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광장 건너편에서 한참 전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소형 승용차 한 대가 정차해 있었다. 차량 운전석에는 한 청년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즐겁게 노는 사람들의 모습을 잔뜩 노려보고 있었다. 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우리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여의도광장 차량질주 사건’이다.
운전석에서 차창 밖으로 사람들의 모습을 응시하던 청년의 눈은 알 수 없는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핸들을 부여잡은 청년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부르릉!~’
청년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여의도광장 모퉁이를 따라 서서히 주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이 청년의 차량을 의식하거나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잠시 후 청년의 흰색 프라이드 승용차는 속도를 내며 달렸다. 그리고 갑작스레 방향을 튼 청년은 차량 통제선을 넘어 광장 안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광장 관리인이 차량을 발견하고 황급히 뛰어갔지만 달리는 차량을 제지할 순 없었다. 청년의 승용차는 굉음을 내며 시속 100km 가까운 속력으로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가로이 주말의 여유를 즐기던 사람들은 말 그대로 무방비 상태였다. 갑작스레 돌진하는 차량을 미처 피할 겨를도 없었다. 광장 안에서 무려 500여m를 질주하면서 시민들과 어린이들이 치여 여기저기로 나뒹굴었다. 그런데도 차량은 멈출 줄 몰랐다. 200여m를 더 질주하던 차는 광장에서 KBS본관 정문 쪽으로 방향을 트는가 싶더니 또다시 광장 중간지점으로 돌진했다.”
평화로웠던 여의도광장은 졸지에 끔찍한 지옥으로 변했다. 돌진하는 차에 치인 사람들의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 만큼 참혹했다. 막무가내로 돌진하는 차량을 피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사람들과 공포에 질린 비명소리만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특히 주말을 맞아 여의도광장을 찾은 어린이들과 학생들은 생전 처음 보는 끔찍한 장면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보모의 인솔하에 광장을 찾았던 유치원생 유영수 군(가명·6),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초등학생 박상혁 군(가명·12) 등이 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숨졌고, 20대 초반의 여성 등 21명이 중경상을 입고 쓰러졌다. 부상자 중에는 생명이 위태로운 사람도 적지 않았다.
미친듯이 질주하던 청년의 승용차는 새마을 봉사대 사무실 근처에 있는 자전거 보관소를 들이받은 후에야 멈춰섰다. 유아용 자전거가 앞바퀴에 걸리는 바람에 시동이 꺼져버린 것이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더 이상 차가 움직이지 않자 잠시 후 청년은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앳된 얼굴이었다. 청년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근처에 있던 김다슬 양(가명·13)을 낚아챘다. 그리고 길이 20cm짜리 흉기를 꺼내 김 양의 목에 들이대고 위협하며 인질극을 벌였다. 겁에 질린 김 양이 울먹이며 소리를 지르자 청년은 흉기로 김 양의 복부를 찔렀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흉기가 허리띠에 부딪치는 바람에 김 양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청년의 인질극은 계속됐다.”
누구도 섣불리 나설 수 없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자칫했다가는 소녀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수십 명의 사람을 들이받은 청년은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실제로 청년은 될 대로 되라는 표정으로 버티고 있었다. 청년이 인질로 잡고 있는 김 양을 찌르고 자살하는 최악의 상황도 배제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시간을 계속 끌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인질극이 시작된 지 5분여가 지났을까. 인근 새마을봉사대원 8명이 쇠파이프 등을 들고 접근해서 청년과 맞섰다. 그리고 청년이 틈을 보이는 사이 급습해 격투 끝에 청년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청년은 곧장 경찰에 넘겨졌다. 시민들이 모여있는 공공장소에서 광란의 질주극을 벌인 청년의 이름은 김석규(가명·20)였다.
조사결과 김 씨가 범행에 이용한 차량은 그가 한때 근무했던 양말공장 사장의 승용차로 밝혀졌다. 김 씨는 근무하던 양말공장에서 4개월 전 쫓겨난 뒤 부산으로 내려가 신발 사출공장에서 잠시 일하다가 범행 일주일 전에 그만둔 것으로 확인됐다. 실직 다음날인 10월 13일 부산에서 다시 서울로 올라온 김 씨는 하는 일 없이 여인숙과 술집 등을 배회하다가 범행 이틀 전에 자신이 근무했던 양말공장 사장의 승용차를 훔친 것으로 드러났다.
훔친 차량을 몰고 서울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김 씨는 범행 전날 오후 여의도광장 주차장에 차를 세워뒀다가 범행 당일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범행 당시 상황에 대한 질문에 김 씨는 “처음 사람을 친 후 가슴이 떨려 눈을 감아버렸다. 라디오 볼륨을 크게 키운 뒤 팝송을 들으며 계속 액셀을 밟은 것 외엔 기억이 잘 안난다”고 대답했다.
조사결과 김 씨의 범행동기는 어처구니없게도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과 세상을 향한 분노 때문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수사팀은 급히 연락이 닿은 김 씨의 둘째 형을 상대로 김 씨의 성장 배경과 최근 행적들에 대해 참고인 조사를 벌였다.
김 씨는 충청북도 OO군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막내로 태어났다. 김 씨의 집안은 끼니조차 해결하기 어려울 만큼 곤궁했다. 지독한 가난을 견디지 못한 김 씨의 어머니는 어린 자녀들을 두고 가출하고 만다. 김 씨의 나이 겨우 일곱 살 때였다. 지독한 가난과 어머니의 빈자리는 어린 김 씨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시련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김 씨네 집안 형편은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어려워졌다. 급기야 6년 후에는 아버지마저 가난을 비관해 농약을 마시고 자살하고 만다.
고아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한 김 씨는 더 이상 고향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김 씨는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다. 10대 초반에 불과한 김 씨에게 일가친척 하나 없는 서울생활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학력도 기술도 없었던 김 씨는 공장 노동자 및 중국집 배달원 등으로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온 곳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김 씨는 한 직장에서 오랫동안 일을 한 적이 없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이 전한 얘기.
“이유는 시력 때문이었다. 김석규의 시력은 2m 앞의 물체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할 만큼 선천적 약시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차량 안에서 발견된 그의 자필 유서엔 ‘괴로워 죽고 싶다. 오늘 세상을 하직하기로 했다. 그렇잖아도 힘겨운 세상, 눈까지 나빠 더욱 괴롭다. 세상이 싫다’라고 쓰여 있었다. 경찰조사에서 김석규는 ‘눈이 나쁘다는 이유로 번번이 일자리에서 쫓겨났다. 여러 사람을 살해하고 자살하려 했다’고 진술했다.”
사건 나흘째인 10월 23일 오전에는 서울지검 남부지청 김상훈 검사의 지휘로 현장검증이 있었다. 현장검증은 무려 70여 명의 경찰과 의경의 경비하에 진행됐다. 약 한 시간에 걸친 현장검증을 마친 후 김 씨는 ‘숨진 어린 학생들의 명복을 빈다’ ‘부상자들이 속히 회복되기를 바란다’고 말했으나 가족과 사회에 대한 원망은 거두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어린시절 자신과 가족을 두고 가출한 어머니에 대한 원망은 상상 이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김 씨는 ‘초등학교 때 어머니만 가출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화목했던 가정이 어머니의 가출로 깨졌다. 그 후 아버지가 음독자살하고 큰형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때부터 세상이 싫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사건은 나쁜 시력으로 생긴 자괴감과 그로 인한 사회적 절망감이 불특정 다수를 향해 발산된 이른바 ‘묻지마 살인’이었다. 당시만 해도 ‘묻지마 범행’에 대해 생소했던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김석규는 사람이 싫어진 이유에 대해 ‘돈 있는 사람들이 미웠다. 돈 있는 사장들은 내 시력을 이유로 취직한 지 한 달도 안돼 나를 쫓아내곤 했다. 복수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진술했다. 그는 7~8년 전부터 서울과 부산 등지를 오가며 자동차정비공장과 배터리가게, 인형공장, 중국집, 술집 등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한 곳에서 한 달 이상 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한 달 사이에 일곱 번이나 직장을 옮긴 적도 있었다고 한다. 처음 차를 훔쳤을 때는 다른 차와 충돌해 자살할 생각도 했지만 겁이 나서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는 말도 했다. 모든 것을 자포자기한 상황에서 그는 ‘죽기 위해, 사형을 받기 위해 사고를 쳤다’고 말했다.”
김 씨는 모든 조사를 마친 후 “시력이 나쁜 나를 낳은 어머니가 원망스럽다. 희생자들에게는 뭐라 할 말이 없다”는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그해 11월 22일 서울지법 남부지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김 씨는 이듬해 6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신체적, 가정적 환경 때문에 사회 적응을 제대로 못한 것은 사실이나 아무런 원한이 없는 무방비 상태의 시민들을 살상한 범죄행위는 용서될 수 없다. 또 범행 당시 사물을 판별할 능력, 의사결정 능력이 없는 심신미약 상태에 있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재판부의 종합적인 판단이었다.
김 씨는 27세의 나이로 1997년 겨울 교수대에 올랐다. 그는 수감생활 내내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참회하며 지냈다고 알려졌는데 죽음을 앞둔 순간 교도관과 종교위원에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깨우쳐줘 고맙습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