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김 총장 역시 예도 위에 서 있긴 마찬가지다. ‘국정원 댓글 사건’ 당시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 그랬듯이 이 사건 수사 결과에 따라 김진태 총장은 현 정부와 일대 활극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다.
# 회심의 미소 짓는 김진태, 그러나…
성완종 리스트는 사실상 임기가 8개월밖에 남지 않은 김 총장에게 정국 주도권이라는 칼자루를 쥐어주었다. 남은 임기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인사권마저 없는 상황이던 김 총장으로선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혼외자 의혹으로 채동욱 전 총장이 낙마한 후 청와대의 검찰 길들이기가 심각했던 만큼 김 총장으로선 그런 상황을 타개할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웬일인지 김 총장은 이 사건 수사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후문이다. 사건의 성격이 워낙 정치적으로 민감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라는 전언이다. 김 총장의 지근거리에 있었던 검찰 간부 출신 인사는 “김 총장은 이번 사건을 별로 수사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며 “그러나 역사적 흐름이라는 게 있으니 가야 한다면 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며 떠밀려가는 듯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김 총장은 성 전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다음날인 지난 10일 <경향신문>이 ‘성완종, 김기춘 10만 달러 허태열 7억 원 줬다’고 보도한데 이어 성완종 리스트까지 나왔는데도 수사 착수 여부에 대해선 미지근한 태도로 일관했다.
당시 박성재 서울중앙지검장과 최윤수 3차장을 불러 성완종 리스트의 작성 경위, 메모지의 신빙성, 수사 가능성 및 법리 등에 대해 철저히 검토한 뒤 결과 보고를 하라고 주문하면서도 수사에 착수하라는 지시는 하지 않았다. 심지어 김 총장 면담 직후 최 차장은 검찰이 성완종 리스트에 대해 본격적인 수사를 시작했다는 언론보도와 관련, “리스트 진위 여부 파악일 뿐 본격적인 수사 착수는 아니다”며 한발 빼는 모양새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다 검찰은 마지못해 지난 12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성완종 사태 규명을 위해 철저히 수사해야 한다”고 밝히자 뒤늦게 특별수사팀을 꾸리고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검찰 고위 관계자는 “금품 공여자가 사망했기 때문에 수사가 엄청나게 어려운 사건”이라며 “그래서 검찰 내부에서도 안하고 싶은 게 솔직한 입장”이라고 전했다.
문무일 특별수사팀장
‘황교안 법무부 장관-안태근 법무부 검찰국장-청와대 민정수석실’ 간 교감을 통해 문 팀장을 낙점한 이유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김 총장도 그를 신뢰할 것이란 의미다. 청와대 등 ‘윗선’에서야 실체가 밝혀지지 않을 때를 대비해 호남 출신 팀장이 수사를 해도 어렵더라는 명분 축적용이거나, 다른 검사장들에 비해 유연한 태도 때문에 문 팀장을 선택했겠지만, 김 총장은 오히려 그의 역량을 높이 사 윗선의 낙점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관측이다.
김 총장의 한 측근 인사는 “김 총장은 할 수 없이 간다는 입장이지만 문 팀장에게 바람막이가 필요한 경우 그 역할을 충분히 해줄 사람”이라며 “문제는 뭔가 새로운 게 나오는 것보다는 안 나올 가능성이 더 크니 걱정 아니냐. 김 총장이 수사팀을 적극 독려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런 영향도 있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특히 “아마도 특별수사팀이 얼마나 밝혀내느냐가 앞으로 김 총장의 입지와 검찰의 운명을 결정짓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 ‘정교하지 못한 칼잡이’ 우병우
지금이야 성완종 리스트의 실체를 밝혀내는 게 시급한 문제지만, 검찰 수사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사실상 정치권을 중심으로 ‘우병우 책임론’이 불거질 수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우 수석은 물밑에서 전 정부를 겨냥한 사정의 밑그림을 그리고 그동안 박성재 서울중앙지검장 등과 직접 소통하면서 사정 전 과정에 개입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 관계자는 “검찰 내에서 기획이 잘못됐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는 게 사실”이라며 “자원외교비리 의혹 사건의 경우 처음에 몇 건 검찰에 고발됐을 당시 산업자원부의 정책적 판단일 수 있다는 게 검찰의 입장이었는데 이런 상황이 급격하게 범죄 혐의를 두는 쪽으로 바뀌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무엇보다 성 전 회장과 경남기업을 자원외교비리 의혹 사건으로 처벌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수사팀 일선에서 올라간 것으로 안다”며 “그러나 윗선에서 ‘그래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전해 들었고 그 과정에 우 수석이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사실 앞으로가 더 문제다. 국정원 댓글 사건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황교안 법무부 장관 등이 무리하게 수사에 개입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선 수사팀이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에게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려 하자 황 장관이 사실상 수사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수사 및 지휘 라인에 있었던 한 인사는 “법무부와 청와대가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에 정말 심각할 정도로 개입했었다”며 “‘압수수색은 왜 하느냐’, ‘이런 증거를 가지고 왜 기소를 하느냐’ 등 하나하나 다 문제를 삼았던 기억이 난다”고 전했다.
국정원 댓글 사건 못지않게 이번 사건도 현 정부의 정당성이나 도덕성과 직결된다. 친박계 핵심 인사들이 성완종 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것만으로도 현 정부의 도덕성은 이미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금품을 받은 사실이 수사를 통해 현실로 드러날 경우 박근혜 대통령은 심각한 레임덕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우 수석이 특별수사팀의 수사 과정에 개입할 가능성이 큰 것도 이 때문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자원외교비리 의혹 사건을 사정수사 대상으로 판단한 것은 우 수석이 무리하게 했다는 공감대가 청와대 내에서도 형성돼 있다”며 “지금 물러나면 기획사정을 했다는 것과 그 기획사정이 실패했다는 것을 시인하는 꼴이 되니까 사태가 수습되고 나면 교체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검찰 최고위직 출신의 한 법조인은 “우 수석은 검찰에 있을 때부터 칼잡이로 유명했지만 그는 날카로운 검을 정교하게 다룰 줄은 모르는 검사였다”며 “그런 사람이 사정을 기획하니 이런 불상사가 생긴 것”이라고 평했다.
김근호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