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추격자>의 한 장면. | ||
밤 12시 20분경이었다. 한 중년여성이 비틀거리며 파출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근무하던 A 경사가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여인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녀의 몸에서는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더구나 여인의 손에는 무려 30cm가 넘는 피묻은 회칼이 들려 있는 게 아닌가. 여인은 한 손에는 피묻은 칼을, 다른 손에는 지갑을 움켜쥐고 경찰을 향해 비틀비틀 다가왔다. 그리고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사건은 약 7년 전 발생한 일명 ‘면목동 슈퍼마켓주인 살인사건’이다.
우선 당시 상황에 대한 김원배 연구관의 얘기를 들어보자.
“여인은 119 구급차에 실려 동대문구에 있는 성바오로 병원으로 긴급후송됐다. 복부 등을 날카로운 흉기에 찔린 상태로 후송 당시 이미 의식이 없었다. 즉시 응급치료를 받았지만 급소를 찔려 워낙 출혈이 심해 손을 쓸 수가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수술까지 받았으나 그녀는 결국 다음날 자정께 사망하고 말았다.”
대체 그날 밤 이 여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여인이 죽기 직전까지 움켜쥐고 있던 손지갑에 들어있던 돈은 고작 8만 1000원이었다. 이 여인은 10만 원도 되지 않는 이 돈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와 맞섰던 것일까.
평화롭기만 하던 한 여름밤에 발생한 이 엽기적인 사건은 즉시 경찰서 상황실로 보고됐고 20여 명의 형사들이 투입돼 수사팀이 꾸려졌다. 가장 시급한 일은 환자의 신원과 사건 경위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탐문조사 결과 이 여인은 중랑구 면목2동에 있는 ○○슈
퍼마켓 주인 정경자 씨(가명·53)로 밝혀졌다.
정 여인의 슈퍼마켓에서 파출소까지의 거리는 대략 60m 정도였는데 피를 어찌나 많이 흘렸는지 파출소로 향하는 도로 바닥 곳곳에는 정 여인이 흘린 피가 묻어있었다. 조사결과 정 여인이 들고 온 칼에 묻은 혈흔도 정 여인의 것으로 판명됐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장 확인이었다. 수사팀은 즉시 정 여인이 운영하던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가게 내부는 피바다였다. 그리고 여기저기 나뒹굴어 있는 물건들과 동전들로 엉망이었다. 실내등이 켜져 있었으나 대낮에도 가게 내부는 어두침침했다.
수사팀은 과학수사요원을 대동해 현장 재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가게 내부에서 검정색 테이프가 감겨있는 칼집 1점과 쇼핑백,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베이지색 슬리퍼 한 짝을 수거했다. 그리고 수거한 물품들에 대해 정밀 지문감식을 의뢰했다. 뿐만 아니라 범죄 공용물 및 유류물의 출처 확인에 들어갔다. 수사팀은 정 여인이 들고 온 생선회칼 정품 수입업체 및 유통구조를 파악하는 동시에 주방용기구 판매상 등을 상대로 최근 문제의 칼을 구입해간 자 등에 대한 탐문수사를 했다. 하지만 용의선상에 올릴 만한 인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답답한 날들이 계속됐다.
사건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수사팀은 정 여인의 주변인물에 대한 탐문수사도 병행했다. 그러나 정 여인의 주변인물 중 수상한 사람은 발견되지 않았다. 특히 정 여인은 누구에게 원한을 살 만한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정 여인은 17년 전 남편과 사별한 후 하계동의 임대주택에서 장성한 아들 2명과 같이 살고 있었다. 생활력이 강한 정 여인은 우유배달 등을 하며 홀로 두 아들을 키워왔는데 주변에서도 또순이로 소문이 자자했다. 성품이 좋고 반듯한 데다가 남편 없이 홀로 두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정 여인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도 상당히 좋았다. 정 여인은 갖은 고생을 해가며 모은 돈으로 보증금 1000만 원, 월세 60만 원짜리 점포를 얻어 7년 전부터 가게를 운영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말이 슈퍼마켓이지 동네 구멍가게나 다름없었다. 정 여인은 오전 9시부터 자정까지 장사를 한 뒤 마지막 버스를 타고 귀가했는데 하루도 쉬지 않고 가게 문을 열었다고 한다. 타인의 빚보증으로 수천만 원의 채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들 다 쉬는 휴일에도 꼬박꼬박 가게 문을 열고 장사를 했지만 정작 손에 쥐는 돈은 거의 없었다. 하루 매상의 80% 이상이 고스란히 일수돈으로 지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주변인들에 따르면 정 여인은 채무에 시달리면서도 정작 자신이 타인에게 빌려준 돈은 받지 못해 더욱 어려운 생활을 해오고 있었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목격자를 찾는 일이었다. 사건 발생 무렵 현장 인근에 있었던 사람들을 찾아 탐문수사를 벌이던 수사팀은 한 주민으로부터 사건 발생 시각에 정체 불명의 남성이 청색 스쿠프 승용차를 타고 황급히 골목을 빠져나가는 것을 봤다는 진술을 확보하게 된다. 골목길에서 좌회전을 하려고 하는데 슈퍼마켓 쪽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스쿠프 승용차와 충돌할 뻔했다는 얘기였다. 짜증을 내며 시비가 붙을 뻔했지만 스쿠프 운전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급하게 차를 몰고 사라졌다는 진술도 확보됐다.
“조사결과 한태민은 결손가정에서 평탄하지 않은 성장과정을 거친 인물이었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아버지, 누나와 생활하던 한 씨는 누나가 결혼하고 아버지마저 재혼하자 극심한 방황을 해온 것으로 확인됐다. 수사팀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얼마 전부터 한태민은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 위해 서울과 안산 등을 오가며 친구와 사회 선후배 집을 전전해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한태민의 동선을 파악한 수사팀은 동두천 일대에서 잠복, 스쿠프 승용차를 운행 중인 그를 격투 끝에 검거했다.”
한 씨는 펄쩍 뛰며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다. 하지만 그간의 행적수사와 목격자 진술, 그리고 현장 유류품에서 극적으로 채취한 지문 등을 토대로 추궁하자 고개를 떨궜다.
수사팀은 동두천 야산과 배수로 등지에서 한 씨가 범행 당시 입었던 피묻은 옷가지와 차량 시트 등을 증거물로 수거함으로써 사건을 종결지었다. 사건 발생 6일 만이었다.
조사결과 드러난 한 씨의 범행동기는 자동차 할부금 마련이었다. 한 씨는 범행 두 달 전 중고자동차매매센터에서 할부금 200만 원에 스쿠프 승용차를 구입했다. 그러나 수입이 없었던 한 씨는 할부금을 지불하지 못해 독촉에 시달리고 있었다. 차 할부금을 지불할 길이 막막하자 한 씨는 결국 위험한 범행을 계획하게 된다. 한 씨의 애초 계획은 강남의 유흥가에서 술 취한 사람들을 납치해 금품을 강취하는 것이었다. 8월 3일 낮 서울 성동구의 한 주방용품점에서 생선회칼 한 자루를 6만 5000원에 구입한 한 씨는 칼집과 칼 자루에 검정색 테이프를 감는 등 범행을 준비했다.
당시 한 씨는 입영을 코앞에 두고 있던 상황이었다. 한 씨는 범행 후 입대하면 수사망에 걸릴 염려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간도 보낼 겸 미장원에 들러 이발을 한 한 씨는 밤이 되자 강남의 유흥가를 돌아다니며 납치 혹은 아리랑치기 대상을 물색했다. 그러나 마땅한 범행대상을 찾지 못했다. 결국 유동인구가 많은 데다가 지리감도 떨어진 강남에서의 범행이 수월치 않다고 판단한 한 씨는 범행대상을 찾아 강북으로 넘어왔고 한적한 면목동 일대를 배회하게 된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당시는 휴가철을 맞아 대부분의 인근 상점들이 문을 닫은 상태였다. 그 시각 주변에는 인적도 없었다. 그때 불이 켜져 있는 조그만 가게 하나가 한태민의 눈에 들어왔다. 바로 정 여인이 운영하는 가게였다. 마침 정 여인은 하루 장사를 끝내고 동전을 세고 있었다. 정 여인을 범행대상으로 지목한 한태민은 비닐 쇼핑백에 회칼을 숨기고 가게로 들어갔다. 물건을 갖다달라고 한 뒤 뒤에서 위협해 돈을 강취할 생각이었다. 가게 입구에서 범행을 할 경우 지나가는 사람에게 발각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한 한태민은 정 여인을 가게 안쪽으로 유인하기 위해 일부러 안쪽에 진열되어 있는 세제를 갖다 달라고 했다. 그리고 가게 안쪽 진열대로 향하는 정 여인을 따라가 준비한 흉기를 들이밀며 위협했다. 그런데 정 여인이 소리를 지르며 반항하자 한태민은 들고 있던 흉기로 정 여인의 흉부와 복부를 마구 찔렀다. 그리고 돈을 찾기 위해 가게 곳곳을 뒤지던 한 씨는 가게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그 길로 자신의 차를 몰고 도주했다.”
범행 후 한 씨는 범행 당시 입었던 옷을 모두 새 옷으로 갈아입고 피묻은 옷과 차량 시트를 곳곳에 나누어 버리는 등 나름대로 철저한 뒤처리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경찰 수사망이 좁혀올 것에 대비, 주민등록상 거주지에는 들어가지 않은 채 배회했다. 그는 며칠간 동두천의 변두리 아파트 신축공사장 공터로 가서 차 안에서 새우잠을 자며 은신생활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 당시 한 씨는 김 연구관에게 “허겁지겁 도주하면서 회칼과 칼집, 비닐쇼핑백 등을 현장에 남겨두었기 때문에 불안했다. 언젠가는 형사들이 나를 검거하러 올 거라는 생각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또 살해된 정 여인의 기구하고 안타까운 사연을 전해들은 한 씨는 죄책감에 못이겨 한동안 굵은 눈물을 보이며 흐느껴 울기도 했다.
하지만 한 씨는 검거 후에도 돌출행동으로 수사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다음날 오전 서울지방법원 북부지원 법정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 중 혀를 깨무는 등 자해를 기도하는가하면 법관의 심문이 끝난 후 서명날인을 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볼펜으로 우측 눈꺼플을 마구 찌르는 등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