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사건은 24년 전 한 일본인이 국내에 들어와서 벌인 위장 자살사건이다. 당시 외국인의 ‘원정자살’로 주목받았던 이 사건은 특히 파산 위기에 처한 한 가장이 가족들에게 보험금이라도 타게 해주기 위해 꾸민 자작극으로 드러나 충격을 줬다.
호텔 앞마당은 피바다를 방불케했다. 현장에 모여든 투숙객들은 그 참혹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남자는 일본인 야마모토 씨(가명·46)였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우선 당시 상황에 대한 김 연구관의 얘기를 들어보자.
“조사결과 야마모토 씨는 관광 목적으로 5월 초 한국에 입국했으며 동행자는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나흘째 이 호텔에 투숙 중이었다. 그는 자신이 투숙하고 있던 12층 객실에서 떨어져 사망한 것으로 보였다. 특이한 것은 사망 당시 그의 양 손이 벨트로 묶여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또 그는 잠옷 차림이었는데 잠옷 단추가 떨어져 나가는 등 옷 매무새가 흐트러져 있었다.”
우선 수사는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밝히는 것이 관건이었다. 수사팀은 야마모토 씨가 묵었던 객실로 올라갔다. 방안은 엉망이었다. 옷가지와 소지품들이 바닥에 흐트러져 있었으며 가방이며 화장대 서랍 등은 모조리 열려 있었다. 누가 뒤진 흔적이 역력했다. 바닥에는 화장품 병이며 온갖 집기와 야마모토 씨의 옷에서 떨어져 나간 단추 등이 나뒹굴고 있었고 침대 시트는 마구 흐트러져 있었다. 또 객실 베란다 문도 활짝 열려 있었다. 분명 사건 전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음을 암시해주고 있었다.
따라서 수사팀들 사이에서는 타살이라는 쪽에 의견이 모아졌다. 방 안에 금품을 뒤진 흔적이 있다는 점, 추락 당시 야마모토 씨의 손이 허리 뒤로 결박되어 있었다는 점, 또 야마모토 씨의 신체 곳곳에서 한바탕 몸싸움을 한 흔적이 발견됐다는 점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정황상 수사팀은 금품을 노리고 침입한 외부인에 의한 강도살인 사건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반항하는 과정에서 야마모토 씨가 실수로 추락했거나 범인의 위협을 피하다 떨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또 범인이 일부러 추락사를 위장해 야마모토 씨를 살해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원한이 있는 면식범이 저지른 계획범행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수사는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용의선상에 올릴 만한 인물이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타살이라면 분명 목격자가 있었을 터였다. 특히 도심 한복판에 있는 호텔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이라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사건에는 목격자가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현장인 객실에서도 범인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방안이 쑥대밭이 되어 있었지만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지문이나 족적, 머리카락 등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아무리 지능범이라 할지라도 그 정도로 깨끗하게 범행을 저지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수사는 난관에 부딪혔다. 정황상 타살이 분명한데 범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수사팀은 호텔 관계자와 투숙객들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진행했다. 또 사건 전 야마모토 씨의 동선을 샅샅이 훑는 것은 물론 그와 접촉한 인물 및 호텔 주변을 배회한 수상한 사람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호텔 직원들은 야마모토 씨가 호텔에 투숙한 후 외부 출입을 거의 하지 않은 채 방안에만 있었다고 증언했다. 식사도 모두 호텔 내에서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호텔을 떠난 적이 없다는 얘기였다. 관광 목적으로 입국했지만 관광을 다니지 않았던 것이었다. 당연히 그가 외부인과 접촉하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투숙한 날 이후 항상 혼자였다고 호텔 관계자들은 증언했다.
그렇다면 야마모토 씨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를 기억하는 호텔 직원들은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호텔 직원들은 그가 특별히 불안한 기색을 보이는 것도 아니었으며 자신들에게 특별히 뭔가를 요구하거나 부탁한 적도 없었다고 진술했다. 여느 관광객과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한 일본인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은 채 답답한 날들이 계속됐다. 하지만 모든 단서는 현장에서 나오는 법이었다. 수십 차례에 걸쳐 현장 조사를 진행하던 수사팀은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통상적인 강도살인사건과 비교하던 수사팀이 가장 의문을 가진 것은 외부 침입 흔적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묵는 호텔의 특성상 호텔 측은 외부인의 출입을 항상 주시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호텔 시스템을 점검한 수사팀은 외부인이 객실에 함부로 들락거리기는 어렵다고 판단됐다.
더욱 이상한 점은 객실상황이었다. 수사팀은 사건 직전 야마모토 씨가 묵던 객실이 마치 강도를 당한 듯 어지럽혀져 있었지만 정밀 관찰한 결과 특별히 사라진 금품은 없었다. 수사팀은 이 점에 주목했다. 실제로 야마모토 씨의 소지품들은 대부분 객실 안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또 그가 입국 당시 착용하고 있었던 고가의 패물도 서랍 깊숙한 곳에서 발견됐다. 금품을 노린 강도살인사건이라면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상한 점은 그뿐이 아니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도대체 야마모토 씨가 멀쩡한 벨트에 두 개의 구멍을 추가로 뚫어달라고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수사팀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추리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의문은 그리 어렵지 않게 풀렸다. 수사팀이 직접 실험해본 결과 스스로 자신의 손목을 뒤에서 결박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벨트에 구멍을 추가로 몇 개 더 뚫을 경우 자신의 허리 뒤에서 스스로의 손목을 결박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수사팀이 이 사건을 야마모토 씨의 자살극일지도 모른다고 추정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하지만 자살이라면 그 동기가 의문이었다. 일본인인 야마모토 씨가 굳이 이국땅에 와서 자살을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를 두고 수사팀 내부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얼마 후 자살에 힘을 실어주는 더욱 결정적인 정황증거들이 속속 발견되기 시작한다. 이어지는 김 연구관의 얘기.
“야마모토 씨의 신상에 대해 조사하던 수사팀은 일본 경찰에 수사협조를 의뢰해둔 상태였다. 그런데 인터폴을 통해 놀라운 정보가 들어왔다. 야마모토 씨가 일본에서 거액의 생명보험에 가입했다는 사실이었다. 야마모토 씨는 보험금 7000만 엔의 해외여행상해보험에 가입하는 등 약 5년에 걸쳐 4개의 생명보험에 가입한 것으로 드러났는데 재해 사망시 그의 가족이 받을 수 있는 보험금은 무려 1억 5000만 엔에 달했다. 또 조사결과 야마모토 씨는 사건이 발생하기 약 20일 전에도 한국에 들어와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수사팀은 야마모토 씨가 수년 전 사업실패 등으로 심각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어왔다는 점에 주목했다. 조사결과 일본에 처와 3명의 자식을 두고 있는 야마모토 씨는 사실상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산 상태였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수사팀은 막다른 골목에 처한 야마모토 씨가 벌인 자작극으로 결론내렸다. 입국 후 그의 행적을 확인한 수사팀은 입국 목적도 순수 관광이 아닌 원정자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경제적으로 회생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야마모토 씨는 5년 전부터 다수의 보험에 가입하는 등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왔다. 그는 자신이 사고나 재해로 사망할 경우 처를 비롯한 가족들이 보험금을 수령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 같다. 야마모토 씨는 자살하면 보험금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강도살인을 당한 것처럼 위장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당시 수사팀이 내린 결론이었다.
결국 이 사건은 사업실패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한 일본인 가장이 가족들에게 보험금이라도 타게 해줄 목적으로 꾸민 엽기적 사건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야마모토 씨는 하필이면 왜 타국에서 자살극을 벌여야 했을까. 그 이유에 대해 당시 수사관계자들은 “일본에서 위장자살극을 벌일 경우 수사기관이 조사할 가능성이 높고 그렇게 되면 발각될 위험도 크다고 판단하고 이웃 나라인 한국을 택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야마모토 씨가 자신의 죽음을 타살로 위장하려 한 부분은 우리의 보험범죄와 상당히 다르다. 이에 대한 김 연구관의 설명을 들어보자.
“국내 보험 관련 범죄는 자신이 보험금을 수령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보험금을 노리고 처자식을 살해하는 엽기 사건도 자주 발생한다. 하지만 이 사건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가면서 가족들에게 보험금을 남겨주려 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사건은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했다. 타국 사람들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일본인 특유의 정서적인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사건 자체에 대해 의문을 품은 우리 수사팀의 정밀 추가조사가 없었더라면 이 사건은 외국인을 상대로 한 강도살인 사건으로 묻혀졌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철저히 강도살인사건으로 위장했다. 본인도 외국인이 주인공인 사건에 대해 이렇게 정밀한 수사가 진행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