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공공의 적>의 한 장면. | ||
“어머니! 무슨 일이에요?”
비명소리를 듣고 건넌방에 있던 큰 아들 김영재 씨(가명·41)가 달려왔다. 안방 문을 열어본 김 씨는 순간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아버지가 피투성이 상태로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김 씨의 아버지는 병원 응급실로 긴급후송됐으나 과다출혈로 도중에 사망하고 말았다. 명백한 살인사건이었다. 피살된 사람은 집 주인이자 학교법인 금룡학원 이사장인 김대성 씨(가명·72)였다.
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사건은 지난 95년 세간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패륜살인사건’이다.
당시 상황에 대한 김 연구관의 얘기를 들어보자.
“최초 목격자는 부인 이명자 씨였다. 이 씨는 ‘남편은 나와 함께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다 10시 30분께 먼저 안방에 들어가서 잤다. 혼자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안방에서 ‘울컥울컥’하는 이상한 소리가 나서 들어가 보니 남편이 목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고 설명했다. 현장엔 외부인의 침입 흔적이 있었다. 안방 화장실 창문틀이 뜯겨져 있었고 안방과 베란다 곳곳에는 핏자국이 흩어져 있었다. 수사팀은 범인이 안방 화장실 창문을 뜯어내고 침입한 것으로 추측했다. 당시 집안에는 이명자 씨 외에도 사건발생 20여 분 전 귀가한 김 씨의 큰아들 김영재 씨가 있었다. 하지만 이들 누구도 집안에 이상한 사람이 침입한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평양 출신인 김 씨는 1·4후퇴 때 단신으로 월남, 포목상 등으로 재산을 모은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물이었다. 포목상으로 큰돈을 모은 김 씨는 70년대 후반부터 교육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학교법인 금룡학원을 설립한 뒤 이사장으로 재직해왔다. 당시 김 씨는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 수백억 원대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재력가였다. 수사팀은 김 씨가 월남한 실향민으로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는 점과 현장에 금품이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점 등으로 미뤄 단순강도사건은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사건이 발생한 D 빌딩은 김 씨 소유로 1층부터 5층까지는 디자인학원과 회사 사무실 등 13개 사무실이 입주해 있으며 6층에는 김 씨의 살림집이 있었다. 이 집에는 김 씨 부부와 큰 아들 김영재 씨가 거주하고 있었다. 서울 S 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큰아들은 3년 전 미국에서 유학 중인 아내와 딸을 두고 홀로 귀국, 부모와 같이 살고 있었다.
수사를 진행하면서 수사팀은 두 가지 가능성에 주목했다. 첫 번째는 ‘전문업자’에 의한 청부살인이었다. 발견 당시 김 씨는 예리한 흉기로 오른쪽 목부분이 찔려 있었는데 다른 외상이 전혀 없었다. 손톱이나 다른 부위에서는 방어흔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반항할 틈도 없이 단 한차례 급소를 찔려 살해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일반인에 의한 우발살인이나 보통의 강도살인사건과는 확연히 달랐다. ‘전문가’의 소행으로 보기에 충분했다.
두 번째 가능성은 내부인의 소행.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가장 큰 의문은 범인의 도주경로였다. 일단 수사팀은 범인이 경비원의 눈을 피해 미리 빌딩 옥탑에 잠입한 뒤 안방 화장실 창문을 뜯고 침입했을 가능성은 있다고 봤다. 하지만 도주경로는 오리무중이었다. 현장인 안방에서 외부로 통하는 출입구는 1층 출입문이 유일했다. 따라서 범인이 6층에서 1층 출입문으로 내려와야 했는데 그동안 경비원이나 다른 층 사무실 직원들의 눈에 일체 띄지 않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이쯤되자 수사팀에서는 내부인의 소행일 가능성이 조심스레 제기됐다. 현관문과 비상철제문은 3중 잠금장치로 되어 있어 열쇠가 없이는 내부 출입이 어려울 뿐 아니라 도주 역시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또 이 씨의 건물에는 경비원이 주야로 상주하며 문단속을 철저히 하고 있었다. 그날도 경비원은 ‘줄곧 자리를 지켰는데 오후 9시 이후에 6층으로 올라가거나 사건 발생 후 밖으로 나간 사람은 가족 외에는 없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섣불리 내부인의 소행으로 단정지을 순 없었다. 우선 범행에 사용된 흉기의 행방이 모호했다. 집안에 있던 과도들은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흉기는 외부에서 가지고 들어온 것으로 추정됐다. 또 당시 집안에는 김 씨의 부인과 큰아들 김 교수만 있었는데 이들이 한 번에 급소부위를 정확히 찔러 살해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무엇보다 장례를 치르고 있는 김 교수를 상대로 수사를 진행할 수도 없었다. 그는 장례식장에 찾아온 수사팀에게 “신속히 범인을 잡아 아버지의 한을 꼭 풀어주십시오”라고 간곡히 당부하기도 했다. 조심스런 접근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수사팀은 범인이 적어도 집안 내부를 잘 아는 사람일 것이라는 심증만 가지고 실마리를 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답답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수사에 결정적인 단서가 나온 것은 사건발생 닷새째인 19일 저녁이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빌딩경비원과 5층에 입주한 사무실 직원들이 사건 당일 스포츠가방을 들고 귀가하는 김 교수를 봤다는 진술이 나왔다. 하지만 김 교수는 강의용 노란 서류가방을 들고 귀가했다고 주장했다. 한 쪽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분명했는데 확실한 건 경비원 등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이상한 것은 또 있었다. 한 학원 수강생으로부터 ‘6층에서 내려온 엘리베이터에서 김 교수를 만났는데 뺨에 핏자국이 있었고 운동복 소매 안에 과도 같은 것을 손으로 움켜쥔 채 숨기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진술을 들은 것이다. 그리고 이날 실시된 두 번째 현장수사에서 김 교수는 시종일관 불안해했으며 앞뒤가 맞지 않는 진술을 했다. 분명 심증은 갔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었고 무엇보다 범행동기가 파악되지 않아 수사팀은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이 부분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김 교수가 40%의 지분을 갖고 있는 H 농수산의 자산상태를 집중조사한 결과, 이 회사가 무려 20억여 원의 부채를 갖고 있음이 확인됐다.”
범행동기로 의심할 만한 단서였다. 하지만 당시 수사팀 내부에서는 ‘미국 유학까지 마친 엘리트 교수가 돈 때문에 아버지를 죽였겠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됐다. 또 부검결과도 ‘전문업자의 소행이 확실하다’는 소견이었다. 더구나 김 교수는 수사팀이 추궁할 낌새를 보이면 ‘아버지를 잃은 사람을 의심하는 거냐’며 거세게 항의했다.
하지만 수사를 진행할수록 그에 대한 심증은 굳어져 갔다. 수사팀은 사건 직전 김 교수와 술을 마신 동료교수들을 상대로 그의 행적을 하나하나 추적했다. 오후 11시가 좀 지나서 그는 ‘부모님이 걱정하실 것 같다. 잠깐 집에 들어갔다 나오겠네’라는 말을 남기고 먼저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심증에도 불구하고 범행사실을 추궁하지 못하고 5일장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수사팀은 장례가 끝난 후 피살된 김 씨의 부인 이 씨에게 ‘수사망이 영재 씨에게 좁혀지고 있다. 자수하도록 설득해보라’고 귀띔했다.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한 이 씨는 19일 밤 딸의 집에서 남매 부부를 모아놓고 긴급 가족회의를 열었다. 경찰로부터 수사진행 사항을 전달받은 이 씨는 동석한 큰아들 김 교수에게 ‘정말 아버지를 죽였느냐’고 추궁했다. 이에 김 교수가 극도로 당황하며 흥분하는 모습을 보였고, 다급해진 가족들은 담당형사에게 연락했다. 수사팀이 그로부터 들은 충격적인 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김 교수는 범행 이틀 전 청계천 노점상에서 범행에 사용할 파일럿복과 마스크, 흉기 등을 구입한 뒤 자신의 승용차에 감춰뒀다. 그는 창문을 넘어 베란다를 통해 침입, 안방 욕실문을 떼어놓는 등 예행연습을 하기도 했다.
범행당일 오후 6시께부터 동료교수들과 집근처에서 술자리를 가진 그는 범행을 결심하고 술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미리 숨겨둔 흉기가방을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이때 그는 외부인이 침입한 것처럼 꾸미기 위해 철제문을 열어놓고 자물쇠도 바꿔놓는 치밀함을 보였다. 집안에 들어온 김 교수는 흉기를 들고 방 창문을 넘어 베란다를 통해 안방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피가 튀지 않게 하기 위해 잠이 든 아버지의 얼굴에 수건 두 장을 덮은 뒤 목을 찌르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잠시 후 어머니의 비명소리를 들은 그는 재빨리 체육복 위에 덧입은 파일럿복을 벗고 안방으로 건너갔다. 범행도구가 들어있는 가방은 종로 일대 하수구와 쓰레기 하치장에 버렸다.
김 교수의 자백을 받은 수사팀은 패닉상태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잘 나가는 ‘교수님’이었고 미래가 보장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 교수가 아버지를 살해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범행 동기는 돈이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김 교수는 3월 초 처음 범행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평소 사업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으나 아버지는 그에게 사업가의 기질이 없다고 판단, 자신의 사업에 참여하는 것을 한사코 꺼렸다고 한다. 하지만 대학강단에 선 뒤에도 사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김 교수는 아버지 몰래 H 농수산이라는 회사를 공동설립했다. 회사경영이 어려워지자 그는 사채를 동원했고 아버지와 공동소유로 돼있는 빌딩을 저당잡히고 대출을 받아 자금을 대왔다. 그러나 자금압박은 계속됐다고 한다. 20억 원의 빚을 지고 있는 상황에서 2억이 훨씬 넘는 어음이 돌아오자 결제할 자금이 없던 그는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김 교수가 평소 즐겨 읽었던 추리소설 등에서 범행수법을 모방했다는 사실이었다. 김 씨는 비밀결사단체에 상속재산을 뺏긴 20대 여인이 재산을 되찾는 과정을 묘사한 <상속자>와 한 의사가 마약중독자 간호사로부터 낙태수술을 받다 사망한 여인의 사인을 규명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추적>을 탐독했던 것으로 드러났는데 실제로 김 교수의 범행과정은 책 내용 중 상당부분이 일치했다.
수사팀은 종로 6가의 한 빌딩 앞 하수구 등지에서 범행에 사용된 파일럿복과 목장갑, 25cm의 과도 등을 증거물로 찾아냄으로써 수사를 종결지었다.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사실은 김 교수가 금전적인 문제 외에도 아버지와 평소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조사결과 김 교수는 실향민 출신 아버지의 강직한 성격과 엄한 가정교육의 영향으로 매우 내성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성인이 된 후에도 아버지와 정상적인 의사소통을 하지 못한 채 단절된 관계를 맺어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5월 16일 서울지법에서 열린 첫 공판에서 김 교수는 “지금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변호인의 질문에 “구세대인 아버지의 사랑표현법을 이제야 깨달았다. 아버지를 뵙고 싶다”고 말했다.
존속살인 혐으로 구속기소된 김 교수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