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에 발견된 무령왕릉은 도굴 안된 고대무덤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았지만 발굴 작업 수준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사진은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유물들(왼쪽)과 내부 모습.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1971년 7월 여름, 긴 장마 탓에 공주시 금성동에 위치한 송산리 6호분 내부 침수 가능성이 높아졌다. 배수로 공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후 진행된 배수로 작업 중 한 인부의 삽에 단단한 무엇이 부딪혔다. 송산리 6호분에서는 볼 수 없는 아치형 구조물이었다. 또 다른 무덤의 입구일 수 있었다. 배수로 공사는 중단됐다. 곧이어 7월 7일 문화공보부 장관 주재 회의가 열렸고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이었던 김원용 박사를 단장으로 발굴단이 조직됐다.
7월 8일 새벽 공주로 내려간 발굴단은 무덤에 도굴 흔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된 상황에서 도굴되지 않은 고대 무덤이 발견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폐쇄된 입구를 개방하고 지석(죽은 사람의 인적사항이나 무덤의 소재를 기록하여 묻은 돌)을 발견한 발굴단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삼국시대 무덤 중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이 확실히 밝혀진 최초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날 무령왕릉에서는 108종, 46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한국 문화재 발굴 역사의 한 장면을 장식했다.
무령왕릉 발굴은 20세기 한국 최대의 발굴이었지만 발굴 작업 수준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유물이 훼손될 수 있다는 압박감 탓에 3~4년이 걸리는 발굴 작업이 단 17시간 만에 마무리됐다.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한 유물들이 하나씩 옮겨진 후 남아있는 잔존물들은 삽으로 떠져 포대자루 안에 담겨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무령왕 추정 유골은 이렇게 장장 38년간 박물관 수장고에 잠들게 된다.
무령왕릉 잔존물들은 1990년대 국립공주박물관이 새로운 무령왕릉 발굴보고서 발간을 위해 출토 유물을 재정리하면서 다시 빚을 보게 됐다. 이 과정에서 다른 유물과 뒤섞여 잠자던 무령왕 추정 유골의 존재가 확인됐다.
국립공주박물관 김동우 학예실장은 “1971년에 발굴된 무령왕릉의 보고서가 2년 만인 1973년에 나왔다. 전체적인 보고가 잘못된 것도 있고, 채색 안료 등 당시 과학기술로는 밝힐 수 없었던 사실들도 있어 새로운 무령왕릉 보고서 사업이 진행됐다”며 “포대자루에 담긴 잔존물은 체로 치거나 흙을 분리해 잔존유물을 발굴하는 식으로 지속적으로 조사가 이뤄지고 있었다. 그 외에 참고품을 확인하던 중 2009년에 무령왕릉이라고 적힌 봉투에서 유골이 발견이 됐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무령왕릉 발굴 38년 만에 등장한 이 유골로 다시 한 번 고고학계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당시 무령왕릉은 순장 기록이나 도굴 흔적이 없어 유골의 주인공이 무령왕이나 왕비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제기돼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유골의 방사선탄소연대를 측정하고, 안정동위원소와 DNA를 분석하면 유골 주인의 사망원인과 성별, 나이, 건강 상태 등을 모두 밝힐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모아졌다. 유골의 주인을 확인하면 무령왕이 일본에서 태어났다는 일본서기의 기록 등 고대 한일 관계의 비밀을 풀 수 있는 단서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됐다.
이후 연일 추측성 보도가 이어지고 정치권에서도 무령왕릉과 관련된 이슈가 지속적으로 언급됐다. 이에 국립공주박물관은 후순위로 밀려있던 자연유골 조사를 앞당겼다. 문제는 예산과 시간이었다. 탄소연대측정이나 DNA 분석 등은 시간이 많이 걸리고 예산이 많이 수반 되는 사업이었다. 발견 이후 성인 남성의 허벅지와 엉덩이 뼈일 것으로 추정만 될 뿐이던 무령왕 추정 유골조사팀은 2013년이 돼서야 꾸려졌다.
결과적으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유골의 주인이 밝혀지지 못한 채 조사는 종결됐다. 공주박물관은 지난해 서울대 기초과학공동기기원으로부터 ‘시료 측정 불가’라는 판정을 받았다. 김동우 학예실장은 “시료에서 탄소가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과학적인 측정이 불가능하게 됐다. 현재로서는 무령왕릉이 도굴 없이 처음으로 개방된 곳이고 무령왕과 왕비밖에 없었으니 무령왕으로 추정만 할 수 있는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당시 조사팀이었던 충북대 박선주 교수는 “DNA 검사를 통해 성별과 사망자의 신장 등을 추출해 낼 수 있고, 현대 한국인의 유전자와 비교해보면 인종적 계통도 알 수 있다”며 “다만 뼈들은 일단 자기가 묻혀있던 상태에서 나오면 굉장히 빠른 속도로 부식해 DNA 분석이 사실상 힘들게 된다”고 설명했다.
시료를 파괴해야하는 부담이 따르는 DNA 조사는 유보했다. 김동우 학예실장은 “무령왕 뼈라고 확정을 짓지 못한 상태에서 유물을 훼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재 무령왕 추정 유골은 온습도가 유지되는 곳에서 보관하고 있다. 잔존물을 보존한 후 후학들이 더 좋은 과학기술을 발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이라는 판단을 했다”고 덧붙였다.
1971년 무령왕릉 발굴단에 합류했던 지건길 박사는 “무령왕릉이 워낙 작았기 때문에 무령왕의 유골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방사선탄소연대측정은 시료가 오염이 되면 쉽지 않다. 하지만 결정적인 단서가 없는 상황에서 DNA 조사를 위해 굳이 유물을 파괴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지금은 후학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충남 공주=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
발굴현장 지켜온 노학자의 회한 “선무당이 망친 것…후회스럽다” “무령왕릉 발굴은 모든 과정이 후회스럽다. 나도 공범이다.” 한국 문화재 발굴 역사의 현장을 지켜온 노학자의 목소리에 회한이 묻어나왔다. 1971년 무령왕릉과 1973년 천마총 등 굵직한 문화재 발굴 현장을 지켜온 지건길 박사(72)의 이야기다. 무령왕릉 입구(위)와 발견된 유골. 무령왕이나 왕비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현재 검증할 방법이 없다. 사진제공=공주박물관 지난 1971년 7월 8일 새벽 5시경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 김원용 단장으로 한 발굴단이 급히 공주로 내려갔다. 송산리 6호분 주변에서 또 다른 무덤으로 추정되는 입구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 하루 만이었다. 입구로 추정되는 곳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오후 3시경이었다. 김원용 단장을 비롯한 발굴단은 무덤 입구 개봉에 앞서 위령제를 올렸다. 흰 종이 위에 북어 세 마리와 수박 한 통, 막걸리를 올린 것이 전부였다. 모여드는 구경꾼들과 취재진이 북새통을 이루기 시작하면서 발굴단은 현장이 훼손될까 점점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입구를 폐쇄한 벽돌을 하나씩 치우기 시작하면서 새어나온 무덤 내부의 찬 공기는 더운 여름철의 공기와 만나 흰 수증기로 변했다. 1400년여 만에 문이 열리는 무령왕릉 입구에서 연출된 신비로운 분위기에 일순간 수많은 보도진과 주민들 사이에 정적이 감돌았다. 통로가 확보되고 무덤 안을 살펴 본 발굴단은 수많은 눈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애써 담담함을 유지했지만 내심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도굴당하지 않은 왕릉, 그것도 정확히 누구의 무덤인지 밝혀진 적 없던 삼국시대 무덤 중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공이 표시된 지석이 발견된 것이다. 게다가 무덤의 주인공은 중국과 한반도 일본열도를 잇는 길을 열고 백제 문화의 꽃을 피운 무령왕이었다. 지건길 박사는 “너무 엄청난 광경이 펼쳐진 탓에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수많은 보도진과 경찰, 주민들이 발굴단을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발굴단은 수많은 눈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애써 태연한 척해야 했다.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 챈 몇몇 보도진은 이미 편집국으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나중에서야 발굴단장은 무덤에 있는 지석이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을 나타내고 있다고 발표했다. 순간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보도진들은 경쟁적으로 무덤 안 진입을 시도했다. 현장의 질서를 유지하고 유물 훼손을 막기 위해 한 언론사씩 들어가 서너 장의 사진을 찍기로 가이드라인을 마련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유물을 촬영하다 청동 숟가락이 밟혀 부러졌고, 현장에 뒤늦게 도착한 신문사 기자는 자기네 회사에만 연락이 늦었다며 문화재관리국 직원의 뺨을 때리기도 했다. 지건길 박사는 “서두른 것이 문제였다. 워낙 엄청난 유물이 나왔기 때문에 발굴단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당시 전국의 모든 언론이 다 현장에 몰려왔다. 속보경쟁은 언론사의 숙명이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며 “서둘러 유물을 수습해야겠다는 압박감이 몰려왔다. 큰 유물들은 포장을 해서 옮겼는데 가루처럼 변해있는 것들은 수습할 여유가 없었다. 끝이 뭉툭한 큰 삽으로 남은 잔존물들을 부대에 쓸어 담았다”고 털어놨다. 실측, 촬영, 유물 수습 등 3~4년에 걸쳐 이뤄져야 할 무령왕릉 발굴 작업은 단 17시간 만에 끝이 났다. 유물 수습이 끝난 다음 날에는 서울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이 공주에서 발견된 유물을 만지며 살펴보는 모습이 보도됐다. 공주시민들은 어째서 공주에서 발견된 유물이 하루아침에 서울로 반출됐냐며 항의하는 일도 벌어졌다. 40여 년이 지나서야 무령왕 추정 유골이 발견된 것도 어쩌면 이미 예정된 사태였다. 지건길 박사는 “무령왕릉 발굴 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면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순간이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이러한 뼈저린 교훈은 1973년 천마총 발굴의 반면교사가 됐다. 천마총을 발굴할 때는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1년이라는 시간을 들였다. 무령왕릉 때의 귀감이 없었다면 천마총 발굴을 성공적으로 마치지 못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