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 | ||
“어딘데 아직 안들어오는 거냐? 집에 오고 있는 중이니?”
“학교에서 청소 중이에요. 청소 끝나면 바로 집에 갈 거예요.”
“이 시간까지 무슨 청소야? 거짓말하는 거 아니냐?”
“곧 간다니까요. 제발 전화 좀 그만 하세요”
지난해 9월 10일 오후 9시경. 부천시 원미구 OO동에 사는 김만수 씨(가명·42)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김 씨가 몇 분 간격으로 통화를 시도한 사람은 다름아닌 딸 수희 양(가명·17)으로 이날만 해도 벌써 네 번째 통화였다.
아버지의 직감이랄까. 딸의 귀가가 평소보다 늦어지자 김 씨는 몹시 불안했다. 특히 무용을 전공하는 딸은 집과 한 시간 이상 떨어진 서울의 특수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평소 딸의 생활에 깊숙이 관여하며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해온 김 씨는 이날도 딸에게 전화를 걸어 귀가시간을 체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잦은 통화가 못마땅했던지 딸은 학교에서 청소 중이라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시간은 9시가 넘어 바깥이 어두워지자 김 씨의 불안감은 점점 커져갔다. 10시가 가까워져도 연락이 없자 견디다 못한 김 씨는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다음은 손 팀장의 얘기.
“9시 45분경 다시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연결이 되자마자 수화기에서는 다급한 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희 양은 거의 숨이 넘어갈 듯한 목소리로 다급하게 ‘아빠! 도와주세요’라고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리고 전화는 끊겼다.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김 씨가 재차 통화를 시도했지만 끝내 수희 양과 통화할 수 없었다고 한다.”
딸의 신변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김 씨는 즉시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도 곧바로 비상출동했다. 김 씨의 진술을 들은 수사팀은 납치범죄로 가닥을 잡고 수사에 착수했다. 당시 상황에 대한 손 팀장의 얘기를 들어보자.
“정황상 납치가능성이 높았다. 이럴 경우 피해자의 목숨은 초를 다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나는 즉시 형사과장에게 보고했고 통신사에 긴급통신사실확인자료 제공을 요청했다. 통신사 자료 확인결과 수희 양의 휴대폰은 아버지와 마지막 통화를 한 직후인 9시 45분경 인천시 계양구에서 꺼진 것으로 밝혀졌는데 배터리가 분리된 것으로 드러나 범죄 가능성에 더욱 무게가 실렸다. 당연히 수희 양의 가족들은 난리가 났다. 특히 수희 양의 아버지는 수사팀을 심하게 다그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처음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다. 수희 양이 아버지에게 구조요청을 하자마자 배터리가 분리된 점으로 보아 범인이 수희 양을 순순히 돌려보낼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우려했던 대로 수희 양은 이날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나하는 마음으로 기다렸지만 수희 양에게서는 아무 연락도 없었다.
수사팀은 수희 양의 휴대폰이 마지막으로 켜져 있었던 지역 일대에 강력반 형사 15명을 급파하는 동시에 인천계양경찰서와 공조, 기지국 일대 현장 수색에 들어갔다. 하지만 수희 양의 행방은 확인되지 않았다. 수희 양이 학교를 나선 이후 그녀를 봤다는 사람조차 없었다. 수사팀은 수희 양의 동생으로부터 “누나가 최근 초등학교 동창회 얘기를 한 적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당일 새벽 그녀의 초등학교 동창생 20여 명을 상대로 다급하게 탐문수사를 진행했으나 이렇다 할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범인은 대체 누구일까. 그리고 그가 수희 양을 납치한 목적은 무엇일까. 범인은 이상하게도 돈을 요구하는 협박전화도 걸지 않았다. 또 수희 양의 계좌를 조사한 결과 금융거래내역도 없었다. 수사팀은 원한 등을 이유로 한 면식범의 소행일 수도 있다는 판단을 하고 수희 양의 친부모 및 주변인물들을 상대로 정밀조사에 들어갔다.
무용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온 수희 양은 주변에서도 상당히 평판이 좋았다. 하지만 겉보기에 아무 문제가 없어보이던 수희 양은 남모를 고민을 갖고 있었는데 바로 아버지와의 갈등이었다. 다음은 손 팀장의 설명.
“수희 양의 어머니는 딸이 아버지와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수희 양은 어려서부터 가족들에게 엄격했던 아버지에 대해 강한 반감을 보여왔다고 했다.”
아버지에게 심한 반감을 갖고 있던 수희 양은 학교에서도 아버지로 인해 상당한 스트레스를 호소해왔다는 사실도 추가로 확인됐다. 수희 양은 사건 발생 당일 오전에도 담임교사와 아버지 문제를 상담했는데 상담을 진행한 담임교사는 수희 양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상담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아무래도 정신과 치료가 필요할 것 같다”고 의견을 밝힌 것으로 확인됐다. 그리고 상담이 끝난 후 수희 양은 “몸이 좋지 않다”고 말한 뒤 오후 4시경까지 학교 양호실에서 휴식을 취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이틀 후인 9월 12일 오전, 수희 양은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 활주로 옆 농수로에서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수희 양은 아버지에게 구조요청을 한 직후 살해된 것으로 추정됐는데 사인은 경부압박질식사로 드러났다.
수사결과 수희 양은 휴대폰 정액 요금제를 전액 사용한 상태였는데 그 결과 9월 통화 내역은 한 건도 없었다. 수사팀은 답답한 마음에 7월과 8월에 그녀와 통화한 인물들의 리스트까지 모조리 뽑아 그들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발신·역발신 내역에 올라있는 인물 20여 명에게서는 이렇다 할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다음은 손 팀장의 얘기.
“일제 탐문조사를 실시했지만 용의선상에 올릴 만한 인물은 없었다. 하지만 수사과정에서 중요한 단서를 포착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수희 양이 평소 채팅을 즐겨했다는 사실이었다. 수사팀은 수희 양의 컴퓨터 사용기록을 뒤졌다. 그 결과 수희 양이 사건 당일에도 채팅을 했다는 결정적인 단서를 확인하게 된다.”
수사팀의 조사결과 수희 양은 사건 당일 오후 6시부터 8시경까지 부천 원미구의 한 PC방에서 B 사이트에 접속, 두 시간에 걸쳐 익명의 상대들과 채팅을 한 것으로 확인됐다. 또 아버지와 통화한 직후인 9시 14분경 PC방 인근의 공중전화에서 통화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수사팀의 예상대로라면 수희 양은 채팅에서 알게 된 인물과 만남을 가진 후 봉변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어지는 손 팀장의 얘기.
“최첨단을 자랑하는 경찰의 통신수사는 범인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각도로 진행되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수사망을 빠져나갈 수 없다고 자신한다. 예상대로 ‘만나자’고 수희 양을 유인하는 채팅을 한 ID가 있더라. 로그아웃 시점이 수희 양과 동일한 것으로 볼 때 그는 채팅 직후 수희 양을 만나기 위해 자리를 떴을 것이고 따라서 유력한 용의자가 틀림없었다.”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사건 당일 수희 양과 채팅을 한 것으로 확인된 인물은 지민철 씨(가명·28). 그는 경기도에 있는 한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컴퓨터프로그래머였다. 회사 CCTV를 분석한 결과 수희 양의 다급한 구조요청이 있기 약 한 시간 전에 지 씨의 차량이 회사 정문을 빠져 나가는 장면이 포착됐다. 지 씨의 차량은 수희 양의 사체가 발견된 지역의 CCTV에 찍힌 문제의 차량과도 일치했다. 다음은 손 팀장의 얘기.
“부천에 거주하고 있던 지민철은 2004년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청소년을 상대로 성매수를 한 사실이 있는 인물이었다.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지민철을 수사하던 우리는 더욱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내게 된다. 바로 수희 양이 납치된 다음날 지민철의 아내가 출산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출산일이 임박한 만삭의 아내까지 둔 남자가 여고생을 상대로 끔찍한 범행을 저질렀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쨌거나 그는 이 사건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임이 분명했다. 우리는 부천 일대에 지 씨의 부인이 머물고 있을 만한 산부인과와 산후조리원을 샅샅이 훑었다. 그리고 9월 14일 한 산후조리원 인근에 주차되어 있는 지 씨의 차량을 발견, 잠복 끝에 그를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사건발생 나흘 만이었다.”
경찰조사 결과 드러난 지 씨의 범행은 이렇다. 사건 당일 지 씨는 채팅사이트에서 알게 된 수희 양에게 달콤한 말로 ‘만나자’고 유인했다. 아버지와의 문제로 방황하던 수희 양은 낯선 남자의 친절에 호감을 느끼게 되고 결국 그를 만난다. 하지만 수희 양이 지 씨의 차량에 타자마자 지 씨는 돌변했다. 그는 수희 양을 태우고 인적이 드문 김포공항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수희 양이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채고 달아나려 했을때는 이미 늦었다. 지 씨는 수희 양을 활주로 인근의 농로로 끌고간 뒤 강간을 시도했다. 그러나 수희 양이 격렬하게 반항하고 때마침 전화를 걸어온 아버지에게 구조를 요청하자 지 씨는 수희 양의 목을 졸라 살해한 뒤 농수로에 사체를 유기하고 달아난 것이었다.
수사팀을 더욱 경악케했던 것은 범행 후 보인 지 씨의 뻔뻔스러운 행동이었다. 지 씨는 무고한 여고생을 무참히 살해해놓고도 태연히 출산한 아내가 있는 산후조리원에 들렀던 것이다. “만삭의 아내를 두고 그런 몹쓸 생각을 품었다는 자체도 기가 막히지만 자기 부인과 자식은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어찌 한 소녀를 그렇게 짓밟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 수사팀원들의 한탄이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