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씨가 피해자들에게 보낸 문자메시지. 마치 업무상의 문자를 잘못 보낸 양 연기하기도 했다.
“아니, 서장 와이프가 될 사람이, 그만 좀 못해?!”
부산 해운대구의 한 식당. 남성이 버럭 화를 내며 고성을 질렀다. 화를 낸 남성은 다름 아닌 해당 지역의 경찰서장인 김 아무개 씨. 김 서장이 화를 낸 까닭은 자신과 2년 동안 교제한 약혼녀 정 아무개 씨(여·38)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해당 식당은 정 씨의 부모가 운영하는 식당이다. 이곳에서 정 씨는 서빙을 맡았다. 그 모습을 눈여겨 본 김 서장은 도저히 분을 참을 수 없었다. 현직 경찰서장의 약혼녀가 고작 손님 시중이나 들고 있다니. 참다못한 김 서장은 식당 한편에 있는 골프채를 들었고, 급기야 식당 현관에 있는 화단을 모두 때려 부수는 난동까지 저지른다.
그 모습을 모두 지켜 본 정 씨의 부모는 김 서장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경찰서장이라도 저런 행동은 확실히 ‘비상식적’이었다. 김 서장은 식당에 단골손님으로 오면서 정 씨와 인연을 맺었다. 처음 딸이 김 서장을 소개시켜 줄 때는 그저 훌륭한 경찰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정말 경찰서장 맞나”라는 행동이 수차례 이어졌다.
“안 되겠어. 아무리 봐도 뭔가 수상해.”
정 씨의 부모는 고심 끝에 친척에게 이 얘기를 전달한다. 경찰 쪽에 조금 아는 사람이 있던 친척은 김 서장의 평판을 확인해보기로 한다. 그런데 신원조회를 해보니 뭔가 이상했다. 정 씨의 친척은 직접 해당 경찰서로 찾아가기로 했다. 가까스로 서장실을 열어 김 서장을 만나자 정 씨의 친척은 너무나 놀라 그만 다리가 풀려버렸다. 자기가 알고 있던 김 서장이 아니었던 것.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정 씨 부모가 2년 동안 예비 사위로 굳게 믿고 있던 김 서장은 사실 안 아무개 씨(51)였다. 무직이었던 안 씨는 무려 ‘7년’ 동안이나 부산 해운대 지역에서 경찰서장 행세를 했다. 실제로 해운대 지역에는 김 서장이 존재한다. 안 씨가 실존 인물을 사칭하고 다닌 계기는 오로지 하나. “외모와 풍채가 비슷하다”는 말을 주변에서 듣고 나서부터다.
안 씨가 처음 ‘김 서장’을 사칭할 무렵인 2008년, ‘김 서장’은 부산지방경찰청 형사과장으로 있었다. 안 씨는 당시 형사과장으로 완벽히 변신을 시도했다. 다니는 곳마다 형사과장이라고 어필을 하는 한편, 통화하는 척하며 경찰 업무 얘기를 은근슬쩍 다른 사람 앞에서 하는 연기도 불사했다. 그러던 중 안 씨의 레이더망에 자신이 자주 가던 이발소의 주인인 박 아무개 씨(58)가 들어왔다. 곧 은밀한 제안이 들어간다.
“해운대구에 고급 호텔 이발소 운영권을 따게 해줄 테니까. 성의 좀 보이쇼. 나 알잖아, 형사과장인 거. 호텔 사장 아들한테 사건 있는 거 내가 다 처리해줬어. 내가 요구하면 거절 못 할 거야”
그동안의 행동을 볼 때 안 씨가 형사과장인 것을 굳게 믿고 있었던 박 씨는 1억 원을 떡 하니 안 씨에게 쥐어준다. 안 씨는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때부터 안 씨의 본격적인 사기 행각이 시작된다. 경찰 관계자는 “1억 원을 준 박 씨는 결국 운영권을 따진 못했지만 따로 고소를 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만큼 안 씨를 믿고 있었고, 후에 안 씨가 잡히고 나서야 실체를 알았다”라고 전했다.
7년 동안 사기 행각을 벌인 피의자 안 씨가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TV 캡처.
안 씨의 주 활동 무대는 산악회와 동호회였다. 안 씨는 산악회에 가입해 회원들에게 꾸준하게 자신이 고위 경찰임을 인식시켰다. 당시 형사과장이었던 김 서장이 지난해 1월 서장으로 부임하자, 안 씨도 자신의 직위를 스스로 서장으로 승격했다. 안 씨는 산악회 회원들에게 자신을 ‘김 서장’으로 부르도록 했다.
안 씨가 김 서장으로 보이기 위해 했던 연기들도 배우 수준이었다. 안 씨는 사람을 만날 때 수갑을 일부러 갖고 다니거나, 기념일이 되면 경찰 용품들을 시장 등에서 구해와 사람들에게 돌렸다. 산악회 회원들은 가끔씩 안 씨가 보낸 문자도 받곤 했는데, 문자에는 “오늘 저녁에 영장 보내실 건가요?”, “경찰의 마음가짐”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문자를 받은 회원이 “이게 무슨 문자냐”라고 물으면, 안 씨는 “아, 내가 직원들에게 보낼 것을 잘못 보냈다”라고 얘기하곤 했다.
무엇보다 안 씨는 ‘경찰 인사’를 술술 꿰고 있었다는 게 피해자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안 씨에게 피해를 당했다는 한 피해자는 “안 씨가 누가 자기 동기고 누가 진급했고 떨어졌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다”라고 진술했다. 경찰 관계자는 “안 씨가 진급도 하려고 하다가 못 해가지고 우울해 있는 것을 보고 피해자들이 위로주도 사주고 그랬다. 수법이 기가 찰 지경”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안 씨는 김 서장을 사칭하며 7년 동안 산악회원 등 지인 5명에게 무려 ‘7억 4000여만 원’을 뜯어냈다. 안 씨는 “아들을 경찰에 특채로 채용시켜주겠다”, “비싼 아파트를 반값에 사게 해 주겠다”는 식으로 피해자들을 꼬드겼다. 그렇게 뜯어낸 돈으로 BMW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부산의 강남’으로 불리는 해운대 마린시티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에서 수백만 원의 월세를 내고 살았다. 그러다가 자주 다니던 식당에서 서빙을 하던 정 씨를 만났고, 사칭한 신분으로 결혼까지 약속하다 덜미가 잡힌 셈이다.
경찰서장으로 사칭하고 다닌 7년. 안 씨에게 ‘위기’는 없었을까.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인 2011년, 안 씨는 ‘사칭 인생’ 최대 위기를 맞은 것으로 파악된다. 당시 안 씨는 한 여성을 성추행하다가 그만 경찰 조사를 받는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안 씨에게는 천운이 따랐던 것인지 무혐의로 풀려나게 된다. 피해 여성과 결국 합의를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실제 김 서장은 이만저만 피해를 입은 게 아니었다. 당시 김 서장은 피해 여성 지인으로부터 상당한 항의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김 서장의 억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경찰 관계자는 “당시 서장님이 속앓이를 꽤 하셨다. 이번에도 사칭 얘기가 나오니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직접 수사 지시를 내린 것”이라고 귀띔했다. 결국 경남 창원의 한 모텔에서 붙잡힌 안 씨는 사기 혐의로 구속됐다.
그렇다면 안 씨와 김 서장이 실제로 얼마나 닮았을까. 하지만 경찰 관계자는 하나같이 “별로 닮지는 않았다”라고 잘라 말했다. 한 경찰 관계자는 “얼굴이 전혀 닮은 게 아니다. 어떻게 7년 동안 서장님으로 사칭을 하고 다녔는지 정말 미스터리다. 풍채도 닮았다고 하는데, 서장님이 키가 좀 더 크다”라고 전했다. 미스터리한 안 씨의 사칭 행각은 외모보다 연기 등 ‘디테일’함에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경찰이라는 ‘권력’ 앞에 한없이 나약해지는 피해자들 때문 아니었을까.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