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2월 23일 서울 명동 서울가톨릭대학생연합회에서 열린 고 김훈 중위의 9주기 추모미사. 국방부는 지속적으로 자살을 주장했고, 김 중위 유족은 인정할 수 없다며 재조사를 요구, 17년째 힘든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순직 인정받으려고 자살이라는 결과를 받아들일 순 없습니다. 순직처리보다 중요한 건 지난 세월에 대한 국방부의 정식 사과입니다.”
김훈 중위의 아버지 김척 씨는 <일요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JSA 의문사’ 김훈 중위가 사망한 건 1998년 2월. 아들이 죽은 지 17년이 됐지만 군 당국과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한때 국방부의 잘못된 브리핑으로 김훈 중위가 순직 인정을 받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불과 몇 시간 만에 번복됐다. 당국의 실수로 아직도 ‘순직 인정받으니 얼마나 좋으냐’는 축하인사를 들을 때면 억장이 무너진다. 20년 가까이 여론과 제도 변화에 울고 웃기를 반복했다. 사과와 순직처리 외에 바라는 게 없는데, 왜 이렇게 변화는 더디기만 한지 김 씨는 이해할 수가 없다.
현행대로라면 김훈 중위가 순직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자살이라는 군 당국의 조사 결과를 받아들이고, 국방부의 재심을 받는 것뿐이다. 사망 유형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순직 인정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국회, 대법원,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국민권익위원회 등 4대 기관은 ‘자살이 아닐 수 있다’는 결론을 내놨지만 국방부는 요지부동이다. 현장 검시를 하기도 전에 발표한 ‘자살’이라는 결론을 굽히지 않고 있다.
진상규명 불능 판정을 받은 48명 중에 순직 처리된 사례는 단 한 건이다. 그 한 건은 1960년 사망한 이 아무개 씨로, 유족이 ‘자살’이라는 국방부의 조사결과를 수용하면서 얻은 결과다. 2009년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국방부의 의견과 달리 이 씨가 자살이 아닐 수 있다는 결론을 내놓은 바 있다. 이처럼 의문사 유족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다. 미심쩍은 조사결과를 인정하고 순직인정을 받거나, 고통 속에 진상규명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군의문사라는 문제가 세간의 이목을 끌기 시작한 지 20년이 돼 가지만, 변화는 한없이 느리다. 군의문사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한 건 김훈 중위 사건이 알려지면서부터다. 국방부는 지속적으로 자살을 주장했고, 유족은 인정할 수 없다며 재조사를 요구했다. 천주교인권위원회를 중심으로 군 의문사 유족들은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군의문사진상규명과군폭력근절을위한가족협의회(군가협)’가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군 의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들의 시위 모습.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군의문사에 관한 문제 논의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2006~2009년이다.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군의문사위)가 대통령 직속 기구로 활동할 당시였다. 노무현 정권 시절 추진됐던 과거사정리의 일환으로 군의문사에 관한 사항을 전반적으로 재조사했다.
하지만 임기 3년의 한시적 기구였다. 군의문사위에 진정된 사건은 총 600건에 달했지만 이를 처리하긴 시간이 부족했다. 정해진 기간 동안 처리한 건은 390여 건에 불과했다. 유족과 시민사회의 서명운동 등 지속적인 요구로 활동기간은 1년 연장됐다. 하지만 남은 사건을 모두 처리하기엔 매우 촉박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정권이 바뀌면서 예산은 대폭 삭감됐고, 그 영향으로 조사관 수는 절반으로 줄었다. 막판 10개월간은 시간에 쫓겨 제대로 심사를 받지 못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유족도 생겨났다.
평가는 일부 갈리지만, 군의문사위는 진정된 사건을 모두 처리하며 성과를 올렸다. 600건 중 246건에 대해선 사실 규명을 완료했다. 타살로 확인된 사례는 17건이었으며, 질병, 사고사 등으로 원인을 규명해 사망한 병사의 명예를 찾아줬다. 재조사 중 군 당국의 은폐시도, 부실한 초동대응 등 실상이 밝혀지기도 했다. 또 부대 내 가혹행위로 인한 자살자가 국가의 책임이라는 세간의 인식을 끌어냈다. 이로써 군부대 내 부조리가 자살에 직간접적 영향을 미쳤다면 적극적으로 순직 인정을 받게 됐다.
하지만 이후 군의문사 관련 논의는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 한 상태다. 김광진 의원이 ‘군복무 중 사망자에 대한 포괄적 순직을 인정해주자’는 취지의 법안(군인사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내놨지만 상임위에 발이 묶인 상태다. 김광진 의원은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다 숨졌는데 사망원인도 알 수 없어 애태우는 유족이 많다”며 입법 취지를 설명했다.
하지만 언제쯤 법안이 통과될지 불투명한 상태다. 국방부의 반대 역시 만만치 않다. 김광진 의원실의 김규현 비서관은 “국방부에서는 전사·전상자와 자해사망 또는 일반사망자에 대한 구분이 없어 역차별이 될 거라는 의견으로 난색을 표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훈 중위의 아버지 김척 씨는 “애초부터 국방부가 부정적인 의견이었다. 법안이 통과될지 모르겠다”며 회의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세간의 무관심과 군 당국의 부정적 입장에도 의문사 유족들의 싸움은 현재진행형이다. 병영 환경이 좋아지고 있다지만 부대 내 자살사건은 끊이지 않고 있다. 죽음의 진실을 밝혀달라며 시신 인수를 거부하고 있는 ‘장기 미인수 영현’도 135위가 군에 남아 있다.
천주교인권위원회 방성준 활동가는 “군이 필요해 데려갔으니 문제가 생기면 책임지라는 요구는 아주 당연한 것 아닌가. 군의문사 문제에 대한 진척이 이렇게 느린 이유는 기본적인 책임을 방기하는 군 당국의 태도 때문이다”라고 꼬집었다.
서윤심 기자 heart@ilyo.co.kr
유가족 두번 울리는 군당국 수사관이 사망 병사 어머니에…“종종 만나 뽀뽀하자” A 씨의 아들은 2002년 군에서 사망했다. 아들의 정확한 사망 원인을 알고 싶다며 A 씨는 육군에 재수사를 의뢰했고, 그 과정에 황당한 일을 겪었다. 수사를 맡던 헌병 수사관에게 “때론 친구로 때론 애인으로 만나고 싶다”는 등의 성적요구가 담긴 문자를 받았던 것. 해당 수사관은 여러 차례 문자를 보내 “종종 만나서 뽀뽀도 하고 싶은데 어쩌지 화끈하게”, “무덤까지 비밀 지키기로 해”, “뭘 생각해 본다는 거야 쫀쫀하게. 즐겁게 사시오 후회말구” 등의 내연관계를 갖자는 요구를 받았다. 부실한 초동수사로 아들이 군에서 ‘자기 색정사’로 숨졌다는 불명예를 안고 살아야 했던 유족도 있다. 박 아무개 중위는 1998년 4월 12일 장교 숙소에서 머리에 비닐을 뒤집어 쓴 채로 질식사 했다. 사망 당시 박 중위 옆에는 만화책이 펼쳐져 있었다. 군은 이를 근거로 만화책을 ‘도색잡지’로 단정지어버리고 사망 원인을 자기색정사라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뒤늦게 이 만화책이 청소년들이 즐겨봤던 만화 연재잡지 <챔프>였고, 조사 중 만화책을 여성이 나온 페이지로 바꾸는 등의 현장 훼손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박 중위의 유족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14년간의 불명예를 씻게 됐다. 군에서 숨진 장병의 사주를 봐 ‘요절할 팔자’라는 쪽지를 부모에게 준 대위도 있었다. 2001년 2월 입대해 자대에 배치 받은 지 13일 만에 숨진 김 아무개 이병(사망 당시 21세)의 유족은 유품에서 “금년에 오사(재앙 입어 급사)상이 있으니 자진 사고로 2월에 급사”라고 적힌 쪽지를 발견했다. 쪽지를 보고 분개한 유족들은 부대를 찾아가 “사람이 죽은 마당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점괘를 받아오느냐”고 따지자 담당 대위는 “사주 강릉에서 봤는데 잘 맞지 않나요”라고 답했다. 해당 철학관에 찾아가 경위를 묻자 “군복 입은 사람이 찾아와 돈 주며 그렇게 써 달라 했다”고 말했다. 군 당국은 ‘개인적인 일탈’로 치부하며 사과도 하지 않았다. 또 사망 직후 유족이 재조사를 요구하자 다시 해당 대위에게 조사를 맡기기까지 했다. 군의문사위는 2009년 김 이병 사망에 대해 순직처리를 권고했지만 군 당국은 결국 이를 기각했다. [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