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CSI의 한 장면. | ||
길가에 정차돼 있던 영업용 택시에서 갑자기 ‘펑!’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 검은 연기와 함께 화염이 치솟아 올랐다. 택시는 순식간에 거센 불길에 휩싸였다.
10여 분 뒤 우연히 그 곳을 지나가던 차량 운전자에 의해 화재신고가 접수됐다. 소방차가 출동했고 진화작업이 이뤄졌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전소된 차량에서는 두 구의 사체가 발견됐다. 불에 타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단순 차량폭발사고로 종결될 뻔 했던 이 사건은 경찰수사에 의해 그 무서운 전모가 드러나게 된다. 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사건은 80년대 초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일명 ‘제주판 패륜살인사건’이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섬 제주도에서 펼쳐진 기막힌 살인사건, 그 현장 속으로 들어가보자.
현장에는 관할인 서귀포경찰서 형사들이 급파됐다. 우선 당시 상황에 대한 김 연구관의 얘기를 들어보자.
“사망자는 20대 여성과 50대 남성이었다. 신원확인 결과 이들은 박숙녀 씨(가명·25)와 신규복 씨(가명·51)로 드러났다. 박 씨는 제주 OO택시 소속 운전기사로 그날도 사고차를 운행 중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조사 결과 사망한 두 사람은 전혀 친분이 없었다. 정황상 신 씨는 승객이 분명했다. 가장 큰 의문은 화재원인이었다. 하지만 뚜렷한 원인을 밝혀낼 수 없었다. 결국 경찰은 택시가 운행 중 차량에 장착돼 있던 LP가스 연료통이 폭발해서 발생한 사고로 판단했다.”
하지만 멀쩡하게 운행하던 영업용 택시의 연료통이 터진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화재사고로 단정짓기에는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현실로 다가왔다.
사체를 부검한 결과 이상한 점이 발견됐다. 사망자들의 머리 부분에는 모두 함몰된 흔적이 있었다. 둔기로 맞아서 생긴 것이 분명했다. 두 사람이 비슷한 부위에 동일한 모양의 상처가 있다는 점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특히 두 사람의 머리를 함몰시키는 데 이용된 흉기가 같은 종류라는 점은 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즉시 수사팀이 꾸려졌다. 사고가 아닌 살인사건이라고 결론지은 수사팀은 피해자들의 사건 당일 행적을 훑어나갔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아쉽게도 목격자는 없었다. 하지만 탐문수사 결과 사건 당일 신 씨가 아들을 만나러 간다며 집을 나섰다는 중요한 진술이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레 아버지를 잃고 큰 슬픔에 빠져 있는 신 씨 가족을 조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족들이 펄쩍 뛸 것은 너무도 자명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인들의 기억이 희미해지고 수사는 더욱 어려워질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때문에 수사팀은 사건 당일 신 씨의 아들 신종남 씨(가명·28)를 은밀히 조사했다.”
신종남은 전직 택시기사였다. 하지만 수개월 전 실직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신종남을 용의선상에 올릴 수는 없었다. 아버지를 살해할 만한 정황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변인들에 따르면 신 씨 부자는 갈등이 없었고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 비록 신 씨가 실직상태로 빈둥거리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우려할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망한 신 씨가 아들을 만나러 나가서 변을 당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시간적으로 볼 때도 신종남은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 수사팀으로서는 신종남을 용의선상에서 배제시킬 수 없었다. 그리고 끈질긴 탐문수사 끝에 결정적인 진술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사건 당일 오후 4시 30분께 남제주군 안덕면 화순리에 있는 한 구멍가게에 어떤 청년이 와서 석유를 사갔다는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시각은 택시에 불이 난 시각과 거의 비슷한 시각이었다. 그리고 그 가게는 사건 현장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가게 주인은 그 청년이 택시를 직접 몰고와서 석유 1되(1.8ℓ)를 사가지고 황급히 돌아갔다고 했다. 가게 주인으로부터 청년의 인상착의에 대해 물어보던 수사팀은 온몸에 전율을 느껴야 했다. 바로 신종남이 떠올랐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사진으로 확인한 결과 석유를 구입한 청년은 신종남이었다.”
신종남에 대한 의심은 이제 확신으로 변했다. 택시기사를 그만둔 신 씨가 뜬금없이 영업용 택시를 몰았다는 점도 그렇지만 한꺼번에 많은 분량의 석유를 사갔다는 점은 더욱 납득이 되지 않았다.
수사팀은 사건 당시 신종남이 실직상태로 수입이 없었던 점에 주목했다.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에 생활비나 용돈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을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의 재산이나 돈을 노리고 범행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하에 수사를 진행하던 수사팀은 얼마 후 더욱 놀라운 사실을 확인하기에 이른다.
사망한 신 씨가 거액의 보험에 가입돼 있었던 것이다. 조사 결과 신 씨는 사망시 6000만 원을 받을 수 있는 생명보험에 가입돼 있었다. 수사팀이 주목한 것은 신 씨가 보험에 가입한 시기였다. 신 씨가 보험에 가입한 날은 그해 8월로 1회당 7만 4900원씩 3회를 불입한 상태였다. 수사팀은 보험에 가입한 지 넉 달도 채 되지 않아 신 씨가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에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신종남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그는 펄펄 뛰며 범행을 극구 부인했다. 하지만 사건 당일 아버지를 만난 사실과 타인의 영업용 택시를 몰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도 하지 못했다. 특히 뜬금없이 석유를 구입한 이유와 사용처 등에 대해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신종남이 아버지를 상대로 그런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이유는 무엇일까. 범행동기는 수사팀의 예상대로 보험금을 노린 것으로 드러났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택시기사로 근무하던 신종남은 7월에 실직한 상태였다. 갑자기 회사에서 쫓겨난 신종남은 그해 8월 아버지 명의로 몰래 생명보험에 가입했다. 사망시 6000만 원을 수령할 수 있는 보험이었다. 그리고 신종남은 세 차례에 걸쳐 보험금을 납부했다. 하지만 그후가 문제였다. 그나마 수중에 있던 돈은 유흥비 등으로 탕진하고 생활비도 바닥이 나 보험금 납부는 꿈도 못꾸게 됐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신종남은 무서운 범행을 계획하게 된다. 아버지를 사고로 위장살해한 뒤 보험금을 수령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던 차에 12월 8월 오전 11시경. 신 씨가 아들 신종남의 집을 찾아왔다. 신종남의 진술에 따르면 아버지 신 씨는 “급하게 쓸 데가 있으니 150만 원만 마련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드디어 적당한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신 씨는 범행을 결심하고 아버지에게 교묘하게 거짓말을 시작했다. 이어지는 김 연구관의 얘기.
“신종남은 아버지에게 ‘지금 수중에 돈이 없다. 하지만 중문동에 사는 친한 친구에게 빌릴 수 있다. 같이 가자’고 말했다. 그리고는 아버지와 함께 택시를 잡아타고 서귀포시 중문동으로 향했다. 중문동에 도착한 신종남은 친구를 찾는 척하다가 택시로 돌아와서 또다시 거짓말을 했다. ‘가보니 친구가 집에 없다. 한라산에서 표고버섯 재배하는데 가있다고 하니 밭으로 가보자’고 한 것이다. 신종남은 택시기사인 박숙녀 씨에게 대절요금을 충분히 주겠다고 약속했다. 두 사람의 다정한 대화를 통해 부자지간임을 알고 있었던 박 씨로서는 아무 의심없이 신종남의 요구에 응했다.”
오후 4시께. 택시가 중문동 제2회 횡단도로 입구에서 한라산 쪽으로 약 16km 떨어진 한라산 해발 600m 지점에 있는 도로변에 이르렀을 때였다.
신종남은 택시기사 박 씨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말한 뒤 아버지와 함께 택시에서 내렸다. 그리고 “친구가 있는 곳으로 가자”며 아버지를 도로변에서 70여m 떨어진 숲속으로 유인했다.
“종남아,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냐?”
“다 왔어요.”
“근데 종남아, 네 친구가 돈을 빌려준다고 하더냐?”
“….”
아무 답변이 들리지 않은 그때였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신 씨가 쓰러졌다. 신종남이 돌로 아버지의 머리를 내리친 것이었다. 신종남은 그 자리에 고꾸라진 아버지의 머리를 재차 내리쳤다. 신 씨는 비명도 못지르고 절명했다.
신종남은 아버지의 사체를 그 자리에 두고 혼자 숲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택시로 향했다. 혼자 돌아오는 신종남을 발견한 택시기사 박 씨가 이상한 듯 물었다.
“어째 혼자 오세요?”
“먼저 내려 갑시다. 아버지는 일 좀 보고 오신다네요.”
박 씨가 차를 출발시키려 할 때였다. 신종남은 들고 있던 돌덩이로 박 씨의 머리를 내리쳤다. 아버지의 죽음이 드러나면 목격자인 박 씨가 그냥 있을 리 없다고 우려, 택시기사까지 살해한 것이다. 박 씨의 머리를 여러 번 내리친 신종남은 그녀가 죽었다고 판단하고 박 씨를 택시 뒷좌석에 옮겨 실었다. 그리고 숲속에 유기시켜놨던 아버지의 사체를 끌고 와서 박 씨와 마찬가지로 택시 뒷좌석에 실었다.
신종남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증거인멸이었다. 신종남은 애초부터 범행 후 불을 질러 LPG폭발 사고로 꾸미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현장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안덕면 화순리의 한 구멍가게로 가서 석유를 사온 그는 범행 현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신도리로 향했다. 그리고 신도리에서 차를 세운 그는 택시기사 박 씨를 운전석에, 아버지는 조수석에 앉혀놓는 치밀함을 보였다. 운행도중 자연스레 사고가 발생했음을 드러내기 위한 술수였다. 구입해온 석유를 차량 내부에 뿌린 신종남은 불을 지른 뒤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온 것으로 드러났다.
돈에 눈이 먼 나머지 친아버지를 상대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른 신종남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뒤늦게 눈물을 흘렸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존속살인 및 사체유기, 방화 등의 혐의로 기소된 신종남은 사형을 선고받고 1990년 12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수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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