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대선개입 관련 2심에서 유죄가 선고됐다. 이제 최종 판단은 대법원으로 공이 넘어갔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당황스러웠다.”
서울고등검찰청 한 출입기자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해 서울고등법원이 대선 개입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을 때의 심경을 이렇게 전했다. 1심과 마찬가지로 선거 개입은 무죄가 날 것으로 예상했고, 다만 혹시 모를 유죄 판결에 대비해 기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전혀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는 게 이 기자의 설명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서울고법의 유죄 판결에 가장 당혹스러웠던 측은 원세훈 전 원장 측이었다.
사실 원 전 원장은 유죄 판결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재판 하루 전인 지난 8일에는 원 전 원장이 이미 지난달 30일 2심 재판부에 신변보호 요청서를 제출한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이는 원 전 원장이 1심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무죄 판결이 내려질 경우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충돌에 대비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결국 경찰 1개 중대가 법원에 파견돼 원 전 원장을 보호했다. 실제 원 전 원장 측은 신변보호 요청서를 통해 “1심 선고 당시 위해를 가하려는 사람이 있었다”며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신변보호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또한 원 전 원장은 재판장이 공직선거법 위반 부분에 대해 유죄 취지를 설명하자 표정이 점점 굳어졌고, 재판장이 법정 구속을 명하면서 “마지막 의견을 말하라”며 발언 기회를 주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했을 뿐”이라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모습을 보였다.
원 전 원장을 기소한 검찰도 예상 못한 깜짝 결과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검찰은 형사 재판에서 피고인에게 구형을 하고 이에 대해 재판부가 최대한 자신들의 구형량을 존중해 주기를 바라는 입장이다. 상식적으로 봤을 때는 수사를 해서 죄가 있다고 판단해 기소를 했고 1심에서 무죄가 난 사건을 2심에서는 유죄를 이끌어 냈으니 검찰 입장에서는 환영하는 분위기가 나왔어야 할 케이스다.
지난 2013년 채동욱 전 검찰총장 퇴임 모습. 구윤성 기자 kysplanet@ilyo.co.kr
이번 재판으로 또 다른 화제가 된 점은 재판장이었던 김상환 부장판사에 관한 부분이다. 1966년생인 김 부장판사는 대전 보문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88년 제30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1991년 사법연수원을 수료(20기)했다. 1994년 부산지법 판사로 임용돼 판사 생활을 시작한 김 판사는 2001년 독일 뮌헨대 연수를 다녀와 서울서부지원 판사, 헌법재판소 파견, 서울고법 판사, 대법원 재판연구관,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 부산고법 창원재판부 부장판사 등을 거쳤다. 김 판사는 대체적으로 사회적 관심이 집중된 다수의 사건들에서 대기업이나 정치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소신대로 ‘대쪽 판결’을 내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상환 판사
이듬해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처사촌인 김재홍 씨에 대해서도 영장을 발부했고, 2012년엔 불구속 재판을 받던 신삼길 전 삼화저축은행 명예회장에게 중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또 김 판사는 지난해 SK그룹 횡령 사건 공범으로 기소된 김원홍 씨의 항소심에서 징역 3년 6월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검찰의 양형 부당 주장을 받아들여 징역 4년 6월로 형을 높였다.
지난달 16일에는 2012년 대선을 앞두고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를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아들 지만 씨에 대한 허위 사실을 공표한 혐의로 기소된 시사IN 주진우 기자와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에 대해서도 원심과 마찬가지로 무죄를 선고하며 주목을 받기도 했던 김 판사다. 당시 김상환 부장판사는 “언론의 자유는 민주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권 중 하나다. 국민에게 정치적 의사 결정에 필요한 정보나 의견을 제공하기 위해 이뤄지는 언론 활동은 중대한 헌법적 법익을 침해하지 않는 한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 판사는 엄한 형을 선고할 때와는 달리 약한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난 2012년 불구속 재판을 받던 신삼길 전 삼화저축은행 명예회장에게 중형을 선고하고 수감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재판을 멈추지 말라”며 눈물을 흘린 모습은 법조계에서 오랫동안 회자된 에피소드다.
지난 9일 원 전 원장에 대한 선고공판을 위해 법정에 들어선 김 판사는 그동안의 고뇌가 깊었음을 얘기하며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죄와 벌을 다루는 법관에게는 끝없는 숙고와 고민이 요구됩니다. 특히 외부로부터 독립된 재판부는 알 수 없는 고독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 판결을 앞두고 한시도 긴장을 놓지 않고 정성을 다해 탐구하고 고뇌한 결론을 말하겠습니다”라고 운을 뗀 바 있다.
특히 김 판사는 지난해 10월 아내의 외도를 의심해 아내를 목 졸라 살해하고 하수구에 시신을 유기했던 사건에서 피해자의 유족들을 따뜻하게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화제가 됐다.
“유가족이 와 있느냐”며 방청객을 향해 물은 김 판사는 판결문을 읽기 전에 유족들에게 “고귀한 생명이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갔다. 재판부의 결정이 유가족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진심으로 슬픔을 이해하고 마음을 다해 애도한다”고 위로했다. 유가족이 오열하자, 또 다시 이들이 상처를 받을 것을 우려해 범행 사실 낭독을 일부 생략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 외적으로 김 판사는 송년회에서 선·후배 판사들과 함께 싸이의 ‘강남 스타일’에 맞춰 말춤을 추고, 체육대회에서는 발군의 운동 실력을 발휘하는 등 사법부에서 ‘만능맨’으로 통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김 판사가 최근까지 자신의 친형과의 연락을 피했던 것으로 알려져 그 배경에 관심이 모아졌는데, 김 판사의 친형은 지난해 초까지 국정원에 몸담았던 국정원 고위간부 출신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김 판사는 지난해 9월 26일 서울고법에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이 접수되면서부터 괜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형과의 접촉을 자제해 왔고 전화도 받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국정원 한 관계자는 “김 판사의 형에 대해 확인을 해 봐야겠지만 퇴직을 하더라도 몇 년간은 신변 보호 등을 위해 근무 사실을 밝히지 못하게 돼 있다”고 말했다.
이연호 기자 dew901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