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차 피해자를 묶었던 나무. | ||
학교 수업이 끝나는 시간은 오후 4시. ‘순옥이가 기다리다 지쳐 혼자서 먼 길을 걸어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라도 길이 엇갈릴 것을 걱정한 김 씨는 좌우를 살펴가며 부지런히 딸의 학교로 향했다.
그런데 김 씨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 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불안감을 억누르고 김 씨는 학교와 집 사이를 몇 차례 왔다갔다 하며 찾아봤지만 헛수고였다. 결국 이날 밤 김 씨는 인근 파출소에 실종신고를 했다. 경찰과 주민들까지 나서 밤늦도록 임 양을 찾아 다녔지만 임 양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오전 9시 30분께. 임 양은 한 야산의 무덤 위에서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사체가 발견된 곳은 담양-해리 간 국도변에서 샛길을 따라 올라온 지점. 임 양이 사는 마을까지는 한참 더 들어가야 하는 곳으로 평소 사람들의 통행이 드문 장소였다. 다음은 김원배 수사연구관의 얘기.
“임 양은 벌거벗겨진 상태로 무덤 위에서 십자가 형태로 뉘어져 있었다. 범인은 임 양의 옷가지와 노끈으로 양 손과 발, 목을 묶었으며 속옷과 잘려진 바지, 운동화 등은 책가방 속에 고스란히 담아둔 채 달아났다. 사체에는 목이 졸린 자국이 있었고 성폭행을 당한 것으로 추정됐으나 정액은 검출되지 않았다.”
부검 결과 임 양은 실종 당일 오후 9시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됐으며 사인은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나타났다. 일단 전형적인 강간살인 쪽으로 가닥을 잡은 수사팀은 현장에서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족적과 모발, 체모를 수집해 용의자 수색에 나섰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무엇보다 수사팀을 경악케 한 것은 발견 당시 십자가 형태로 무덤 위에 뉘어져 있던 임 양의 모습이었다. 범행 후 사체를 유기하는 통상적인 수법과 달리 사체를 보란 듯이 십자가 형태로 눕혀놓은 것은 범인이 마치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따라서 당시 경찰 내부와 언론에서는 사이비 종교집단에 소속됐거나 정신병력을 지닌 인물의 소행일 가능성도 제기됐다. 또 과감하게 초저녁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과 어린 소녀를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동일수법 전과자와 성도착증을 지닌 인물일 가능성에도 무게가 실렸다.”
친구 A 양에 따르면 사건 당일 수업을 마친 임 양은 친구들과 학교에 남아 시간을 보내다가 A 양과 함께 교문을 나섰다. 인근 중학교 앞 공중전화에서 집에 전화를 걸어 오빠로부터 ‘엄마한테 데리러 가라고 전하겠다’는 답변을 들은 임 양은 A 양과 함께 500m를 더 가다가 인근 가게에서 강아지 인형을 하나씩 사들고 6시 10분께 헤어진 것으로 확인됐다.
그로부터 약 두 달 후인 12월 19일, 고창군 무장면의 한 마을 비포장 도로에서 여고생 강재은 양(가명·17)과 중학생 강재식 군(가명·14) 남매가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남매가 사라진 곳은 임 양이 변을 당한 장소에서 불과 4km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남매의 실종 전 행적은 이렇다. 3시 40분경 수업을 마친 강 양은 인근 중학교에 다니는 남동생을 만나 함께 귀가를 하던 중 친구의 집에 들러 시간을 보냈다. 남매는 5시경 친구의 집을 나섰고 이것이 마지막 모습이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다음날 오전 8시 20분경 남매의 집에서 300m가량 떨어진 정수장 인근 풀밭에서 재식 군의 사체가 발견됐다. 재식 군은 양손이 운동화 끈으로 결박되고 목도리로 눈이 가려진 상태로 논두렁에 엎어져 있었는데 옷은 다 입은 상태였다. 그리고 재식 군의 사체에서 불과 5m 떨어진 곳에서 여성의 브래지어와 팬티가 발견됐다.”
정황상 재은 양의 것이 분명했다. 이쯤되면 재은 양의 생사도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현장 주변을 면밀히 살펴보던 수사팀은 바닥에 새겨진 두 쌍의 족적을 확보했다. 크고 작은 발자국이 나란히 이어진 모습으로 보아 범인이 피해자를 위협해 으슥한 곳으로 데려간 것으로 추정됐다. 그리고 이날 오전 9시 30분경 발자국을 따라 야산을 수색하던 수사팀은 한 장소에서 일제히 얼굴이 굳어졌다.
▲ 2차 피해자 남매 중 남동생 사체 발견. | ||
재은 양의 사체에서는 처참한 성폭행의 흔적들이 보였다. 목과 다리, 가슴 등이 예리한 흉기로 마구 찔려 있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인근 주민들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진행하던 수사팀은 한 통의 제보를 듣게 된다. 남매가 변을 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각을 전후해 무장면 일대에서 이상한 남자에게 쫓기다가 겨우 도망쳤다는 여고생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여고생이 진술한 수상한 남자의 인상착의는 두 달여 전에 발생한 임 양 살인사건의 용의자와 상당부분 일치했다. 이에 수사팀은 두 사건을 동일범에 의한 연쇄살인으로 보고 용의자를 좁혀나갔다.
‘족적의 주인을 찾아라.’
범인을 특징지을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단서는 바로 현장에 남겨진 족적과 범행에 사용된 노끈이었다. 수사팀은 무장면 일대를 샅샅이 뒤지며 현장에 새겨진 족적과 일치하는 인물을 찾는 데 주력했다.
남매살해사건이 발생한 다음날인 12월 20일 정오경. 어느 외딴집 마당에 들어선 수사팀의 눈에 낯익은 발자국이 들어왔다. 한눈에 봐도 현장에 찍혀있던 족적과 똑 같았다. 수사팀은 바짝 긴장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당시 그 집에는 노부부만 있었다. 집안 곳곳을 둘러보던 수사팀은 부부의 아들이 생활하는 방 장롱 위에서 눈에 익은 노끈을 발견했다. 바로 재은 양을 결박할 때 사용한 노끈과 같은 것이었다. 또 방에 있던 가방에서는 핏자국이 선명한 산악용 칼과 장갑, 피묻은 속옷과 옷가지 등이 쏟아져 나왔다. 그간의 범행을 입증해주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노부부의 아들은 김두성 씨(가명·32)였다. 김 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확신한 수사팀은 집안에 잠복, 오후에 귀가하는 김 씨를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수사팀은 정 양이 숨진 현장에서 채취한 음모와 모발을 분석한 결과 혈액형이 AB형으로 김 씨의 혈액형과 일치했고 김 씨의 인상착의가 사건 당시의 목격자들 진술과 일치한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수사팀이 제시한 숱한 증거물 앞에서 김 씨는 자포자기한 듯 순순히 범행을 자백했다.
조사 결과 드러난 김 씨의 범행은 이렇다. 외지를 떠돌다 3개월 전 고향으로 돌아온 김 씨는 직업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10월 25일 아침부터 술을 마신 김 씨는 만취한 상태로 야산을 쏘다니다가 해질 무렵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형사가 검거 당시 만취상태 범인을 조사 내내 깨웠다고 한다. MBC화면캡처 | ||
하지만 두 달 후 김 씨는 또다시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게 된다. 12월 19일 대낮부터 술을 마신 김 씨는 취기가 오른 상태로 칼과 노끈, 장갑 등이 든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어둑어둑한 산길을 배회하던 김 씨는 때마침 한 여고생을 발견하고 쫓아갔으나 여고생이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도망치는 바람에 범행은 실패하고 만다. 다른 범행 대상을 찾아 인근의 정수장 부근을 배회하던 김 씨가 발견한 것은 바로 강 양 남매였다.
김 씨는 남매를 논으로 밀쳐낸 후 비명을 지르며 반항하는 동생을 먼저 목졸라 살해하고 재은 양을 이동전화기지국이 있는 야산까지 납치, 성폭행한 후 살해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씨는 재은 양을 성폭행한 것도 모자라 온몸을 난자하며 고문하다가 잔인하게 살해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재은 양은 수년 전 아버지를 여의고 취로사업에 나가는 어머니를 대신해 궂은 집안일을 도맡아 해오던 소문난 효녀로 전해져 주변 사람들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수사팀은 집앞 도로에서 비닐봉지에 들어있던 재은 양의 살점을 추가로 발견하는 것을 끝으로 사건을 종결지었다.
그렇다면 김 씨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김두성은 어린시절 아버지로부터 심한 학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이유없는 폭력에 대한 반항 때문이었을까요. 김두성은 어려서부터 강아지를 뜨거운 방안에 넣고 질식사시키는 등 동물들을 상대로 잔인한 행위를 일삼았다고해요. 심지어 낫으로 이웃집 황소의 배에 상처를 내는 극도의 가학성을 드러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없었다고 봐야겠지요.”
한편 김 씨는 검거 당시에도 취한 상태였는데 살인동기에 대해 “결혼도 못하고 뚜렷한 직업도 없어 평소 자살하기 위해 칼과 끈을 갖고 다녔다. 혼자 죽기는 억울해 술을 마시고 배회하다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김 씨는 한때 동거하던 여성에게 강간으로 고소당하고 두 번째 여성에게도 힘들게 모은 돈 수천만 원을 쏟아부었으나 배신당하자 그후 여성과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김 씨는 범행 후 사체를 엽기적으로 묶어놓고 훼손한 이유에 대해서는 끝까지 입을 닫아 의문을 남겼다. 김 씨는 범행 후 집으로 돌아와 TV를 보다 잠이 들었다고 진술했는데 그날 방송된 드라마 등의 내용까지 또렷이 기억하고 있어 수사팀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김 씨는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