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지던트가 내연관계를 맺던 간호사가 피하기 시작하자 잔인한 복수를 결심했다. | ||
도대체 누가 왜 위험한 방사성 원소를 몰래 훔쳐간 것일까. 10여 년 전 우리 사회를 공포 속에 몰아넣었던 원자력병원 방사성 동위원소 도난사건은 이렇게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경찰청 김원배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이 사건의 뒤안길에는 어긋난 사랑으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된 한 의사에 대한 얘기가 담겨 있다.
우선 당시 상황에 대한 김 연구관의 얘기를 들어보자.
“조사 결과 사라진 방사성물질은 세슘 17개, 이리듐 292개였다. 그리고 세슘과 이리듐을 장착해 인체에 투입시키는 기구인 어플리케이트 6세트도 없어진 것으로 확인됐다. 가격으로 따지자면 총 5600만 원 정도의 규모였다. 최초 신고자인 박 씨는 ‘7일 오후 2시께 저장실 문을 정상적으로 잠그고 퇴근했다가 오늘 아침 저장실에 와보니 자물쇠가 절단기로 잘려 있고 동위원소가 사라진 상태였다’고 진술했다.”
지름 2㎜, 길이 2㎝가량의 은백색 원통형 금속막대 모양인 세슘은 주로 자궁암 치료에, 지름 0.5㎜, 길이 3㎜ 정도의 이리듐은 구강암과 경부암 치료에 사용되어 왔다. 특히 세슘 등은 납으로 만든 특수용기에 저장하지 않고 노출된 상태에서 2시간 이상을 휴대할 경우 백혈구 감소로 인체면역성이 떨어지고 세포가 파괴되어 피부에 염증이 생기며 생식기능을 저하시키고 암을 유발하는 등 치명적인 위험을 안고 있는 물질이었다. 전문가들은 이들 물질에 장기간 직접 노출될 경우 피부와 근육이 괴사해 손이나 다리 등을 절단해야 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이들 물질이 외부로 유출될 경우 심각한 문제를 불러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병원은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자물쇠가 절단되어 있고 주입기구까지 사라진 것으로 보아 이번 경우는 단순 분실 사고가 아닌 도난사건임이 분명했다. 도대체 범인은 누구일까.
수사팀은 도난당한 동위원소의 보관이 쉽지 않은 데다가 전문적 지식 없이는 다룰 수 없다는 점, 또 외부에 판매하기도 어렵다는 점에 주목했다. 확실한 것은 이번 사건이 일반인에 의한 단순절도사건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수사팀은 병원 측에 불만을 갖고 있는 내부관계자가 병원의 명성을 악화시키는 등 해를 끼칠 목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했다. 수사팀은 또 최근 병원마다 고가의 동위원소 확보에 어려움을 겪어온 사실 등으로 미뤄 병원 사정을 잘 아는 인물이 이들 동위원소를 음성적으로 유통시킬 목적으로 훔쳤을 가능성도 있다고 봤다.
하지만 문제는 증거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번 사건은 목격자도 없었을 뿐 아니라 현장에는 범인의 지문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또 CCTV도 설치되어 있지 않아 범인을 특징지을 수 있는 그 무엇도 없었다. 하지만 외부인이 병원 지하에 있는 저장실에 침입해 방사능 원소를 훔쳐갔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했다. 따라서 수사팀은 우선 병원 직원 및 퇴직자들의 명단을 입수해 조사에 들어갔다. 또 병원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을 상대로도 탐문 수사를 진행했다.
그런데 사건 다음날인 10일 오전 8시 50분경, 노원경찰서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한 사람은 의정부에 거주하는 전직 간호사 손승희 씨(가명·34)였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신고 내용은 놀랍게도 방사성 동위원소를 발견했다는 내용이었다. 손 씨는 ‘아침에 남편을 태워주려고 차를 탔는데 운전석 바닥에 방사성 동위원소로 보이는 물질들이 흩어져 있었다. 깜짝 놀라 차 내부를 수색해보니 등받이 뒤 주머니에서도 유사한 물질들을 발견했다. 두려운 나머지 인근 공터에 내다 버렸다’고 진술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즉시 손 씨가 지목한 위치에 출동했고 한 초등학교 근처 공터에서 방사성 동위원소를 급히 회수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수사팀은 현장에서 세슘 7개, 폐기처분된 이리듐 280개를 발견한 데 이어 손 씨의 차량 트렁크에서도 세슘과 어플리케이터 등을 추가로 회수했다.”
수사팀은 방사성 동위원소로 인한 추가 사고가 터지기 전에 도난당한 물질들을 회수했다는 점에서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은 문제는 범인을 검거하는 일이었다. 범인은 누구며 도대체 왜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일까. 수사팀은 방사성 동위원소들이 손 씨의 차량 안에서 발견됐다는 점에 주목했다.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히 손 씨였다. 손 씨는 치명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는 물질이 자신의 차에서 발견됐다는 점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손 씨가 운행하기 전 차량 내부를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았을 경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방사성 동위원소에 노출됐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로 인한 피해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것이었다. 수사팀은 누군가 손 씨에게 해코지를 할 목적으로 저지른 범행이라고 확신했다.
자연스레 용의자는 손 씨의 주변인물로 좁혀졌다. 전직 간호사이자 평범한 주부인 손 씨에게 원한을 가질 만한 사람은 누구일까. 수사팀은 손 씨가 사건해결의 열쇠를 쥔 인물이라고 판단, 그녀를 설득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한참동안 충격에 말을 잇지 못하던 손 씨는 조심스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손 씨가 범인으로 지목한 인물은 놀랍게도 원자력병원 레지던트인 김성욱 씨(가명·32)였다. 손 씨의 입에서 나온 말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손 씨는 얼마 전까지 원자력병원에서 근무하던 간호사였다. 근무 당시 손 씨는 그 병원 의사인 김성욱과 비밀리에 교제를 해왔다고 한다. 둘 다 가정이 있는 상태에서 관계를 맺어온 것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 만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손 씨가 김성욱에게 이별을 선언하고 몇 개월 전 병원을 그만뒀다고 한다. 하지만 김성욱은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만날 것을 강요했으며 남편과의 이혼을 요구했다고 한다. 손 씨가 이를 거부하자 김성욱은 급기야 ‘죽여버리겠다’고 수차례 협박을 해왔다는 것이다. 손 씨는 얼마 전에는 김성욱이 동위원소를 들먹이며 구체적인 방법으로 협박을 했던 적도 있다고 진술했다. ‘동위원소를 훔쳐 침대 밑에 놓고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영화에서 본 적이 있다. 나는 너를 소리 없이 죽일 수 있다’고 위협한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수사팀은 김 씨가 손 씨의 승용차 열쇠를 복제해 갖고 있다는 점으로 미뤄 김 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판단했다. 치정문제로 심각한 갈등을 빚어오던 김 씨가 손 씨를 협박할 목적으로 방사성 동위원소를 훔쳤을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이었다.
조사 결과 지방에서 인턴을 마치고 90년대 중반부터 원자력병원에서 레지던트로 재직해온 김 씨는 얼마 전 부인과 이혼한 뒤 혼자 살아온 것으로 드러났다. 동료들은 “수련의 과정을 불과 1년 남짓 남겨두고 그런 무모한 짓을 했을 리가 없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수사팀이 생각하기에도 ‘앞길이 창창한 의사가 순간적인 감정으로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질렀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치정사건은 나이와 성별은 물론 학력과 직업에 관계없이 벌어지는 우리 사회의 가장 흔한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김 씨는 손 씨의 진술과 그간의 수사정황 등으로 판단컨대 이 사건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다.
수사팀은 김 씨의 신병확보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달 초부터 한 대학병원에 파견되어 근무를 하던 김 씨는 동위원소 도난이 확인된 9일 오전 병원 측에 ‘개인 사정으로 일주일간 휴가를 간다’고 통보한 뒤 잠적한 상태였다. 참으로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용의자로 몰리는 것을 알았는지 김 씨는 자신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기가 무섭게 병원 관계자에게 ‘나는 이 사건과 무관하다. 11일 중 병원에 들러 진실을 밝히겠다’는 전화를 걸어왔다. 하지만 김 씨가 잠적한 것으로 판단한 수사팀은 그에 대한 수배를 내리는 동시에 그의 고향과 연고지 등에 수사진을 급파했다.
김 씨는 11일 새벽 3시 40분경 경기도 한 도시의 전처 집에서 검거됐다. 우선 과거 손 씨를 폭행한 혐의로 김 씨를 입건한 수사팀은 동위원소 도난사건과 관련된 범행에 대해 추궁했다. 김 씨는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다. 하지만 손 씨와의 대질심문까지 거론되는 상황에서 김 씨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변심한 애인을 죽이기 위해서….” 설마 했지만 김 씨의 입에서 나온 말에 수사팀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조사 결과 이 사건은 내연관계에 있던 간호사의 변심에 앙심을 품은 의사가 저지른 치정복수극으로 드러났다. 사건은 두 사람의 잘못된 만남에서 시작된다. 97년 11월경 김 씨는 같은 병원에 근무하고 있던 두 살 연상의 간호사 손 씨에게 연정을 품게 됐다. 당시 둘 다 가정이 있었지만 오랜 시간을 같은 병동에서 근무하면서 두 사람은 애틋한 감정을 느끼게 됐다. 엄연한 불륜관계였지만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됐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두 사람은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다. 엄연한 불륜이었지만 이미 눈이 멀어버린 상태였다. 급기야 두 사람은 가정을 버리기로 합의한다. ‘서로 이혼한 뒤 같이 살자’는 약속을 하게 된 것이다. 먼저 행동으로 옮긴 사람은 김성욱이었다. 김성욱은 손 씨와 새살림을 꾸릴 생각으로 부인과 이혼을 해버렸다. 하지만 문제는 손 씨의 태도였다. 그 후 손 씨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채 줄곧 김성욱을 피했다고 한다. 몇 번이나 ‘남편과 이혼하고 같이 살자’고 요구했지만 손 씨가 이를 거절한 것이다. 특히 손 씨가 그간 다니던 병원까지 그만둬버리자 배신감에 치를 떨던 김성욱은 결국 손 씨를 살해하기로 마음먹는다.”
김 씨는 지난 9일 새벽 2시께 병원 지하 1층에 몰래 침입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쇠톱으로 저장실 자물쇠를 자르고 보라색 보자기에 세슘과 이리듐 등을 쓸어 담은 뒤 병원을 빠져 나왔다. 그 후 지방 도시에 있는 손 씨의 집 주차장에 도착한 김 씨는 복제 자동차키로 차 문을 열고 차량 곳곳에 방사성물질을 감춰둔 뒤 집으로 돌아왔다.
김 씨는 “내가 먼저 아내와 이혼하면 손 씨도 이혼한 뒤 같이 살기로 했다. 나는 지난 3월 이혼을 했는데 그녀는 약속을 어기고 나를 피해 다녔다. 배신감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액의 위자료를 지급한 것은 물론 추후 10년간 전처의 생활비를 부담하기로 하면서까지 이혼했는데 어이없이 배신당했다. 나를 배신한 그녀를 죽이고 나도 죽으려 했다’는 것이 김 씨의 얘기였다고 한다.
살인예비 및 특수절도, 원자력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된 김 씨는 잘못된 만남과 비뚤어진 애정이 불러온 어이없는 현실 앞에서 뒤늦게 범행을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