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를 낸 이 씨는 지방의 한 대학병원 간호사였는데 직장이 확실한 데다가 자수한 사람이라 도주 및 증거인멸 우려가 없다고 판단됐으며 피해자 남편과 합의했기 때문에 불구속됐다. 그리고 ‘교통사고특례법위반’으로 종결됐다. 하지만 이 사건은 얼마 안가 끔찍한 살인사건으로 비화되고 만다.사고에 의문을 갖고 재수사에 착수한 경찰에 의해 사건의 진상이 끝내 밝혀지고 만 것이다. 사건을 담당한 광주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서영용 형사가 전하는 수사백서 속으로 들어가보자.
“3월 초 수사팀에 이상한 얘기가 흘러들어왔다. 얼마 전 발생한 박선미 씨 교통사고 사망사건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가해자 이경숙 씨와 사망한 박 씨의 남편 조영식 씨(가명·34)가 보통사이가 아닌 것 같다는 얘기였다. 조사하고 합의를 보는 과정에서는 둘이 모르는 사람인 척했던 사람들이라 뭔가 이상한 느낌이 왔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했다.”
가해자와 피해자 가족이 합의를 보고 검찰에 송치, 이미 종결된 것이나 다름없는 사건을 다시 되짚어본다는 것은 경찰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안 그래도 다른 사건들이 잔뜩 쌓여있는 판에 재수사는 어찌보면 사서 고생하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수사팀원들은 ‘단순한 교통사고로 보이지만 뭔가 숨겨진 진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헛수고가 될지라도 한번 해보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수사팀의 조사는 현장확인부터 다시 시작됐다. 가해자 이 씨의 진술에 따르면 사고가 발생한 곳은 광주 남구에 위치한 2차선 이면도로였다. 이 씨는 경찰조사에서 “시속 40km로 달리던 중 박 씨를 치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현장확인 결과 그곳은 양쪽에 차량들이 빼곡히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사망까지 이르게 할 정도의 대형사고가 일어나기는 힘든 장소였다. 하지만 더 이상한 점이 있었다.
“교통사고 현장에 출동했던 보험사 직원이 사고차량에 충격흔 등이 없었고 사망한 박 씨에게도 골절 등 외상이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의혹을 제기했다. 피해자가 사망할 정도의 큰 사고였는데 사고 당시 정황을 확인해보니 교통사고에 대한 증거도 없고 뭔가 앞뒤가 안맞았다.
또 사망자의 남편 조영식은 보험사로부터 이미 1억 원 상당의 보험금을 수령한 상태였다. 혹시나 해서 알아보니 아내가 사망할 경우 조영식이 수령할 총 보험금이 무려 7억 2000만 원이 넘었다. 더군다나 조 씨는 한때 보험사에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또한 가만히 생각해보니 119나 보험사에 연락하기 전 사고를 낸 이경숙이 직접 운전을 해서 박 씨를 싣고 왔다는 점도 이상했다. 여성이 사망에 이르는 큰 교통사고를 낼 경우 보통은 손이 떨리고 심장이 쿵쾅거려서 여기저기 도움을 청하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의식불명의 피해자를 싣고 침착하게 병원까지 직접 운전을 해서 데려왔다는 것은 보통 강심장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나. 그순간 ‘아, 이건 계획된 살인일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하는 심정으로 착수한 수사는 어느새 ‘살인사건’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문제는 심증뿐인 범행을 어떻게 입증하느냐는 것이었다. 더구나 수사팀이 수사에 착수했을 때는 이미 ‘사고’가 발생한 지 3주가량이 지난 시점으로 결정적인 증거라 할 수 있는 박 씨의 사체는 이미 매장된 후였다.
수사팀은 우선 사고를 냈다고 주장하는 이 씨의 사고당일 동선 확인에 나섰다. 이 씨는 자신의 진술대로 그날 5시경 퇴근한 후 봉선동에 위치한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온 것이 확인됐다. 하지만 수사팀은 이 씨가 마트를 나온 후부터 포충사에서 사고가 발생한 시각 사이에 2시간 10분여가 빈다는 점을 확인했다. 이 씨는 길을 헤맸기 때문이라고 둘러댔지만 수사팀은 그녀가 과거 봉선동 인근에서 거주한 적이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알리바이는 거짓이라고 단정했다.
이 사건은 과연 보험금을 노린 살인사건이 맞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대학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며 착실히 살아오던 이 씨가 범행에 가담한 이유는 무엇일까. 죽은 박 씨의 남편과 이 씨는 도대체 무슨 관계일까. 의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얼마 가지 않았다. 죽은 박 씨의 남편 조영식 씨와 가해자 이경숙 씨의 통화기록을 분석한 결과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두 사람은 내연의 관계였다. 8개월 동안 두 사람의 통화횟수는 무려 2000여 건에 달했고 사건 바로 전날에도 두 사람은 이 씨의 자취방에 함께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보통 사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합의를 볼 때까지 모르는 사이인 것처럼 행동했다는 사실은 두 사람이 뭔가를 숨기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실제로 수사가 진행될수록 두 사람에게서 이상한 점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다음은 서 형사의 얘기.
“조영식 씨는 두 자녀(13세 딸, 9개월 아들)를 두고 있었다. 이상한 점은 조 씨가 사건 당일 3시경 딸을 뜬금없이 찜질방에 데려다 줬다는 사실이다. 조사해보니 딸은 평소 찜질방을 즐기기는커녕 찜질방을 가본 적도 없었다. 딸이 없는 사이에 범행을 저지르려 한 것으로 의심이 들었다. 또 아파트 경비원은 조 씨가 그날 오후 6~7시 사이에 두 번이나 집 밖에 나온 것을 봤다고 했는데 조 씨는 술을 먹고 잠이 들었고 아내가 나가는 것도 몰랐다고 진술했다. 이경숙 씨의 진술도 석연찮았다. 그녀는 마트를 나온 뒤 사고가 날 때까지 2시간여가 비는 것에 대해 추궁하자 처음에는 길을 헤맸다고 했다가 여의치 않자 포충사에 바람을 쐬러 갔다고 말을 바꾸더라.”
수사 결과로 볼 때 두 사람은 유력한 살인용의자였다. 또 조 씨가 거액의 보험금을 수령했다는 점과 두 사람이 내연관계라는 사실은 두 사람이 공모해 범행을 저질렀을 개연성까지 말해주고 있었다.
가장 큰 의문은 박 씨의 사인이었다. 하지만 박 씨는 교통사고의 일반적인 사인인 저혈당 쇼크사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교통사고에 의한 사망이라는 것을 뒤집을 만한 증거가 없는 한 어렵게 착수한 수사는 이대로 종결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과거병력도 없이 갑자기 간수치가 올라갔고 교통사고 환자가 골절 등 외상이 없다는 점은 약물에 의한 사망일 수 있다”는 전문가 소견을 확보하면서 수사는 다시 활기를 띠게 된다.
‘약물살인’. 수사팀이 그린 시나리오였다. 간호사인 여성과 전직 보험설계사였던 남자로 구성된 연인이 꾸민 완전범죄, 바로 그것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범인들의 자백이었다. 수사팀은 두 사람을 분리해서 심문에 들어갔다. 이어지는 서 형사의 얘기.
“두 사람이 사전에 입을 맞췄을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은 아무리 짜고 해도 구체적인 부분에 대한 진술에서는 분명 어긋나기 마련이었다. 예상대로 두 사람의 태도는 너무도 완강했다. 조 씨는 혐의 자체를 강하게 부정하며 거부감을 나타냈다. 이 씨도 ‘엄연한 교통사고’라고 주장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이 씨에게 여지껏 우리가 수사한 내용을 보여줬다. 그 순간 이 씨의 얼굴빛이 확 변하더니 그 때부터 입을 닫았다. 정말 자신이 결백하다면 범인이 아니라고 우기든지 억울하다고 난리를 쳐야 할 텐데 아무 말도 안했다. 심정의 동요를 보이고 있다는 증거였다. 수사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조영식과 내연관계인 것도 다 확인했다. 알리바이도 이미 거짓임을 다 밝혀냈다. 완전범죄란 있을 수 없다. 약물로 살인했을 경우는 50년이 지나도 시체에서 약물이 검출되기도 한다. 간호사니까 더 잘 알 것 아니냐’며 치고 들어갔다. 하지만 이 씨는 침묵으로 일관할 뿐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수사팀은 이 씨가 내연남인 조 씨에 대한 감정 때문에 버티는 것으로 보고 좀 더 구체적인 설득작업에 들어갔다. 사적인 부분이라 다 밝힐 수는 없지만 ‘조영식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내용으로 그를 설득했다. 조 씨에 대한 우리들의 자세한 설명을 들은 이 씨는 그제서야 약물로 살해했다고 시인했다.”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던 조 씨 역시 이 씨가 자백했다는 말에 자포자기한 듯 범행사실을 털어놓았다. 두 사람의 자백을 확보한 수사팀은 직접증거 확인을 위해 박 씨의 시체를 발굴했다. 예상대로 박 씨의 손등엔 주사바늘 자국이 있었다. 교통사고로 위장된 끔찍한 살인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두 사람이 위험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지난해 6월. 대학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던 이 씨는 중고차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조 씨를 알게 되고 결국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 두 사람은 연인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조 씨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 씨는 갈등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깊어진 후였다.
새출발을 약속했지만 이미 아이가 둘이나 있는 가장이었던 조 씨로서는 이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아내 박 씨였다. 두 사람은 결국 박 씨를 사고로 위장해 살해하고 받은 보험금으로 새출발을 하기로 공모하게 된다.
사건 당일인 2월 16일 조 씨는 평소 불면증이 있던 아내와 술을 마셨다. 그리고 아내에게 “안정제를 놓아줄 간호사를 불렀다”고 속인 뒤 실제 간호사인 내연녀 이 씨를 집으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수면진정제를 주사했음에도 박 씨가 잠들지 않자 조 씨는 아내에게 “처가에 가서 좀 쉬고와라. 데려다주겠다”고 설득, 이 씨와 함께 차에 올랐다.
술에 취한 박 씨를 싣고 오후 8시경 집에서 10km 정도 떨어진 포충사 인근의 한적한 도로에 차를 세운 두 사람은 사전에 계획한 대로 ‘범행’을 개시했다. 조 씨는 박 씨에게 ‘편안해지는 약’이라고 속인 뒤 이 씨로 하여금 특정 약물을 손등에 주사하게 했다. 예상대로 박 씨는 즉시 혼수상태가 되어버렸다. 조 씨의 집 근처로 돌아와 조 씨를 내려준 이 씨는 박 씨를 병원으로 후송한 뒤 각본대로 교통사고라고 경찰에 신고했던 것이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