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은 기사내 특정사실과 관련없음. | ||
지난 2007년 1월 13일 오후 8시 20분경 성남시 중원구 중동의 한 여인숙에 20대 청년 두 명이 들어왔다. 당시 여인숙은 업주 한순자 씨(가명·67)와 아들의 애인 김자영 씨(가명·30)가 지키고 있었다. 이들은 업소를 지키고 있던 두 여성을 유심히 쳐다보다가 대뜸 “여자 있죠? 여자 좀 불러줘요”라고 주문했다. 불량스러운 차림새나 껄렁껄렁한 말투 등으로 보아 그다지 질 좋은 손님이 아니라고 판단한 업주 한 씨는 처음부터 낯선 청년들의 방문이 불안했다. 더구나 들어서자마자 노골적으로 성매매 낌새를 드러내니 업주로서는 반가울 리 없었다. 잘 달래서 돌려보낼 생각에 한 씨는 “여기는 여자 불러주는 집이 아니에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들은 갑자기 한 씨와 김 씨가 있는 내실로 쳐들어 왔고 두 여성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지막지하게 주먹을 휘두르던 이들은 내실 주방에 있던 식칼로 항거불능 상태에 있는 두 사람을 무참히 찌르고 달아났다.
이번에 성남중원경찰서 폭력3팀 원종필 형사가 전하는 사건이 바로 지난해 초 성남 일대를 들끓게 만들었던 일명 ‘중동 L 여인숙 살인사건’이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원 형사는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혔다. “범인을 특징지을 수 없는 막막한 상황에서 끈질긴 탐문수사로 해결한 사건이었다. 밤낮으로 뛰어다닌 팀원들이 아니었더라면 범인들이 ‘앵벌이’라는 특수한 집단에 소속된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없었을 테고 그들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아지트를 급습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무고한 사람을 상대로 한 이런 잔악한 범행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난 13일간의 급박했던 수사기록에 대해 얘기해 볼까 한다.”
우선 당시 상황에 대한 원 형사의 얘기부터 들어보자.
“신고를 한 사람은 업주 한 씨의 아들이었다. 외출했다가 여인숙으로 돌아온 업주 아들은 눈 앞에 벌어진 광경에 까무라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와 결혼을 약속한 애인이 피투성이가 돼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등과 목, 얼굴 등 온 몸을 10여 군데가 넘게 찔린 상태였는데 범인들이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찔러댔는지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내실 안은 그야말로 온통 피바다였다. 다행히 그때까지 숨이 붙어있었던 업주 한 노인은 급히 응급실로 후송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옆구리와 복부에 깊은 자상을 입은 김 씨는 복부대경정맥 파열 등으로 범행 직후 숨이 멎은 후였다.”
토요일 밤 벌어진 끔찍한 살인사건으로 인해 중동 일대는 발칵 뒤집혔다. 도대체 나약한 여성을 상대로 이런 잔악한 범행을 저지른 이들은 누구일까.
“간신히 생명을 건진 한 노인은 ‘업소에 들어온 청년 두 명에게 급작스레 변을 당했다’고 진술했다. 이것이 유일한 단서였다. 하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신분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특히 한 노인은 범인들이 휘두른 흉기에 찔러 중상을 입은 데다가 정신적으로도 워낙 큰 충격을 받은 터였다. 따라서 범인들의 외모나 인상착의를 자세히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사건에 대한 정확한 진술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현장을 면밀히 둘러 본 수사팀은 우선 전형적인 강도살인사건으로 가닥을 잡았다. 일부러 여자들만 지키고 있는 허름한 여인숙에 손님을 가장해 침입, 범행을 저지른 사건이라는 것이 수사팀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수사팀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추측일 뿐 단정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원 형사의 얘기를 계속 들어보자.
“혹시나 원한에 의한 범행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수사방향에 혼선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범인들의 범행수법이 너무도 잔악했기 때문이었다. 피해자들은 온 몸을 난자당해 그야말로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한 상태였다. 범인은 젊은 여성인 김자영 씨는 물론 일흔을 바라보는 노인에게까지 무지막지한 폭행을 휘둘렀다. 또 심한 폭행으로 반 기절상태에 있는 피해자들을 상대로 불필요한 칼부림까지 하는 잔악함을 드러냈다. 가까스로 의식을 되찾은 한 씨에 따르면 당시 김자영 씨는 ‘뭐든 시키는대로 하겠다. 돈도 줄테니 제발 살려만 달라’고 그렇게 빌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범인들은 살려달라고 울면서 매달리는 김 씨에게 흉기를 휘둘렀다고 한다. 하지만 범행 후 이들이 가져간 돈은 겨우 60만 원에 불과했다.”
범행수법이 잔혹하다는 점과 살인까지 해가면서 강취한 돈이 수십만 원에 불과하다는 점은 안면이 있는 사람이 원한을 갖고 저지른 범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조사 결과 피해자들은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일이 한 적이 없었으며 한 씨 역시 범인들을 알지 못했다.
사건이 장기화될 것을 우려한 경찰은 경기청 과학수사팀을 포함해 수십명의 형사들을 비상소집, 목격자를 찾는 동시에 사건 현장 주변에 대한 탐문수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유유히 달아난 범인들의 행적은 오리무중이었다. 이에 대해 원 형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초기에 수사가 별 진전을 보지 못했던 이유는 용의자를 특징지을 만한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원한에 의한 범행일 경우 차라리 수사가 쉬울 수 있다. 원한에 의한 범행이라면 안면이 있는 인물에 의해 발생하기 마련이기에 피해자의 주변인물만 잘 훑어도 용의자를 상당부분 압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 L 여인숙에 침입한 20대 청년들을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범인이 이마에 범인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사건 발생지역 일대를 주 무대로 생활한다는 보장도 없고…. 특히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피해자 한 씨가 범인들의 얼굴이나 자세히 볼 수 있었겠나.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우리는 신원조차 불분명한 낯선 청년들을 찾아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럴 때는 발로 뛰는 ‘무식한’ 방법만이 통하는 법이다. 이에 우리는 무려 200여 곳이 넘는 인근 숙박업소를 일일이 돌아다니며 투숙객은 물론 업주 등을 상대로 수사를 진행했다. 또 주변 주택가까지 샅샅이 훑으며 ‘수상한 청년들’을 추적해 나갔다. 우리들은 그 일대 업소와 업주 이름, 인상착의까지 줄줄 꿸 정도로 찾아다니며 용의자들에 대한 작은 정보라도 수집하기 위해 뛰어다녔다.”
수사팀은 범인들이 범행 직후 이 지역을 유유히 빠져나갔을 가능성에도 주목하고 신속한 조치를 취했다. 수사팀이 주목한 것은 택시에 연결된 GPS 범죄신고시스템이었다. 이에 경찰은 상황실을 이용, 성남 관내 2000여 대의 영업용 택시에 ‘중요사건 발생’ 경보를 전달했다. 또 범인들이 두 명을 무참히 찌르고 달아난 점으로 볼 때 옷에 상당한 양의 혈흔이 묻었을 것으로 판단, 범인들의 인상착의를 통보하고 적극 협조를 요청했다.
탐문수사가 계속되던 얼마 후 ‘사건 발생 추정 시각에 그 일대에서 남자 두 명과 말투가 어눌한 여자 한 명을 서울 영등포역 부근까지 태워줬다’는 택시기사의 제보가 들어왔다. 하지만 용의자로 지목된 청년들 외에도 여자가 끼어 있었다는 점 때문에 처음에 이 제보는 무시됐다고 한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발이 닳도록 뛰어다닌 결과 수사팀은 용의자들을 특징지을 만한 중요한 진술을 확보했고 수사는 다시 활기를 띠게 된다. 다음은 원 형사의 얘기.
“그 와중에 수사팀은 인근 한 여인숙 업주로부터 사건 발생일 즈음 머리가 조금 모자란 여인이 장기투숙했다가 떠났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숙박계를 확인한 결과, 이 여인과 함께 투숙한 남성들이 있었는데 바로 함영식(가명·28)과 심동춘(가명·23)이라는 청년들이었다. 탐문 수사한 바에 따르면 이들은 특정한 직업도 없이 지하철 등에서 앵벌이를 해 살아가는 모양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같은 앵벌이들을 상대로 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들을 아는 사람이 몇몇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앵벌이들은 좀처럼 입을 열 태세가 아니었다. 결국 우리가 ‘살인사건이 났는데 유력한 용의자로 이들을 쫓고 있다’며 설득한 끝에 간신히 이들에 대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이들은 성남 일대를 주무대로 활동하는 전문 앵벌이였는데 하루 1만 원짜리 싸구려 여인숙을 돌아다니며 혼숙을 해오곤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 중동의 한 여인숙에서 장기투숙했다던 ‘머리가 모자란 여인’은 바로 함영식의 동거녀로 드러났다.”
결국 택시기사의 제보가 수사팀의 탐문수사 결과와 일치한다는 것이 확인됐다. 이에 이들이 목적지로 향했다는 영등포역으로 형사들이 급파됐다. 하지만 영등포역 인근에 있는 숙박업소만도 수백 개였다. 수사팀은 투숙과 잠복을 병행하며 앵벌이들이 머무를 만한 여인숙 250여 곳을 대상으로 집중수사를 벌였지만 이들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앵벌이들을 붙들고 끈질긴 탐문을 한 결과 수사팀은 용의자 함 씨 등이 앵벌이들이 집단으로 투숙하고 있다는 종로구 돈의동의 한 여인숙에 머물고 있다는 결정적인 제보를 확보하기에 이른다. 다음은 이 형사의 얘기.
“여인숙을 급습했을 때 함 씨 일행은 너무도 태연하게 자고 있었다. 사람을 죽여 놓고도 버젓이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기가 막혔다. 피할 틈도 주지 않고 단숨에 제압했더니 바로 ‘잘못했습니다’는 소리가 나왔다.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왔다고 생각한 모양이더라. 우리가 자신들의 아지트까지 찾아낼 줄은 생각도 못한 눈치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그런 범행을 저지른 것일까. 이어지는 원 형사의 얘기.
“함영식과 심동춘은 분당선에서 앵벌이 생활을 하던 중 알게 된 사이였다. 하지만 앵벌이치고는 많은 나이에 속했던 이들의 수입은 그다지 좋지 못했던 것 같다. 하루 평균 5만 원 정도를 손에 쥔 것으로 보였는데 술 먹고 PC방 가는 것 등에 수입 대부분을 탕진하곤 했다. 돈에 쪼들리기 시작하자 강도상해 8범이었던 함 씨는 한탕 크게 해서 편하게 지내볼 생각으로 위험한 범행을 제안하게 된다. 범행을 공모한 이들은 자신들이 언젠가 묵었던 여인숙에 여자들만 지키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내고는 범행장소로 생각한 것이다. 마침 범행 당일에도 여인숙은 여자 둘이 지키고 있었고….”
특히 이들이 그토록 잔혹한 범행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범행 전 환각제를 술에 타서 마셨기 때문으로 밝혀져 더욱 큰 충격을 주었다. 경찰은 함 씨 일당을 살인 및 강도 등의 혐의로 구속, 13일간의 수사를 종결지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