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사건은 약 15년 전 사회를 충격과 분노로 몰아넣었던 일명 ‘대구 삼남매 실종사건’이다. 22일간의 숨막히는 수사과정 속으로 들어가보자.
1995년 2월의 첫날. 대구 수성구 황금동에 소재한 파출소에 한 30대 남자가 찾아왔다. 상당히 지치고 침통한 표정으로 파출소에 들어선 남자는 황금동에 사는 김성광 씨(가명·38)였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남자는 경찰의 질문에도 고개만 숙인 채 한동안 서 있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김 씨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내가 집을 나갔습니다. 아이들까지 데리고요. 어디로 갔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요. 걱정이 돼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추운 날씨에 대체 어디로 간 것인지…. 제발 제 집 사람과 아이들 좀 찾아주십시오. 부탁입니다.”
김 씨는 경찰을 붙잡고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김 씨의 말을 종합해보면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가출한 후 연락도 없고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이었다. 보호자가 동반된 가출인 만큼 범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기에는 다소 애매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김 씨의 하소연이 어찌나 애절한지 그냥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김 씨는 말 그대로 식음을 전폐하고 아내와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경찰은 우선 김 씨의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가출하기까지의 상황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고 김 씨를 붙들고 기초 조사에 들어갔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김 씨에 따르면 아내 박은실 씨(가명·32)가 어린 삼남매를 데리고 사라진 날은 지난 1월 27일 새벽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부부싸움이었다. 김 씨는 평소 아내 박 씨와 심각한 갈등을 겪어왔다고 진술했다. 결혼 후부터 두 사람은 성격차이 등으로 인해 심한 불화를 겪어왔으며 하루가 멀다하고 계속되는 부부싸움으로 한시도 집안이 편한 날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사라지기 전 날도 마찬가지였다. 1월 26일 밤부터 27일 새벽까지 김 씨는 아내와 수시간에 걸쳐 고성과 폭언이 오가는 심한 부부싸움을 했다고 털어놨다. 장시간에 걸쳐 격렬한 부부싸움을 한 뒤 김 씨는 분한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잠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아내와 아이들이 동시에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어찌보면 지극히 사적인 문제였다. 정황상 이 사건은 남편과의 반복되는 불화를 견디지 못한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가출한 사건일 가능성이 다분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며칠 더 기다려봅시다.”
사연을 모두 들어본 경찰은 일단 아내와 삼남매에 대해 가출신고를 접수한 후 이렇게 결론내렸다.
그런데 얼마 후 이 사건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가출했다던 김 씨 아내의 행적이 6일 만에 확인된 것이었다. 6일 만에 귀가한 김 씨의 아내는 놀랍게도 아이들을 동반하지 않은 홀몸이었다. 그녀는 경찰조사에서 “1월 27일 새벽까지 남편과 다퉜다. 반복되는 불화를 도저히 견디기 힘들어 오전 7시 30분께 혼자 집을 나왔다. 6일까지 여관에서 혼자 지냈으며 아이들의 행방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진술했다.
가정불화로 잠시 몸을 피해있던 아내 박 씨는 삼남매가 사라졌다는 말에 큰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박 씨가 아이들을 데리고 가출한 것이 아니라면 아이들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결국 이 사건은 7일, 아동실종사건으로 접수돼 수사가 시작됐다. 수사팀은 우선 삼남매의 행적조사에 들어갔다. 수사팀은 평소 학교주변과 놀이터 등 아이들이 자주 가던 곳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아이들의 동선을 파악하는 동시에 목격자를 찾았다.
실종인가 가출인가. 수사팀은 우선 삼남매가 모두 초등학생으로 자발적으로 가출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판단했다. 수사팀은 삼남매가 평소 부모의 잦은 부부싸움으로 인해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아왔다는 점에 주목, 이들이 집 밖을 배회하다가 변을 당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수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수사에 착수한 지 수일이 지나도록 목격자는커녕 사건해결에 대한 실마리도 나오지 않았다. 답답한 날들이 계속됐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세 명의 아이가 동시에 사라졌는데 목격자가 전혀 없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수사팀 내에서는 수사가 장기화될 수 있다는 불안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심지어 ‘제2의 개구리소년’ 사건이 될 가능성도 제기됐다. 이 와중에 수사팀은 지난 94년 가을께 김 씨가 가정불화를 이유로 삼남매를 한 달 동안 친척집에 숨겨놨던 사실을 알아냈다. 가출한 아내를 돌아오게 하기 위해, 혹은 제 멋대로 집을 나간 아내를 골탕먹일 생각으로 아이들을 친척집에 숨겨놓고 허위신고를 했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하지만 보름이 넘게 긴박한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김 씨가 그런 짓을 할 리는 없었다. 이에 수사팀은 삼남매가 유괴됐을 가능성과 가정불화를 이기지 못해 충동적으로 가출했을 가능성에 중점을 두고 수사를 계속했다.”
‘뭔가 이상하다.’ 사건발생 20여 일째 되던 무렵 수사팀 내에서는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됐다. 밤낮없는 수사와 수색에도 불구하고 희미한 단서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수사팀원들이 원초적인 의구심을 품기 시작한 것이었다. 실제로 실종신고가 접수된 이후 수사팀들은 인근의 고아원과 수용시설 등을 상대로도 집중적인 수색을 실시했지만 아이들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했다.
수사팀은 삼남매의 아버지인 김 씨에게 의심의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수사팀이 김 씨를 의심하게 된 이유는 조사과정에서 실시한 거짓말탐지기 결과 때문이었다. 수사팀은 최초 신고자인 김 씨를 상대로 수차례 조사를 벌였고 그 과정에서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게 됐다. 또 진술의 진위를 확인하는데 도움을 받기 위해 동원된 거짓말탐지기 결과에서 김 씨는 양성반응을 나타냈다. 하지만 수사팀이 김 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본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김 씨의 승용차 트렁크와 옷, 욕실 등에서 혈흔이 감지된 것이었다.
이미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음을 감지한 수사팀은 김 씨를 집중적으로 추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 씨는 매번 말을 바꾸며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다. 결국 김 씨와 줄다리기를 하던 수사팀은 “이미 증거를 확보했다. 꿈에 자식들이 나타나지 않느냐. 이제라도 솔직히 털어놓고 참회해야 하지 않겠나”는 말로 끈질기게 김 씨를 설득했고 21일 새벽 결국 김 씨로부터 범행 일체를 자백받기에 이른다.
“제가… 죽였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삼남매를 살해한 아버지는 뒤늦게 통한의 눈물을 쏟았다. 수사를 진행했던 수사팀은 예상했던 결과였음에도 막상 현실로 드러나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조사결과 드러난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경북의 한 도시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했던 김 씨는 결혼 후 고부갈등과 성격차이 등으로 인해 아내 박 씨와 심한 불화를 겪어왔다. 심각한 갈등을 견디지 못한 아내는 그간 네 차례나 가출을 하는 등 집안은 사실상 파탄상태였다. 아내의 잦은 가출과 가정불화가 반복되자 김 씨는 결국 직장에 사표를 내고 대구로 이사와 특정한 직업 없이 증권투자를 하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왔다.
하지만 김 씨는 증권투자 실패로 그나마 모아둔 돈을 거의 탕진하게 되고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부부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집안에서는 좀처럼 고성이 끊이지 않았다. 사건 전날도 마찬가지였다. 아내 박 씨가 다른 남자와 무선 호출을 하는 것을 목격한 김 씨는 아내를 추궁했고 이 과정에서 아내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된다. 김 씨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이에 김 씨는 외도를 꼬투리잡아 아내에게 5000만 원을 요구했고 아내로부터 ‘1000만 원을 친정에서 마련해 주겠다’는 각서를 받아냈다고 한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아내가 각서를 챙겨서 가출해버리자 김 씨는 극한 분노와 배신감에 휩싸이게 됐다는 것이다. 이미 김 씨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3일이 지나도 아내가 돌아오지 않자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김 씨는 아내에 대한 복수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아무 죄없는 아이들을 상대로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범행을 결심하게 된다. 설 전날인 1월 30일 오후 1시 30분경 과도와 삽을 준비한 김 씨는 “엄마 찾으러 가자”는 말로 삼남매를 차에 태운 뒤 처갓집으로 갔다. 하지만 처갓집에 아무도 없자 김 씨는 아이들에게 ‘나무를 캐러 가자’는 말로 속인 뒤 경산시 백천동의 속칭 뱀사골 공동묘지로 향했다. 아빠와의 나들이에 아이들은 무척이나 들뜬 모습이었다.
하지만 김 씨의 마음에는 온통 아내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김 씨는 먼저 큰딸 선혜 양을 불러 손을 운동화 끈으로 묶었다. 갑작스러운 아빠의 행동에 놀란 선혜 양은 뭔가 심상치 않은 상황을 눈치채고 김 씨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김 씨의 눈에는 이미 뵈는 것이 없었다. 김 씨는 “아빠, 제발 살려주세요”라는 딸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목을 조르고 흉기로 찔러 처참하게 살해했다. 이어 김 씨는 10여m 아래에서 놀고 있던 작은딸과 아들을 차례로 불러 같은 방법으로 살해한 후 깊이 1.5m의 구덩이에 삼남매를 암매장하고 오후 6시경 태연히 집으로 돌아온 것으로 드러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삼남매의 목을 조른 것도 모자라 흉기로 ‘확인살해’까지 했다는 김 씨의 말에 수사팀은 할 말을 잃었다.
범행 일체를 털어놓은 뒤 김 씨는 “어린 것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라는 말로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아내에 대한 증오심은 누그러뜨리지 않았다고 한다.
“주식투자로 많은 돈을 잃어 신경이 무척 예민해져 있었던 데다가 아이들의 얼굴만 보면 죽이고 싶도록 미운 아내가 떠올라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이 김 씨의 얘기였다. 21일 오전 9시경 뱀사골 공동묘지 정상에서는 삼남매의 사체발굴이 이뤄졌다. 피투성이 상태로 꽁꽁 얼어붙어 있는 삼남매의 주검에 수사팀들은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김원배 연구관의 사건 회고
''가족붕괴'' 끔찍한 결과 불러
김원배 수사연구관은 삼남매를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으로 몰아넣은 가정불화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사건은 15년 전 일어난 사건이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최근에도 가족 간에 입에 담을 수 없는 패륜사건들이 발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정 문제를 방치하면 결국은 곪아서 터지고 맙니다. 부부간의 신뢰회복과 가족관의 붕괴를 막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범죄해결책이라 하겠습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