨의 주장이었다.”
확인 결과 실제로 박 노인의 집에는 누군가 마시고 간 커피잔이 있었으며 컵에서는 고 씨의 타액이 검출됐다. 그리고 고 씨가 실제로 사건 당일 저녁 은평구의 한 술집에서 술을 마신 것도 확인됐다. 하지만 수사팀은 오히려 고 씨를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게 된다.
이어지는 문 팀장의 얘기.
“고병만이 진술한 사건당일 행적을 면밀히 추적해봤다. 기지국에 남아있는 자료를 토대로 살펴보니 딱 1시간 15분의 공백이 있더라. 그 시간동안의 행적을 묻는 수사팀의 질문에 고 씨는 우물쭈물하며 알리바이를 증명해내지 못했다. 특히 감식 결과 고병만의 입에서 채취한 구강 상피 DNA는 테이블에 떨어뜨리고 간 박 노인의 유두 및 노인의 몸에 묻어있던 타액과도 정확히 일치했다. 이는 고병만이 사건의 범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빼도박도 못할 증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완강히 범행사실을 부인하던 고 씨는 수사팀이 수집한 증거들을 들이대며 추궁하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구강 상피 DNA가 일치한다는 결과를 들이밀자 고 씨는 이내 고개를 떨궜다.
그렇다면 고 씨는 왜 박 노인을 그토록 끔찍하게 살해한 것일까. 조사 결과 폭력전과 4범이었던 고 씨의 범행은 애초 수사팀의 예상대로 박 노인을 향한 앙심에서 이뤄진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고 씨의 입에서 나온 살해동기는 사람을 잔혹하게 죽이기에는 너무 ‘하찮은’ 것이어서 수사팀원들을 또 한번 놀라게 했다. 다음은 문 팀장의 얘기.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무시해서 그랬습니다’라고 하는 거다. 사건 당일 박 노인이 고 씨에게 좀 싫은 소리를 했나 보더라. ‘술 먹고 들어왔으면 조용히 있을 것이지 왜 그렇게 쿵쿵거리며 시끄럽게 구느냐’며 뭐라고 했던가 보다. 고병만에 따르면 박 노인은 심한 욕을 하며 자신을 무시하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열심히 살 것이지 만날 술 먹고 빈둥거리느냐. 정부 보조금 받고 셋방살이 하는 주제에…’ 뭐 그런 식으로 면박을 줬다고 한다.”
박 노인에게 ‘한 소리’를 들은 고 씨는 잔뜩 불편한 심기를 갖고 자신의 지하방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분이 차올랐다. 아무리 지하방에 세들어 살고 있는 신세라고는 하지만 집주인에게 그렇게 모욕적인 대우를 받는다는 게 견딜 수 없었다. 방안에서 한참을 씩씩거리던 고 씨는 급기야 다시 박 노인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이어지는 문 팀장의 얘기.
“생각할수록 분했다는 거다. 박 노인이 한심하고 경멸스럽다는 눈빛으로 퍼부은 모욕을 참을 수 없었다고 하더라. 아무리해도 화가 안 풀리니까 자기 딴에는 따지러 다시 올라갔다고 한다. 그러나 박 노인이 ‘네 까짓게 뭔데 따지긴 따지냐’며 무시하는 발언을 계속 하자 고 씨의 분노는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던 것 같다. 더구나 고병만은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었다. 고 씨에 따르면 박 노인이 자신의 신체적인 결함을 가지고도 모욕적인 언행을 퍼부었다고 하더라. 자신의 신세에 대한 자격지심도 있던 차에 신체적인 결함까지 거론하니까 눈이 확 돌아버렸다는 게 고 씨의 진술이었다.”
오히려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인 격이 아닐 수 없었다. 박 노인에게 따지고 들던 고 씨는 분을 참지 못해 주먹을 휘둘렀고 그것은 결국 무지막지한 구타로 이어지고 만다. 그리고 급기야 집안에 있던 흉기로 박 노인을 찔러 무참히 살해하고 만다. 그리고 강도나 성폭행을 목적으로 한 범행으로 위장하기 위해 집안을 뒤진 흔적을 남기는 동시에 유두까지 도려낸 것으로 드러났다.
수사팀은 21일 새벽 3시경 살인혐의로 고 씨를 긴급체포, 구속영장을 신청하는 것으로 사건을 매듭지었다. 사건발생 꼭 열흘만이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