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완종 리스트 수사를 두고 여권 주변에서는 “검찰이 컨트롤되지 않고 있다”는 말이 돌아 관심을 끌고 있다. 사진은 김진태 검찰총장(왼쪽)과 박근혜 대통령. 일요신문 DB
성완종 정국 초반은 청와대 뜻대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노무현 정권 당시 이뤄진 성 전 회장 특사가 집중 부각되면서 정작 현 정권 실세들이 연루된 리스트 논란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성완종 메모 8인 중 유일한 비박계 인사 홍준표 경남지사를 최우선 수사 대상으로 고른 것 역시 정치적 의도가 숨겨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세간의 관심은 성 전 회장 특사 의혹과 홍 지사에게로 쏠렸고, 덕분에 새누리당은 어려울 것이라던 재·보궐 선거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문무일 특별수사팀장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이 전 총리 사퇴가 오히려 청와대에 의한 검찰 통제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될 수 있다는 반박도 적지 않다. 리스트 8인 중 성 전 회장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정황이 가장 뚜렷했던 이 전 총리가 ‘희생양’이 됐다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새누리당 비박계의 한 의원은 “박 대통령 입장에선 대선자금이 파헤쳐지는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전 총리는 사실 친박 내에서도 변방으로 분류됐었다. 대선 때 돈 문제 등 민감한 사안은 잘 모를 가능성이 높다. 홍 지사는 말할 것도 없다. 특별수사팀이 둘을 먼저 수사선상에 올렸다는 게 과연 우연일지 의문이 든다”고 전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성완종 메모에 적힌 홍문종 의원(조직총괄본부장), 유정복 인천시장(직능총괄본부장), 서병수 부산시장(당무조정본부장)은 지난 2012년 대선 캠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인사들이다. 자금 모집 및 관리 역시 이들의 몫이었다. ‘친박 3인’에 대한 수사가 대선자금과 직결된다는 뜻이다. 이는 여권 핵심부가 가정하는 최악의 상황이기도 하다. 정치권과 사정기관 관계자들이 이들에 대한 수사 가능성을 낮게 점치는 이유였다. 설령 수사가 이뤄진다 하더라도 ‘면죄부’를 주는 데 그칠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앞서 언급한 친박 의원은 “수사는 생물이라고 하지 않느냐. 수사 과정에서 또 어떤 폭탄이 터질지 모르는 일이다. 애초에 안 하는 게 최상의 시나리오”라고 귀띔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여권 주변에선 “검찰이 컨트롤되지 않고 있다”는 말들이 확산되고 있어 비상한 관심을 끈다. 홍 지사와 이 전 총리 수사를 마무리 짓고 2라운드를 준비 중인 특별수사팀이 대선자금을 정조준하고 있고, 이 과정에서 청와대와의 불협화음이 들리고 있는 것이다. 청와대 한 고위 관계자는 사석에서 몇몇 기자에게 ‘비보도’를 전제로 “(검찰과)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지 않은 것 같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상황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에 대해 우려스러운 부분이 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와 관련, 특별수사팀이 지난 5월 15일 성 전 회장이 설립한 서산장학재단 압수수색에 나선 것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서산장학재단이 성 전 회장 비자금 통로 중 한 곳으로 지목되어온 까닭에서다. 특별수사팀은 그동안 경남기업과 그 계열사, 또 임직원 자택 등을 여러 차례 압수수색했지만 서산장학재단은 그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를 두고 검찰이 대선자금 수사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이 전 총리나 홍 지사와 달리 친박 3인에 대한 의혹은 성 전 회장 메모가 거의 유일한 증거다. 그만큼 어려운 수사가 될 수밖에 없다”면서 “2012년 대선 당시 서산장학재단 자금 흐름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검찰이 본격적으로 대선자금 수사에 착수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4월 3일 분식회계 등의 혐의로 서울 서초동 중앙지검에 출석하기에 앞서 취재진의 질문을 듣고 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이에 대해 검찰 측은 그동안 제기됐던 의혹을 모두 살펴보는 차원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대선자금뿐 아니라 성 전 회장 정·관계 로비, 특사 의혹 등을 동시에 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검찰은 대선자금 쪽에 수사력을 모으고 있는 모양새다. 성 전 회장 특사 문제는 ‘균형 맞추기에 불과할 뿐’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앞서의 서울중앙지검 관계자 역시 “검찰로서는 박 대통령이 ‘법치 훼손’이라고까지 말한 특사 의혹을 다루진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성 전 회장 모두 사망한 상황에서 한계가 분명히 있다. 형식적인 절차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면서 “일단 친박 3인 수사에 총력을 기울인다는 방침”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검찰이 청와대와의 마찰을 무릅쓰고 대선자금 수사 밑그림을 ‘촘촘하게’ 그리고 있는 것에 대해 정치권에서는 상당히 이례적이라는 반응이다. 통상 집권 후반기에나 나타날 법한 사정기관권력 누수 현상의 일환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재경지검의 한 검사는 “성완종 건은 퇴로가 없는 수사다. 결과물을 내지 못하거나 중립성이 훼손된다면 검찰 조직이 엄청난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정치검찰이라는 오명으로 중수부가 폐지된 마당에 또 다시 조직이 도마에 오르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얘기들이 많다. 정치 논리보다는 조직 논리가 더 우선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몇몇 검찰 관계자들은 사정 드라이브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우병우 민정수석에 대한 검찰 수뇌부 불만이 표출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서울중앙지검의 또 다른 관계자는 “우 수석이 저질러 놓은 일을 지금 검찰에서 수습하고 있는 것 아니냐. 더군다나 사법연수원 19기인 우 수석은 김진태 검찰총장(14기) 등에 비하면 한참 후배다. 우 수석이 검찰 인사에서 자신과 가까운 인사들을 요직에 기용하기 위해 힘썼다는 소문도 검찰 입장에선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여러 모로 검찰이 우 수석을 곱지 않게 바라보는 것은 사실”이라면서 “검찰과 청와대 연결고리가 민정수석이라면 지금 소통이 잘 되지 않고 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청와대 안팎에선 불쾌해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몇몇은 검찰총장 교체를 검토해야 한다는 강경한 주문도 내놓고 있다. 그만큼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얘기다. 친박계 한 핵심 원로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검찰이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또 청와대로 정확한 수사 내용을 알려오지 않는다고 들었다. 검찰 쪽에선 ‘특별수사팀 수사에 관여하기 힘들다’는 논리를 펴고 있지만 이걸 누가 믿겠느냐. 여론을 등에 업고 현직 대통령을 흠집 내겠다는 것으로밖엔 이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정치권 눈치를 살피지 말고 공정한 수사를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다. (총장 교체를 포함한) 모종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