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거법 위반 재판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고 있는 여권과 사법부가 올해 대법관 교체를 계기로 정면충돌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03년 8월 오찬회동하는 노무현 대통령(왼쪽)과 최종영 대법원장으로 기사 내용과는 관련 없음. | ||
열린우리당 의원들이나 당직자들이 공개적으로 법원에 불만을 토로하는 것은 물론 친노성향의 매체도 여권인사들에게 가혹한 법관에 대한 비판에 나서고 있다.
이에 대해 법원은 “오로지 판결로만 말한다”며 일체의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올해 대법원장을 비롯 총 6명의 대법관이 교체되는 것을 계기로 여권과 사법부가 정면으로 충돌할 수 있다는 우려감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총선 때의 선거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았거나 받고 있는 여당 의원은 총 18명이다. 이중 이상락 의원은 이미 대법원에서 의원직 상실이 확정됐고 나머지 의원 중 9명이 1·2심에서 당선무효형(벌금 1백만원 이상)을 받은 상태다. 8명의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고 있고 이중 단 2명만 당선무효형이 선고된 한나라당과 크게 대비되는 현상이다.
이 같은 추세가 이어지면 우리당은 지난 총선에서 어렵게 획득한 원내 과반의석을 잃게 되는 것은 물론 한나라당과의 의석 격차도 20여 석 이내로 좁혀지게 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사법부에 대한 여권의 불만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우리당의 율사 출신 송영길 의원은 최근 자신의 홈페이지에 “우리 당 의원들에 대한 가혹한 판결을 보면서 여러 가지 착잡한 생각이 든다”며 사법부에 대한 불만을 털어 놓았다. 그는 “사법부가 특정 정당에 대한 정서적 적대의식 표출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최소한 정치적 사건에 대해서는 여야간 균형감각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 의원은 이어 “검찰이나 법원에서 여당이기 때문에 불이익을 받는다는 역차별이 공공연하게 느껴진다”고 덧붙였다. 송 의원 자신도 의정보고서를 통해 불법선거운동을 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으며 1심에서 벌금 70만원이 선고돼 당선무효형은 겨우 피해가 있는 상태다.
이처럼 여권이 현재의 사법부를 보는 기본적인 시각은 보수적인 판사들이 대다수인 사법부가 지난 대선 때도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지지 기반이었고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지 못하자 판결로 한나라당을 지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여권은 사법부의 ‘가혹한’ 판결이 여당 내 386의원들에게 집중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실제 1심재판에서 검사의 구형이 3백만원이었던 한병도 의원은 1천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판사가 검사의 구형량보다 높은 형량을 선고하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다.
여기에 `노동당 가입’ 파동을 겪었던 이철우 의원도 2심에서 2백50만원을 선고받았고 오영식 의원은 1백50만원을 선고받았다. 복기왕 의원은 1심에서 5백만원, 2심에서 2백만원을 선고받아 모두 의원직 상실 위기에 처해 있다. 이들 의원들은 모두 대학시절 총학생회장 등을 지낸 운동권 출신 386이다.
여당의 한 당직자는 “지난해 김영란 대법관이 임명되고 여권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본격화면서 사법부에서 위기의식이 높아지고 있고 이는 여당 의원들, 특히 진보적인 의원들에 대해 중형 선고로 이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 지난해 8월 서열파괴 인선으로 화제를 모은 김영란 대법관 인사청문회 장면. | ||
이처럼 사법부에 대한 여권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급기야 친노그룹에서는 여권에 불리한 판결을 내리는 판사 개인에 대한 공격에 나서기까지 하고 있다.
최근 대표적인 친노 인터넷 매체로 불리는 서프라이즈는 서울고법 아무개 판사를 비판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한나라당 인사에는 `약한’ 판결을 우리당을 비롯한 범여권인사들에게는 `가혹한’ 판결을 내린 아무개 판사가 지난해 11월 개인홈페이지에다 “올해가 가기 전에 거물 몇 명을 더 집어넣어야 ㅎㅎㅎ”라는 글을 남겼다는 것이다.
이 글은 이 판사의 개인홈피에 들른 후배 검사의 안부 인사에 답글로 남겨진 것이다. 특히 이 글은 이 판사가 대부업체 굿머니에서 불법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신계륜 우리당 의원의 항소를 기각하고 의원직 상실형을 선고한 지 1주일 만에 올라온 것이어서 더욱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 서프라이즈는 “지나가는 말로 듣기에는 너무 섬뜩한 이야기며, 공정한 양심에 따라 판결을 내려야 하는 판사가 올해 가기전에 거물들을 몇 더 집어넣는 판결을 하겠다는 얘기를 공공연하게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물론 지인과 주고받은 편안한 대화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은 금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후보·당선자 비서실장을 거친 3선의 신 의원을 `처리’한 직후에 나온 `거물 몇 명을 더 집어넣겠다’는 발언은 사실상 입법부를 바라보는 사법부의 시각이 아니겠느냐”고 주장했다.
이 판사는 `DJ 저격수’로 유명한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에게는 의원직이 유지되는 벌금형을, 신경식 전 한나라당 의원에게는 검찰의 항소기각을, `안풍’ 사건과 관련해 YS의 오른팔로 알려진 강삼재 전 의원에게는 `징역 4년’의 1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한 바 있다.
반면 여권의 신계륜 의원을 비롯, DJ측 인사인 신승남 전 검찰총장은 무죄를 선고한 1심을 깨고 징역1년, 집행유예 2년의 유죄를, 한광옥 전 대통령비서실장에게는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이에 대해 해당 판사는 “후배 검사에게 열심히 일하라고 격려한 안부인사에 대해 꼬투리를 잡는 것”이라며 “대응할 가치도 없다”고 어처구니 없어 했다.
실제 이 글 자체는 단순한 안부 인사임에 틀림이 없지만 친노그룹에게는 그동안 쌓였던 사법부와 판사들에 대한 불신감을 폭발시켜 주는 도화선이 된 것이다. 이는 사법부에 대한 여권과 친노그룹의 불만이 조그만 계기만 있어도 폭발할 정도로 위험 수위에 올라 있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 같은 사법부와 여권 사이에 형성된 긴장상태는 올 9월에 있을 신임 대법원장 임명 때 일합을 겨루는 것으로 표면화될 전망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사법부를 자신의 코드에 맞는 개혁성향의 인물을 새 대법원장으로 지명하면 사법부는 물론 한나라당과 보수층의 반발이 클 것이고 이에 맞서 여권과 친노그룹은 사법부 개혁을 내세워 `맞불’을 놓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