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이 ‘성완종 리스트’ 파문으로 재보선에서 수세에 몰리자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가 4월 16일 오후 비공개 단독 회동을 가졌다. 사진제공=청와대
재보선 당일이던 4월 29일 밤 11시경 김무성 대표가 당사에 마련된 상황실에 들어서자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새누리당의 ‘수도권 싹쓸이’가 확실시되던 무렵이었다. 당직자들은 ‘김무성’을 연호했고, 김 대표도 일일이 손을 잡으며 화답했다. 당시 자리에 있던 새누리당 관계자는 “혹시나 했던 관악을까지 이겨 축제 분위기였다.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던 선거였기에 기쁨이 훨씬 컸다. 공천에서부터 유세까지 모든 것을 일일이 챙겼던 김 대표도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라고 전했다.
여권에서는 김 대표가 새누리당 승리 일등공신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김태호 최고위원은 김 대표를 ‘선거의 남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선거의 여왕’으로 통했던 박 대통령을 빗댄 말이다. 김 대표는 ‘성완종 리스트’ 파문으로 선거 판세가 힘들어지자 ‘해결사’ 역할을 자처했다. 김 대표는 휴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검찰의 성역 없는 수사를 촉구한 데 이어 순방을 앞두고 있던 박 대통령과 독대하며 수습책 마련에 나섰다. 여러 의혹에 휩싸인 이완구 국무총리의 자진 사의를 이끌어낸 것도 김 대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 대표는 이번 선거 승리로 대권 주자로서의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우선 내부적으로는 친박·비박을 떠나 명실상부 차기 ‘원톱’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동안 김 대표와 미묘한 대립각을 세워왔던 친박 내부에서조차 ‘김무성에겐 안 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었다. 실제로 친박계에선 ‘김무성 대항마’를 찾기 힘든 상황이다. 또한 김 대표는 대권 라이벌 문재인 대표를 꺾었다는 점에서도 ‘상한가’를 치고 있다. 김 대표는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30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23.4%를 기록했는데, 이는 재보선 전에 비해 7%포인트(p)가량 급등한 수치다. 문 대표와는 불과 0.2%p 차다.
무엇보다 김 대표의 가장 큰 소득은 박대통령과 긴밀한 협력 체제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현 정부 개국공신이었지만 지난해 7월 전당대회 등을 거치며 사실상 ‘탈박’에 속했던 김 대표는 개헌 문제,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 등을 놓고 여권 핵심부와 불협화음을 냈었다. 김 대표 측으로 분류되는 새누리당 의원은 “김 대표는 당청 관계를 재정립하겠다는 일성으로 대표로 뽑혔다. 청와대와 마찰을 빚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면서 “그러나 차기 주자이기도 한 김 대표는 현직 대통령과 틀어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 때문에 최대한 목소리 내는 것을 자제해왔다”고 말했다.
김 대표와 박 대통령을 다시 이어준 계기는 다름 아닌 ‘성완종 리스트’였다. 전대미문의 스캔들이 불거지자 당·청 수장이 머리를 맞댄 것이다. 김 대표는 재보선 내내 이병기 비서실장을 연결고리로 박 대통령과 의견을 나눠 온 것으로 전해진다. 친박 실세들의 금품수수 의혹을 성완종 특별사면 이슈로 돌린 것도 그 결과물이다. 김 대표는 박 대통령 순방 기간 동안 성완종 특사 의혹을 여러 차례 제기했고, 박 대통령은 국내로 돌아와 와병 중에도 특사 문제를 거론하며 이를 뒷받침했다. 사전에 어느 정도 조율됐을 것으로 추측케 하는 대목이다.
그 중에서도 지난 4월 16일 이뤄진 ‘깜짝 독대’는 백미로 꼽힌다. 박 대통령과 김 대표는 배석자 없이 청와대에서 45분간 대화를 나눴다. 전혀 예정에 없던 만남으로, 김 대표가 먼저 제안한 것으로 전해진다. 권대우 정치평론가는 “박 대통령이 김 대표 독대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데 의미를 둘 필요가 있다. 그동안 박 대통령은 김 대표를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스탠스를 취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국정 파트너이자 김 대표를 인정하겠다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둘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그 이후 일련의 상황들을 살펴보면 대략 짐작이 간다. 이완구 총리 자진 사퇴, 성완종 특사 의혹 등이 대화 테이블에 올라갔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앞서의 김무성계 의원은 “김 대표는 박 대통령에겐 아무런 감정이 없다. 다만, 박 대통령 참모진이 문제가 많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그들이 박 대통령 눈과 귀를 가리고 있다는 것이다. 성완종 정국에 대한 심각성을 가감 없이 전하고자 독대를 요청했던 것으로 안다. 이 총리 사퇴 얘기도 꺼냈다고 한다”고 귀띔했다.
정치권 일각에선 이러한 박 대통령과 김 대표의 밀월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란 관측도 나오긴 한다. 친박계 주변에선 여전히 김 대표를 ‘배신자’로 보는 기류가 감지되기도 한다. 김 대표를 믿을 수 있겠냐는 것이다. 한 친박 의원은 사석에서 “전략적으로 김 대표와 한 배를 탔을 뿐이다. 박 대통령은 김 대표를 언제든 배제할 수 있는 인물로 여긴다”고 귀띔했다. 김무성계 의원도 “박 대통령이 기존의 ‘마이 웨이’식 정치를 고수한다면 김 대표와 충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을 국정 수레바퀴의 또 다른 한 축으로 인정해야 그러한 상황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분간은 박 대통령과 김 대표의 ‘오월동주’가 지속될 것이라는 견해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박 대통령은 친박계가 와해된 상황에서 각종 개혁 드라이브를 걸기 위해선 집권당을 이끄는 김 대표 협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김 대표 역시 굳이 박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워야 할 명분은 없는 상황이다. 조기 등판에 따른 부담감도 김 대표로선 무시하지 못할 변수다. 박 대통령과 김 대표의 정치적 셈법이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권대우 정치평론가는 “큰 선거가 없는 올해까진 신 밀월시대가 유지될 것으로 본다. 대신 기존의 청와대 독주 당·청 역학구도가 김 대표 중심의 새누리당으로 옮겨지는, ‘파워 시프트’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고 점쳤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