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세븐 데이즈>의 한 장면. | ||
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사건은 20여 년 전 ‘혜진이를 돌려다오’라는 유행어까지 낳으며 온 국민을 공분케했던 일명 ‘원혜진 양 유괴살해사건’이다.
“상업은행에 계좌를 개설했으니 혜진이를 살리고 싶으면 500만 원을 입금하세요.”
범인은 원 양을 유괴한 후 집으로 전화를 걸어 ‘몸값’을 요구했다. 경찰에 신고할 경우 원 양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는 단서도 뒤따랐다.원 양의 부모는 딸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이틀 뒤 범인의 요구대로 요구액 500만 원을 입금했다. 범인이 알려준 계좌는 당시 한국상업은행 우○○ 이름으로 개설된 계좌였다.
이날 오후 범인은 중구 태평로의 한 건물 지하에 있는 현금 자동인출기에서 총 다섯 차례에 걸려 250만 원을 인출했다. 그러나 ‘입금하면 아이를 돌려보내겠다’는 애초의 약속과 달리 범인은 혜진이를 돌려보내지 않고 연락을 끊었다. 생사도 모른 채 숨막히는 나날이 이어졌다. 결국 12월 7일 원 양의 부모는 은행 측에 지불정지를 요청했다. 그러자 한동안 연락이 없던 범인은 12월 17일부터 다시 협박전화를 해오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저 애기 아빤데요.”
“왜 지불정지 안 풀었어요?”
“애기하고 한 번이라도 통화해야죠. 아저씨.”
“내가 아주머니한테 그랬다고요. 지불정지 풀면 바로 꼬마 있는 장소를 얘기해주겠다고. 얘기해주면 바로 나오시면 된다고 얘기를 했거든요.”
“그래도 아저씨….”
범인은 추가로 돈을 인출하기 위해 12월 19일 태평로의 한 현금인출기에 나타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공범이 있다고 판단한 당시 수사팀은 지불중지로 현금 인출을 하지 못한 채 돌아가는 범인을 미행하다 범인을 놓치고 말았다.범인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2월 23일 오후였다. 범인은 상업은행 상도동 지점에 나타나 현금 인출을 시도하다가 경찰의 요청으로 사전 조작된 자동인출기가 카드를 삼켜버리자 그대로 달아났다.
그로부터 원 양이 유괴된 지 한 달이 지나도록 수사는 이렇다 할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결국 이듬해 1월 6일 수사팀은 공개수사로 전환한다. 그리고 수사팀은 범인이 남긴 흔적을 통해 용의자를 압축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가장 유력한 단서는 범인의 목소리였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당시 수사를 담당한 강남경찰서는 서울대 어학연구소에 범인의 협박전화 분석을 의뢰했다. 그 결과 범인이 경기도 말씨를 쓰는 키 170cm의 20대 초반 남성이며 말의 논리성으로 보아 고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지능범일 가능성이 높다는 통보를 받았다. 특히 수사팀은 범인이 원 양 아버지를 자주 봐왔고 또 다른 범인이 있다고 밝힌 점에 주목, 2명 이상의 면식범에 의한 범행일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수사를 진행했다.”
실제로 범인은 원 양 아버지와의 협박 전화에서 ‘하루에 한 번은 못보더라도 이틀에 한 번씩은 계속 계단에서 봤을 거예요’ ‘제가 처음부터 그렇게 한 걸 후회해요’ ‘내가 너무 어린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사람 말을 듣다 보니까 이렇게 된 것 같아요’라는 말을 했다.
수사팀은 전자부품 오퍼상을 경영하는 원 양의 아버지가 부품 거래관계로 집 근처의 시계회사에 자주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용의자를 찾는데 주력했다. 특히 범인이 예금 계좌를 개설할 때 예금주란에 쓴 ‘우○○’이라는 이름이 문제의 시계회사에 이력서를 제출한 적이 있는 사람의 이름이라는 점에 주목, 탐문수사에 들어갔다. 동시에 수사팀은 시계 회사 종업원과 원 양 아버지의 주변인물 등 90여 명의 필적 감정을 의뢰했다.
하지만 용의자로 지목된 10여 명의 음성분석에서도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한 채 답답한 나날이 계속됐다. 결국 공개수사 나흘째인 1월 9일 원 양의 아버지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에게 딸을 찾도록 도와줄 것을 호소하는 탄원서를 보냈다.
사건이 장기화되자 유괴된 원 양 찾아주기 범 시민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당시 수사본부장을 맡은 강남경찰서 김황일 서장이 직접 나서 “범인의 음성을 들으시고 아는 음성이 있으면 저희들에게 신고를 해주세요”라는 협조요청을 하기도 했다.
시민들은 수십만 장의 전단지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게시하고 임시 반상회 등을 통해 주민들에게 알리는 등 ‘혜진이 찾아주기’ 운동에 동참했다. 그런데 원 양이 유괴된 지 약 40일째 되던 1월 12일. 서울 영동대교 인근에서는 한 통의 유서가 발견됐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오전 7시 50분경 서울 영동대교 남단 200m 지점 비상 전화박스 옆 인도에서 한 통의 유서가 발견됐다. 원 양 유괴사건의 범인임을 자처하는 함정식 씨(가명·25)의 유서였다. 수사팀은 현장에 남겨진 유류품과 유서의 필적 등을 감정한 결과 함 씨의 것이 맞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특히 수사팀은 함정식이 그동안 수사팀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해온 인물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리고 수사팀은 함정식이 남긴 유서의 필적과 범인이 온라인 계좌 개설 때 은행에 남긴 필적이 동일하다는 점과 협박전화의 음성이 함 씨와 같다는 사실 등에 근거해 함 씨를 혜진 양 유괴사건의 범인으로 단정했다.”
유서에는 자신이 혜진 양 사건의 범인이라는 것과 ‘더이상 살아야 할 가치가 없어 이 길을 택한다. 혜진이가 있는 곳은 나도 모른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수사팀은 비상이 걸렸다. 정황상으로는 범인은 유서를 남긴 뒤 한강에 투신자살을 한 것으로 보였다. 수사팀 내에서는 범인의 위장 여부를 놓고 비상회의가 열렸다. 수사팀은 유력한 용의자인 함 씨가 당시 만삭의 아내를 두고 있다는 점과 함 씨가 투신하는 장면을 봤다는 목격자가 없다는 점에 주목, 수사를 교란시키기 위한 위장자살극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진행했다.
수사팀은 함 씨의 사체 수색작업을 진행하는 동시에 함 씨의 처가가 있는 강원도 홍천 등 함 씨의 연고지로 형사대를 급파, 함 씨의 소재파악에 나섰다. 하지만 당시 출산을 하기 위해 친정에 내려가 있던 함 씨의 부인은 “남편이 1월 10일 밤 12시경 전화를 걸어와서 ‘애를 잘 낳아서 부디 잘 키우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함 씨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했다. 공범을 추적하는 수사도 녹록지 않았다. 수사팀은 잠수부까지 동원, 영동대교 일대에 대한 정밀 수중수색 작업을 벌였으나 함 씨의 사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물속에 줄을 띄우는 방법으로 이 잡듯 수색을 했음에도 함 씨의 사체가 나오지 않자 위장 자살극으로 결론내린 수사팀은 함 씨의 연고지와 주변인물들을 상대로 추적작업에 집중했다.
그러던 9일 밤 수사팀은 함 씨가 경찰 연행도중 달아난 뒤 중학교 동창 A 씨를 찾아가서 함께 술을 마셨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A 씨로부터 이날 함 씨가 ‘내가 원 양을 유괴했다’는 말을 했다는 진술도 확보했다.위장 자살극은 물론 함 씨의 범행 후 행적에 대해 낱낱이 파헤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함 씨에 대한 경찰 수사망은 점점 옥죄어오고 있었다.
더 이상 피할 방도가 없다고 판단한 함 씨는 결국 1월 15일 새벽 경찰에 자수했다. 사건발생 43일 만이었다.함 씨는 경찰조사에서 “지난해 12월 3일 혜진이를 유괴한 뒤 훔친 빨간색 르망 승용차 뒤 트렁크에 싣고 다녔다. 다음날 트렁크를 열어보니 혜진이가 숨져 있어 겁이 나 사체를 암매장하기로 마음먹었다. 암매장 장소로는 평소 인적이 드문 데다가 처가를 드나들면서 알아두었던 홍천군의 한 골짜기를 택했다”고 진술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혜진 양은 강원도 홍천군 널미고개 중턱에서 처참한 사체로 발견됐다. 함정식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범행 후 널미고개 숲속에 혜진 양을 버린 뒤 나뭇가지로 덮어 놓았다가 40일이 지난 14일 저녁 6시경 현장을 다시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 처음 사체를 유기한 곳에서 100m 떨어진 골짜기로 사체를 옮긴 뒤 흙으로 덮어 암매장했다는 것이었다. 혜진 양은 유괴될 당시 입고 있었던 노랑 바탕에 빨간 꽃무늬 점퍼와 검정색 골덴바지, 분홍 가죽장화를 신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트렁크 안에서 질식사했다는 함 씨의 애초 진술은 하루 만에 거짓으로 드러났다. 수사팀이 타살의혹을 강하게 제기하자 함 씨는 “혜진이의 손발을 묶고 입에 재갈을 물려 뒷 트렁크에 넣어둔 채 삼성동의 공터에 하룻동안 방치했다. 다음날 오전 8시경 몸부림치는 혜진이를 목졸라 살해했다”고 실토했다. 실제로 부검을 집도한 국과수에서는 ‘기도 내에서 이물질이 나온 것으로 보아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보내왔다.
결국 함 씨는 원 양을 살해한 후에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위장, 원 양의 부모를 상대로 협박을 해왔던 것이었다.1월 19일 원 양 사건의 현장검증이 실시됐다. 이어지는 김 연구관의 얘기.“현장검증은 사법경찰 30여 명과 정경 1개 소대 등 경찰병력 70여 명이 동원된 가운데 서울지방검찰청 동부지청 구공헌 검사의 지휘하에 약 7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현장에는 100여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 자수 당시 입고 있던 검정색 방한복 차림으로 나타난 함 씨는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범행을 재현, 원 양의 가족과 주민들의 분노를 샀다. 특히 이날 현장검증에서는 함 씨가 원 양을 낭떠러지 아래로 던질 때 실족사로 위장하기 위해 결박되어 있던 끈과 입에 물렸던 재갈을 일부러 풀었다는 사실이 추가로 밝혀지기도 했다.”
범행동기에 대해 함 씨는 “87년 11월 운전기사로 취직한 지 3일 만에 교통사고를 내 변제비용 100만 원을 마련하기 위해 유괴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함 씨는 범행 사흘 후 결혼식까지 올려 국민들을 공분케 했는데 원 양 부모에게 받은 돈으로 결혼식을 치른 것으로 드러났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사실은 당시 그의 부인이 출산을 앞둔 만삭의 임산부였다는 사실이었다. 함 씨는 단란하게 살던 남의 가정을 처참히 깨버리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려 했던 파렴치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미성년자 납치 유인 살해와 사체유기 등의 혐의로 기소된 함 씨는 법정에서 사형을 확정받고 89년 여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