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 웬 눈이 이렇게 많이 왔대… 쓸어도 쓸어도 끝이 없네.”
가정부주 안영자 씨(가명·45)는 마당에 쌓인 눈을 쓰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때였다. “으악!” 안 여인의 입에서 갑자기 비명이 터져나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이 뒤에서 안 여인을 습격한 것이었다. 괴한은 흉기로 안 여인의 얼굴과 머리, 목 등 무려 열세 군데를 찔렀다. 피할 겨를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밤새 내린 눈으로 뒤덮여있던 마당은 순식간에 피바다로 변했다. 예리한 흉기로 온몸을 난자당한 안 여인은 결국 그 자리에서 숨졌다. 대낮에 주택가 마당에서 발생한 끔찍한 살인사건이었다. 하지만 단순 강도살인사건으로 보였던 이 사건은 얼마 후 무서운 전모를 드러내게 된다. 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얘기는 96년 당시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국내 최초의 국제킬러 청부살인사건이다.
안여인의 고통스러운 비명을 들은 주민 A 씨가 “누구냐!”고 소리치며 즉시 뛰쳐나왔다. 다른 주민들까지 몰려들 것으로 생각한 괴한은 흉기를 버리고 골목길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음을 직감한 A 씨는 괴한을 뒤쫓았다. 대낮에 주택가의 골목길에서는 느닷없는 추격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추격전은 오래가지 않았다. 100m 정도를 달아나던 괴한은 눈길에 미끄러져 넘어졌고 뒤쫓아 오던 주민 A 씨는 격투 끝에 괴한을 붙잡아 경찰에 넘겼다.
끔찍한 살인극이 벌어진 지 약 10분만이었다. 용기있는 한 주민에 의해 살인범은 현장에서 검거됐지만 안 여인의 살해소식을 들은 주민들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낮에 가정집에 침입, 무고한 주부의 생명을 앗아간 괴한은 20대 청년 김현성 씨(가명·28)였다. 놀랍게도 그는 ‘리차드 김(가명)’이라는 미국명을 가진 재미동포로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왜 국내에 들어와 살인을 저질렀을까. 수사팀은 김 씨를 상대로 범행동기 등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조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수사팀은 단순 강도살인 사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낮에 혼자 집을 지키고 있는 주부를 상대로 범행을 저지른 전형적인 강도살인사건으로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금품을 노린 것으로 보기에는 범행수법이 너무도 잔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수사팀은 김 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진술을 듣게 된다. 바로 ‘안 여인을 확실히 죽여달라는 부탁을 받고 입국했다’는 것이었다. 김 씨의 자백이 사실이라면 이 사건은 명백한 청부살인사건었다.”
수사팀이 놀란 것은 당연했다. 조사결과 20년 이상 미국에 거주하던 김 씨는 지난달 6일 입국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렇다면 대체 안 여인을 살해하라고 청부한 사람은 누구일까. 평범한 가정주부를 살해하도록 지시한 이유는 무엇이며 굳이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김 씨에게 살인을 의뢰한 이유는 무엇일까.
김 씨는 경찰에서 “지난달 3일 미국 LA에 사는 중국계 폭력조직원 T 씨로부터 ‘한국에 있는 안영자를 살해하면 미화 3만 달러를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다. 그리고 착수금 명목으로 1500달러를 받고 입국했다”고 진술했다.
여섯 살 때 미국으로 이민, 그곳에서 대학까지 마친 김 씨는 2년 전 고교 후배의 소개로 T 씨를 알게 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T 씨가 안 여인을 살해할 것을 청부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수사팀은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안 여인 주변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진행하던 수사팀은 중요한 단서를 포착하게 된다. 바로 그 무렵 안 여인이 남편 황성택 씨(가명·57)와 심각한 불화를 겪어왔으며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황 씨가 수시로 안 여인을 협박해왔다는 주변의 진술을 확보한 것이었다.
수사의 초점은 이들 부부관계에 집중됐다. 그리고 조사결과 석연치 않은 점들이 하나둘씩 밝혀지기 시작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황 씨는 수도권에 택시회사와 쇼핑센터를 갖고 있는 등 300억 원대 자산가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주변인들에 따르면 황 씨는 안 여인과 10여 년 전 재혼했으나 가정불화로 94년 말부터 사실상 별거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6개월 전부터는 황 씨 홀로 미국으로 건너간 것으로 드러났다. 주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무렵 이들 부부는 황 씨가 전처와 다시 재결합하는 문제를 두고 심각한 갈등을 겪어왔다고 한다. 조사결과 당시 안 여인은 남편 황 씨의 가정소홀 및 문란한 사생활을 이유로 의정부지원에 50억 원의 위자료를 요구하는 이혼소송을 낸 상태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거액의 위자료를 요구하는 부인을 죽여달라.’
수사팀의 경험으로 볼 때 일단 범행동기는 어느 정도 성립됐다. 당시 정황이나 주변인들의 진술에 따르면 이들은 무늬만 부부일 뿐 원수와 다름없을 만큼 관계가 악화돼있기도 했다.
수사팀은 이 사건에 등장하는 T 씨와 김 씨가 미국에 거주하는 인물이라는 점에 주목, 분명 남편 황 씨가 개입된 사건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들이 서울의 변두리에서 홀로 생활하고 있는 주부를 살해할 이유가 없었다.
“빨리 해결하라”는 독촉과 협박에 조급해진 김 씨는 결국 날을 잡았다. 김 씨가 안 여인을 살해한 2월 8일은 이들 부부의 이혼소송 첫 공판이 열리기로 되어 있던 날이었다.
사건의 가닥을 잡았다고 판단한 수사팀은 공범을 찾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장기간 체류한 탓에 국내 사정을 모르는 김 씨가 홀로 범행을 했다고는 믿기 어려웠던 것이다. 분명히 국내에서 그를 도운 조력자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공범을 밝히는 과정에서 남편 황 씨가 개입했다는 좀 더 확실한 증거를 찾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어지는 김 연구관의 얘기.
“수사팀의 예상은 적중했다. 공범을 찾는 과정에서 황 씨의 주변인물들이 개입한 정황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범행 전 김현성은 한 남자로부터 세 차례에 걸쳐 범행자금 300만 원과 함께 안 여인의 사진 및 인적사항 등을 건네받은 사실이 있었다. 조사결과 김현성에게 돈과 정보를 전달한 인물은 황 씨가 운영하던 택시회사에서 노조위원장을 맡고 있던 박원석 씨(가명·46)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박 씨는 또 황 씨의 친동생 황성만 씨(가명·41)로부터 부탁을 받고 김현성에게 안 여인의 사진과 인적사항, 집 구조 등을 알려준 것으로 드러났다. 즉, 살해대상인 형수의 신상정보를 일차적으로 건네준 사람이 시동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황성만은 형으로부터 ‘미국에서 사람을 보낼 테니 경비를 지원하라’는 부탁을 받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황 씨가 주변인물들을 끌여들여 킬러로 고용한 김현성을 돕도록 한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조사과정에서 더욱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바로 안 여인이 이혼청구 소송을 낸 후 남편 황 씨로부터 수차례의 살해협박을 받아왔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지난해 여름에도 황 씨가 외국인 청부살인업자를 고용해 안 여인을 살해하려다 실패했다는 진술도 확보됐다. 안 여인의 측근들은 “계속되는 살인협박에 안 여인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극도의 불안감을 호소했다. 급기야 의정부지청에 황 씨를 살인예비 혐의로 고소까지 했다”고 전했다. 조사결과 안 여인은 자신의 집 주변에 수상한 사람이 잠복하며 살해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1월 19일 서울지검 의정부지청에 남편 황 씨와 황 씨가 운영하는 택시회사의 노조위원장 박원석 씨를 살인교사 및 살인예비 혐의로 고소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안 여인은 고소장에서 “별거 중인 남편으로부터 여러 차례 살해위협을 받고 있으며 박원석 씨도 나를 찾아와 ‘남편이 살해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귀띔했다”고 진술한 바 있었다.
하지만 당시 수사기관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담당자들은 “미국폭력조직원이 입국, 나를 죽이려고 한다”는 안 여인의 주장에 대해 허무맹랑한 ‘소설’이라고 판단,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만 해도 국제폭력조직의 국내진출은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만에 하나 주범인 김현성이 현장에서 검거되지 않고 미국으로 출국했다면 이 사건의 진실은 영원히 묻혀졌을 것이다. 완전범죄가 될 뻔했다”는 것이 수사팀의 얘기였다.
수사팀은 황 씨의 지시를 받고 범행에 가담한 황 씨의 동생 황성만과 노조위원장 박원석을 살인교사 및 방조혐의로 구속했다. 그리고 미국에 체류 중인 황 씨와 T 씨 등의 신병인도를 인터폴에 의뢰했다.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주범 김현성은 항소심에서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피고인의 잔악성으로 봐 극형이 불가피하나 망설이다가 독촉과 협박에 못 이겨 범행을 저지른 점을 참작한다”는 것이 재판부의 의견이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