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관살해범 이 씨는 경찰이 들이닥치자 흉기로 자해를 시도하기도 했다. 연합뉴스 | ||
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사건은 5년 전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던 경관살해 사건이다.
우선 당시 상황에 대한 김 연구관의 얘기를 들어보자.
“1일 오후 8시경 심 경사와 이 순경, 정승화 경장(39)은 이 씨를 검거하기 위해 경찰서를 나섰다. 심 경사와 이 순경이 문제의 카페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9시. 이홍만은 약속시간보다 20여분 늦은 9시 20분께 카페에 들어섰다. 이홍만이 카페에서 애인과 마주 앉은 것을 확인한 두 형사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뒤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먼저 심 경사가 이홍만에게 다가가서 경찰 신분증을 제시했다.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던 이홍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돌연 흉기를 꺼내 심 경사의 가슴을 두 차례 찌르고 심 경사를 부축하던 이 순경도 연달아 찌른 뒤 카페 건너편에 세워둔 택시를 타고 달아났다. 밖에서 도주로 차단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정 경장이 황급히 뒤쫓았지만 동교동 네거리에서 놓치고 말았다.”
현장은 피바다였다. 이홍만이 휘두른 흉기에 찔린 심 경사와 이 순경은 인근 병원 응급실로 옮겨져 심폐소생술을 받았지만 끝내 사망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치정이 얽혀 발생한 사건인 터라 그다지 심각하지 않게 여기고 접근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실제로 현장에 출동한 형사들은 당시 만약의 경우 범인을 제압할 수 있는 무기조차 소지하지 않은 완전 무방비 상태였다.
‘키 170cm가량에 마른체형. 스포츠형 머리에 안경을 씀. 왼쪽 목과 왼팔에 화상흉터. 범행 당시 하늘색 남방과 조끼 착용.’
사건 발생 직후 경찰은 이 씨를 공개수배하는 동시에 추적 작업에 들어갔다. 다음날 영등포구 신길동의 한 주택가에서 이 씨가 범행 직후 몰고 달아난 쏘나타 택시가 발견됐다. 그리고 이 씨가 택시를 버리고 간 장소에서 이 씨가 입었던 피묻은 바지와 양말이 발견되고 인근 가정집 빨랫줄에 걸려있던 바지가 없어진 것도 확인됐다. 수사팀은 택시 내부에 대한 감식작업을 벌이고 이 씨의 예상 도주로를 추적했다. 하지만 단서가 될 만한 물품을 찾지 못했으며 이 씨의 행방을 파악하는 데도 실패했다.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이 씨가 추가범행을 저지를 위험이 다분하다는 점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이 씨는 절도와 강간치상 등으로 7년 동안 복역한 전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이 씨가 도피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시민들을 상대로 범행을 저지르거나 그 과정에서 제2, 제3의 피해자가 나올 가능성이 있었다. 더욱이 자신을 체포하러 온 2명의 경찰을 거침없이 현장에서 살해한 이 씨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흉악한 범행도 저지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이 씨의 검거는 초를 다투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이 씨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했다. 그러던 3일 밤, 이 씨 명의의 ID가 한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된 것이 확인됐다. 수사팀은 초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이 씨가 ID를 개설해 접속한 장소만 확인한다면 이 씨 검거는 시간문제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사팀은 ID가 개설된 성북구 돈암동의 한 아파트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을 벌였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이 씨의 주민등록번호로 ID를 개설한 사람은 그 지역에 거주하는 한 초등학생이었다. 별 뜻 없이 전단지에 공개된 이 씨의 주민번호를 도용해 인터넷에 접속했던 것이었다. 병력 400여 명이 동원된 이날의 수색작전은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났다.
이후 수사에 좀처럼 진전이 없는 가운데 5일 오전 10시 서울 중구 신당동 서울경찰청 기동대 연병장에서는 유가족과 경찰관계자 1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심 경사와 이 순경의 영결식이 열렸다. 사건해결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유가족과 수많은 동료들은 눈시울을 적셨다. 어느덧 사건은 발생 6일째를 맞고 있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수사는 장기화될 불길한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수사팀 내부에서는 이미 이홍만이 서울을 벗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수사팀의 부담은 말이 아니었다. 결국 6일 오전 서울경찰청장 주재하에 31개 경찰서 형사과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 씨 검거를 위한 수사정보공유 및 추후 수사방향에 대한 연석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애초 2000만 원이었던 현상금을 최고 상한선인 5000만 원으로 올리고 전국에 새로운 수배전단을 배포했다. 이 씨의 도주가 장기화되고 있는 상황인 데다가 국민적인 충격도 큰 탓이었다.”
도대체 이 씨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동료를 잃은 분노와 슬픔에 잠긴 수사팀은 그 어느때보다 철저히 탐문수색과 수사를 진행했지만 이 씨의 행적은 묘연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찾을 수 없었던 이 씨도 결국 검거되고 만다. 바로 한 평범한 가정주부의 기지로 인해서.
8일 오후 2시께 강서구 방화동의 한 빌라에 거주하는 주부 A 씨(48)는 네 살짜리 손주와 함께 집을 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열려져 있던 창문으로 한 초췌한 모습의 30대 남자가 들어왔다. 그리고는 A 씨와 손주를 위협한 채 “내가 경찰관을 죽인 범인이다”라고 말했다.
당시 뉴스보도를 통해 경관살해 사건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던 A 씨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내가 범인 이홍만인데 모르느냐”는 질문에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겁을 먹고 지레 흥분한 모습을 보일 경우 오히려 범인을 자극시켜 자신과 손주의 안전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이미 경찰 두 명을 살해한 이 씨가 자포자기 심정으로 어떤 짓을 할지 모를 일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범인을 안정시키고 그에게 신뢰를 주는 것이었다. A 씨는 경찰 추적을 피해 도주행각을 벌이고 있는 이 씨가 상당 기간을 굶었을 거라고 직감했다. 이에 A 씨는 이 씨에게 손수 국수를 끓여주고 갈아입을 옷가지와 칫솔 등을 건넸다. 그리고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안심시켰다.
“절대 신고하지 않겠다 나도 당신만한 아들이 있다”는 A 씨의 말에 이 씨는 한결 흥분을 가라앉히는 모습이었다. 무려 4시간이 넘도록 집안에 같이 있으면서 A 씨는 절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이 씨의 불우한 성장사를 들어주고 경찰 수사진행 및 추적과정을 궁금해하는 이 씨에게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기사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 씨는 자신의 과거 성폭행 전과에 대해 억울하다는 말을 했으며 경관 살해 사건과 관련해서도 “나도 모르게 흉기를 휘둘러 죽게 해서 미안하다. 그 가족들에게 고통을 줬다는 생각에 목을 매고 부탄가스를 마시는 등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항변하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 씨를 그대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씨가 어느 정도 안정됐다고 판단한 A 씨는 거실 청소를 하겠다고 자리를 피했고 진공청소기를 돌리는 척하면서 아들에게 휴대폰으로 다급히 상황을 알렸다.
오후 6시 40분께 A 씨의 아들로부터 “이홍만과 비슷한 사람이 집안에 침입했다. 지금 아기와 내 어머니가 함께 있다”는 내용의 신고를 받은 경찰은 6시 55분께 문제의 빌라로 출동, 이 씨를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온 국민을 두려움과 공포에 떨게했던 이 씨의 신출귀몰한 도주행각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수사팀이 들이닥쳤을 때 이 씨는 피투성이 상태로 안방 침대옆에 쓰러져 신음중이었고, 옆에는 길이 10cm가량의 흉기가 놓여있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들이닥치자 이 씨가 흉기로 자신의 복부 등을 찌르면서 자해를 시도했던 것이었다. 특히 경찰이 출동한 것을 알고 흥분한 이 씨를 피해 A 씨가 아기를 안고 화장실로 피신해야 하는 아슬아슬한 순간도 있었다. 이 씨는 즉시 인근 이대 목동병원으로 긴급후송돼 1시간 20분에 걸친 수술을 받았다. “복부에 난 네 군데 자상 가운데 한 곳은 간이 손상될 정도로 깊은 상처가 났으나 전체적으로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것이 의사의 소견이었다.
이 씨는 수술 뒤 빠른 회복세를 보였다. 이에 수사팀은 이 씨를 대상으로 범행 공모여부 및 사전 준비과정, 범행 후 행적 등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조사결과 이 씨는 범행 후 자신이 공개수배된 것을 알고 죄책감으로 인해 두 차례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대체 그간 이 씨는 어디에서 어떻게 생활했던 것일까. 수사팀으로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그간의 도피행각이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범행 당일 이홍만은 거리를 배회하다 가리봉동의 한 여관에 투숙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인근에서 크레도스 승용차를 훔쳐 타고 강서구의 한강둔치로 향했다. 조사결과 이홍만은 도피기간 중 무려 6일을 강서구 개화산 부근 야산과 한강 둔치에서 은신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홍만은 수색대를 피해 낮에는 야산에 은신해 있다가 야밤에 한강 둔치로 나와 물로 배를 채우거나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먹는 식으로 허기를 달래왔다. 철저히 올빼미식 은신생활을 한 것이었다. 결국 일주일 동안 끼니를 굶은 이홍만은 배고픔을 참지 못해 A 씨 집에 침입한 것이었다.”
이 씨는 1심에서 법원으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다. “피고인이 우발적인 사고였다고 주장하지만 무장하지 않은 경찰관을 흉기로 마구 찔러 살해한 점으로 볼 때 범행수법이 매우 잔인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특히 당시 1심 재판부는 이 사건을 적법한 공권력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판단,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국민적 염원과 피해자들의 원혼, 유가족들의 고통을 고려할 때 극형이 불가피하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항소심에서 이 씨는 극적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당시 항소심 재판부는 “사형은 합리적 기준에 비춰 범죄자가 전혀 교화대상이 아닐 때 최후 수단으로 이뤄지는 것으로, 구체적으로 적용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어려운 근무환경에도 불구하고 업무에 열중해 온 이 땅의 경찰 가족들이 피고인의 범죄로 흘렸을 눈물을 기억할 수밖에 없지만, 사전에 계획했거나 의도했던 범죄가 아니었고 범행 일체를 자백하며 반성하는 모습에서 아직은 교화의 필요성이 남아있다”고 감형 배경을 밝혔다.
김원배 연구관의 사건 회고
경찰의 맨손대응 위험천만
김원배 연구관은 이 사건을 얘기하면서 “날로 포악해지는 범죄에 대비하고 경찰의 신변보호를 위해 무기사용에 대한 규정을 정비하고 출동시 교육·훈련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범인들이 흉기를 들고 대항하면 대부분의 경찰들은 맨손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현실이었기 때문에 경찰의 안전은 보호받을 수 없다는 얘기였다. 실제로 당시 순직한 경찰들이 3단봉과 포승줄, 수갑 외 총기 등 다른 무기를 휴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경찰의 무기사용에 대한 재논의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