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평택경찰서 마약수사팀 박광규 팀장이 전하는 잊을 수 없는 사건도 바로 그런 케이스다. 납치살해 혐의로 체포한 한 40대 남자로부터 또 다른 살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자백받고도 사체를 찾지 못해 혐의를 입증 못한 안타까운 사건이다.
지난 2006년 9월 중순경. 평택시 서정동에 사는 사채업자 김태수 씨(가명·36)가 사라졌다. 당시 상황에 대한 박 팀장의 얘기를 들어보자.
“9월 말쯤 김 씨의 친구 A 씨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김태수 씨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적어도 하루에 한 번씩은 꼭 통화를 하곤 했는데 며칠 동안 도통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게 아닌가. 혹시나 하고 기다렸지만 소식이 끊긴 게 일주일이 넘었다고 하더라. A 씨는 한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며 김 씨에게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고 불안해했다.”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남자. 참 이상한 일이었다. 수사팀은 범죄연루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수사팀은 김 씨의 주변인물 및 그가 자주 드나들던 곳을 중심으로 탐문수사를 하던 중 결정적인 진술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다음은 박 팀장의 얘기.
“평택시내의 한 술집 주인에 따르면 김 씨는 9월 19일 밤 자신이 운영하는 술집에 와서 술을 마셨다고 하더라. 공교롭게도 그날 이후로 김 씨는 주변인들과 연락이 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여러 정황들을 종합해볼 때 김 씨는 술집을 나선 후 사라진 것이 분명했다. 중요한 사실은 그날 밤 김 씨가 혼자가 아니라 두 명의 사내들과 함께 있었다는 점이었다. 술집 주인에 따르면 세 사람은 술을 마시는 도중 언성을 높이며 말다툼을 하기도 했다는데 새벽 1시무렵 함께 술집을 나섰다는 것이었다.”
김 씨와 술자리에 있었던 두 명의 남자들은 김 씨의 마지막 행적을 증명할 수 있는 목격자였다. 또 술집을 같이 나선 이후로 김 씨가 사라졌다는 점에서 두 남자는 유력한 용의자이기도 했다. 수사팀은 즉시 두 남자를 찾아 나섰다. 두 남자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수사결과 문제의 두 남자는 이석호 씨(가명·43)와 그의 친구 이재범 씨(가명·43)였다. 분묘처리업에 종사하는 이석호 씨와 일용직 노동자 이재범 씨는 중·고등학교 친구로 절친한 사이였다. 동시에 이들은 사라진 김 씨와 동향 선후배로 한 동네에서 가깝게 지내온 인물이기도 했다. 다음은 박 팀장의 얘기.
“우선 이석호 씨를 임의동행해서 조사했다. 예상대로 이석호 씨는 ''모르는 일''이라며 펄쩍 뛰었다. 이재범 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그날 밤 태수와 함께 술을 마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 후로는 본 적도 없다''고 입을 모았다.”
두 사람은 술집을 나온 뒤 제각기 흩어졌다는 진술만 반복했다. 심증은 있지만 이렇다 할 증거가 없어 무작정 조사를 계속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수사는 난관에 부딪혔다.
가장 시급한 것은 범인들의 자백을 끌어내는 일이었다. 수사팀은 두 사람을 다시 불러들였고 분리신문을 실시했다. 조사가 진행될수록 이들의 어설픈 알리바이는 더 많은 허점을 드러냈다. 그리고 앞뒤 안맞는 알리바이와 거짓 진술들을 감당 못해 전전긍긍하던 이들은 박 팀장의 노련한 유도심문에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만다. 두 사람의 사건당일 행적 등을 조사, 이미 살해정황을 잡은 박 팀장이 이재범 씨에게 “이석호 씨가 그러는데 당신이 김 씨를 찔러 죽였다며?”라고 캐묻자 놀란 그가 “난 안 죽였다. 석호가 죽이는 것을 옆에서 보기만 했다”고 불쑥 말해버린 것.
결국 두 사람으로부터 자백을 끌어낸 수사팀은 9월 28일 송탄의 한 야산에 암매장된 김 씨의 사체를 발굴함으로써 수사를 종결지었다. 조사결과 드러난 이들의 범행은 이렇다.
이렇다 할 수입이 없어 생활에 어려움을 겪던 두 사람은 사채업을 하며 현금을 많이 갖고 다니는 동네후배 김 씨를 상대로 강도행각을 벌이기로 공모한다. 사건 당일인 9월 19일 두 사람은 술이나 한 잔 하자며 김 씨를 불러낸다. 하지만 술집을 나서자마자 이 씨 등의 태도는 돌변했다. 미리 준비한 식칼로 위협, 대기해 둔 이 씨의 승합차에 김 씨를 강제로 태운 이들은 약 4km 떨어진 야산으로 납치했다.
하지만 박 팀장은 뭔가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고 한다. 조사과정에서 범인 중 한 명인 이석호 씨에게서 뭔가 미심쩍은 정황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박 팀장이 수사차 이 씨의 집을 찾아갔을 때 집안은 쓰레기와 우편물이 잔뜩 쌓여있었다고 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단전·단수가 됐던 점까지 고려하면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음이 분명해 보였다는 것.
박 팀장이 특히 주목한 것은 이 씨의 아내인 오정순 씨(가명·43)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사실이었다. 가정사나 사생활 문제로 그냥 넘길 수도 있었지만 박 팀장은 오 씨의 행방에 의구심을 가졌다. 박 팀장은 오 씨의 주변인물을 상대로 은밀히 내사를 진행했는데 이상한 점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동창인 이들 부부는 2005년 3월 재혼한 상태였다. 이들은 동창들과 정기적으로 동창회를 갖는 등 자주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그런데 한 1년 전부터 부인 오 씨가 동창회에 나오지 않더라는 것이다. 친구들이 '정순이는 어쩌고 혼자 왔냐'고 물으면 이 씨는 '바빠서 못왔다'는 식으로 둘러댔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모임에도 오 씨는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 이상한 것은 오 씨와 일절 연락도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 ”
동창들의 증언대로라면 오 씨는 이미 1년째 행방이 묘연한 셈이었다. 동창들은 하나같이 '정순이 성격상 모임에 계속 빠질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고 말했다. 특히 동창들이 오 씨의 안부에 대해 자꾸 물어올 때마다 이 씨는 '왜 자꾸 물어보냐'며 온갖 짜증과 신경질을 냈는가하면 폭력까지 행사하려 할 정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고 했다. 또 이들 부부가 같이 살던 아파트가 대출금을 갚지 못해 경매가 진행되고 있었던 사실도 드러났다. 박 팀장은 이 씨가 아내의 행방에 대해 주변인들에게 어떻게 둘러댔는지 다시 조사했다. 그 결과 주변인들에게 한 말이 다 다른 것이 확인됐다. 이 씨는 동창들에게는 '바빠서 못왔다'는 식으로 그때그때 다른 핑계를 댔고 보험회사 직원에게는 '아내가 바람나서 도망갔다'고 말했던 것이다.
미심쩍은 정황을 잡은 박 팀장은 이 씨를 상대로 추가조사를 진행했다. “'부인은 어디있냐'고 묻자 이 씨는 '집 나가서 안 들어온다'고 대답했다. '부인의 행방에 대해 주변사람들에게 말한 것이 왜 다 다르냐. 도대체 부인을 어떻게 했나'라고 다시 한번 캐물었다. 그랬더니 '모른다'며 잡아떼던 이 씨가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으면서 식은땀을 비오듯 쏟아내는 게 아닌가. 그리고 숨이 넘어갈 듯 부들부들 떨며 '무섭다' '두렵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눈동자를 보니 살기가 서려있는 게 정상이 아니었다. 나중에 조사 중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등의 엉뚱한 얘기가 나올까봐 우리는 물을 떠다주고 등을 두드리며 안정시켰다. 그런데 갑자기 이 씨가 간드러지는 여자 목소리를 내면서 '내가 아내를 죽였어요'라고 하는 게 아닌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 후 이 씨의 눈동자가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보였고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이렇게 말했다. '제가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습니다. 아내의 사체는 평택 OO인근의 밤나무 단지에 묻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씨는 왜 아내를 살해한 것일까. 이 씨의 진술에 따르면 사건은 2005년 9월 17일 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 사람은 고교동창으로 사건 발생 6개월 전에 재혼한 사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은 뒤로는 심한 불화를 겪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유는 이 씨가 전 부인과 계속 연락을 주고 받았는데 이를 오 씨가 못마땅해했기 때문이었다. 사건 당일도 이 씨는 전 부인 문제로 아내와 심한 말다툼을 하다 격한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오 씨의 목을 졸라 살해하고 만다. 이 씨는 범행 후 아내의 사체를 욕실로 끌고가 토막을 낸 다음 검은색 비닐봉지에 담아 평택 인근의 밤나무 단지에 유기했다고 진술했다.
이 씨의 자백을 근거로 수사팀은 아내 사체발굴에 들어갔다. 하지만 오 씨의 사체는 나오지 않았다. 수사팀은 이 씨가 지목한 여러 장소를 샅샅이 뒤졌으나 사체는 끝내 찾지 못했다. 결국 이 씨는 범행을 입증할 직접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아내 살인혐의에 대해서는 무죄판결을 받았다. 김태수 씨 납치·살인 및 사체유기 등의 혐의만으로 이 씨는 법정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