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한 장면.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 ||
비명을 들은 동네주민들이 모여들었을 때는 이미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 후였다. 집안에 피투성이 상태로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본 이웃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사건은 약 19년 전 발생한 일명 ‘노량진 가정집 주부 피살사건’이다. 단순 강도사건으로 보였던 이 사건은 수사결과 그 끔찍한 전모가 드러나게 된다. 16일간의 숨막히는 수사과정 속으로 들어가보자.
사건 당일 집주인 이윤숙 씨(가명·56)는 집안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30대로 보이는 괴한이 들이닥쳤다. 괴한은 흉기로 이 씨를 마구 찔렀다. 그리고 집안에 있던 이 씨의 친구 김숙자 씨(가명·62)와 이 씨의 아들 박정훈 씨(가명·25)도 연달아 찌르고 달아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우선 당시 상황에 대한 김 연구관의 얘기를 들어보자.
“괴한은 열린 출입문을 통해 침입한 듯 보였다. 대낮인 데다가 집에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김숙자 씨가 놀러와 있었기에 특별히 문단속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더구나 당시 집안에는 장성한 아들도 함께 있었다. 말 그대로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현장은 참혹함 그 자체였다. 괴한이 휘두른 흉기에 가슴과 배 등을 난자당한 이 씨는 그 자리에서 숨졌으며 온몸을 칼에 찔린 친구 김 씨와 아들 박 씨 역시 생명이 위독할 정도의 중상을 입었다.
대낮에 평범한 가정집에서 발생한 끔찍한 살인사건이었다. 사건 소식이 알려지자 동네는 발칵 뒤집혔다. 아들 박 씨는 “낮잠을 자다가 비명을 듣고 뛰쳐나왔다. 달아나는 남자를 향해 ‘도둑이야’라고 소리쳤는데 범인이 되돌아와 칼로 머리와 팔 등을 마구 찌르는 바람에 정신을 잃었다”고 말했다.
같은 집에 세들어 살던 청년은 “방안에 있었는데 갑자기 비명과 함께 ‘도둑이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방 밖으로 나와보니 30대 남자가 황급히 대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쫓아갔지만 회칼을 휘두르며 위협하는 바람에 결국 놓쳤다. 다시 집안으로 와보니 주인 아주머니와 아주머니의 친구 분이 안방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주인집 아들은 거실에 쓰러져 있었다”고 진술했다.
도대체 범인은 누구이며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수사팀이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전형적인 강도살인 사건일 가능성이었다. 범인이 이 씨 집에 금품을 훔치러 왔다가 이 씨 등이 반항하자 순간적으로 흉기를 휘두르고 달아난 것으로 판단했다. 실제로 그 무렵 낮시간대 집을 혼자 지키고 있는 주부들이 많은 데다가 상당수의 가정집에서 대낮엔 문단속을 철저히 하지 않는다는 점을 노린 강도사건이 부쩍 자주 발생하고 있었다. 저항할 힘이 없는 부녀자들을 상대로 할 경우 범행이 수월하기 때문이었다. 이번 사건의 범인도 이를 노린 것으로 보였다. 열린 현관문을 통해 이 씨 집에 침입했다가 집안에 의외로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고 당황한 나머지 순간적으로 흉기를 휘둘렀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수사팀은 우선 인근에 거주하는 동일수법 전과자와 동네 불량배들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범인이 남긴 단서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었다. 너무도 급작스럽게 변을 당한 피해자들은 30세 안팎의 남성이라는 점 외에는 범인의 인상착의를 기억하지 못했다. 목격자는 있지만 범인을 특징지을 수 없는 막막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수사팀은 사건 당일 사라진 금품이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실제로 집안에는 귀중품이나 현금 등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이는 범인이 애초부터 금품을 노리고 침입한 것이 아닐 수 있음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바로 피살된 이 씨에게서 반항흔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애초 수사팀은 범인이 금품을 훔치려다 반항하는 이 씨를 살해하고 집안에 같이 있던 인물들에게도 상해를 입힌 것으로 추측했었다. 따라서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즉사한 이 씨에게서 반항흔이 없다는 점은 이상한 점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또한 금품강취과정에서 실랑이가 없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었다. 정황상 이 씨는 미처 반항할 새도 없이 습격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수사팀이 주목한 것은 범행수법이 너무 잔혹하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피살된 이 씨의 상태는 그야말로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금품을 훔치러 왔다가 우발적인 살인을 저질렀다고 보기에는 범행 수법이 너무 잔인했던 것이다. 애초부터 이 씨의 목숨을 노린 범행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원한살인. 현장상황 등을 토대로 수사팀이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수사팀의 추측대로 원한살인이 맞다면 범인은 이 씨를 알고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 수사팀은 이 씨와 가족들의 주변인물들을 상대로 탐문수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당시 보험회사 영업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이 씨는 누구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녀는 주변사람들에게 상당히 평판이 좋았다. 수사팀은 금전과 채무, 치정 등 모든 가능성을 두고 전방위 수사를 진행했지만 특이사항을 발견하지 못했다.
답보상태에 머무르던 수사가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수사에 착수한 지 보름가량이 지난 후였다. 끈질기게 이 씨의 주변을 수사하던 수사팀은 중요한 사실을 파악하기에 이른다. 이 씨 가족들로서는 돌이켜 생각하기조차 싫은 악몽과도 같은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바로 몇 년 전 이 씨의 딸 박신애 양(가명·21)이 성폭행을 당한 적이 있었던 것이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86년 가을, 한 20대 남자가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이 씨의 딸 신애 양을 부천의 한 야산으로 끌고 가 욕보인 사건이 있었다. 어린 여고생을 상대로 짐승같은 짓을 한 남자는 강간치상 등의 전과가 있었던 조형만 씨(가명·30)였다. 딸이 끔찍한 일을 당한 것을 알게 된 어머니 이 씨의 충격과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이 씨가 가만있을리 없었다. 이 씨는 조형만을 당장 고소했고 조 씨는 구속되기에 이른다.”
약 4년 전 발생한 이 사건은 얼핏 보기에는 이번 살인사건과 아무 상관도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냥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수사팀은 이 씨 피살사건과 조 씨와의 연관성을 찾는 데 주력했다. 조사결과 강간치상 등으로 구속됐던 조 씨는 88년 겨울에 출소, 특정한 직업 없이 지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과거 이 씨의 딸을 욕보였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범인으로 단정짓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조 씨는 이 씨 집안과 씻을 수 없는 악연이 있는 인물임이 분명했다. 따라서 조 씨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떠올랐다. 조사결과 조 씨의 범행가능성을 뒷받침해주는 당시 정황이 속속 밝혀지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김 연구관의 얘기.
“당시 조형만은 이 씨에게 고소를 취하해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합의만 해주면 자신이 굳이 징역을 살지 않고 풀려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씨는 어린 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준 조형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결국 이 씨는 합의를 해주지 않았고 조형만은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것이었다.”
사건은 자연스럽게 보복살인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수사팀은 조 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그를 추적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조 씨는 출소 후 주변인들에게 이 씨에 대한 심한 분노심을 표출하면서 ‘절대 그냥 두지 않겠다’ ‘복수하겠다’ 등의 말을 자주 해왔던 사실도 파악됐다. 조 씨는 자신의 옥살이를 순전히 이 씨 탓으로 돌리며 앙심을 품어왔던 것이다. 조 씨의 행방을 추적하던 수사팀은 24일 오전 10시 30분경 경기도 부천시 역곡동의 한 독서실에서 그를 검거하는 데 성공한다.
경찰에 검거된 조 씨는 자포자기한 듯 모든 범행에 대해 순순히 자백했다. 범행동기는 수사팀의 예상대로였다.
“합의를 해주지 않아 감방생활을 한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 조 씨의 진술이었다. 해결되지 않았더라면 단순 강도살인사건으로 묻힐 뻔했던 이 사건은 사건 발생 16일 만에 그 전모가 드러났다.
86년 9월 조 씨는 우연히 알게 된 이 씨의 딸 신애 양을 야산으로 데려가 성폭행한 혐의로 검거된다. 조 씨는 이 씨에게 고소 취하를 줄기차게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강간치상 혐의로 3년형을 선고 받은 조 씨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이 씨가 고소를 취하해주지 않은 탓에 실형을 살게 됐다고 생각하고 앙심을 품어온 것이었다.
조 씨는 수감생활 내내 이 씨를 향한 복수의 칼을 갈아왔는데 출소 직후 가장 먼저 한 일도 이 씨의 행방을 찾아다닌 것이었다. 조사결과 조 씨는 출소 직후 당시 신애 양이 다녔던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와 동사무소 등을 찾아다니며 현재 집주소를 알아낸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출소 후 조 씨가 보복할 것을 우려했던 이 씨의 가족들은 그간 두 차례나 집을 옮겼지만 조 씨의 끈질긴 추적을 피하지 못하고 결국 변을 당한 것으로 드러나 안타까움을 더했다. 조 씨는 집 주소를 확인한 뒤 3월과 4월 두 차례에 걸쳐 이 씨네 집 주변을 현장답사 하는 등 치밀한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그릇된 앙갚음으로 한 집안에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안긴 조 씨의 말로 역시 좋지 못했다. 살인 등의 혐의로 구속된 조 씨는 수감 6개월여 만에 감방에서 자살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1990년 12월 18일 새벽 조 씨는 러닝셔츠를 찢어 만든 끈으로 목을 매 자살을 기도, 교도관들에 의해 병원으로 후송됐으나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조 씨는 수감된 후 정신병 증세를 보이는가 하면 다른 재소자들과 자주 갈등을 빚어 독방에 수감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김원배 연구관의 사건 회고
김원배 수사연구관은 이 사건을 얘기하면서 이 씨 가족들이 그동안 겪어야 했을 심적 고통을 생각하면 더없이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조형만이 출소 직후부터 이 씨를 찾아다녔다는 사실은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사실 국민들을 가장 극한의 공포로 몰아넣는 유형이 이런 사건입니다. 자칫하다가는 가해자에게 제2, 제3의 보복을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심어주기 때문이죠. 피해자들이 조사과정에서 진술을 거부하는 이유 중의 하나죠. 조형만이 출소 후 보복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수차례 이사까지 갔다는 이 씨 가족들의 진술은 그간 이 씨 가족들이 얼마나 공포에 떨었을지를 짐작케 합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