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4월 3일 분식회계 등의 혐의로 서울 서초동 중앙지검에 출석하기에 앞서 취재진의 질문을 듣고 있는 모습.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그러자 검찰 내에선 말 그대로 짜증 섞인 반응들이 마구 쏟아졌다. 금품 공여자인 성 전 회장 사망으로 리스트의 실체를 규명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서 특사까지 수사하라며 판을 키우는 박 대통령에게 화가 날 대로 난 것이다. 무엇보다 청와대가 담화문 발표 전 검찰과 사면에 대해 수사하는 게 실제로 가능한지에 대해 타진해보지도 않았다고 알려지면서 검찰 내 불만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 김진태, 밖으로는 ‘침묵’, 안에선 ‘대로’
현재 검찰 내에서 가장 화가 많이 난 사람은 성완종 리스트 특별수사팀(팀장 문무일 검사장)의 보고를 직접 받고 있는 김진태 검찰총장이다. 특히 담화문 발표 이후 법무부를 통해 구체적인 수사 가이드라인이 전해지면서 김 총장의 짜증이 극에 달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김진태 검찰총장.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대검찰청의 한 간부도 “두 차례에 걸친 특사 과정에 이런 금품이 오갔고, 이런 식의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면서 구체적인 단서를 척 안겨주면서 수사를 하라면 우린들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면서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손에 쥔 게 없는데 우리가 굳이 나서서 수사를 하겠다고 밝히면 웃기는 일이 되지 않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 대통령의 요구에 대해 검찰이 “단서가 나오면 수사한다”는 원칙론만을 공개적으로 반복하는 것도 이런 분위기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수사팀의 한 관계자는 “경남기업이 기업활동 과정에서 이뤄진 그 어떠한 행위에 관한 징표가 리스트이고, 그 리스트에 기재된 이름과 금액이 구체적인 단서가 돼 지금 수사를 하고 있는 것”이라며 “하지만 특별사면의 경우에는 그런 게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수사팀의 다른 관계자는 사석에서 아예 “한 칸 한 칸 채우고 기초를 다진 후 기둥을 세우고 해도 그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마당에 그걸(사면) 쳐다볼 시간이 지금 어디 있느냐”며 짜증스러운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현 사정국면에 대한 검찰 내 비판 기류 또한 바꿔놓았다. 그동안 청와대 중심의 기획사정을 비판할 때 주로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에게 화살을 돌리던 이들이 담화문 발표 이후에는 박 대통령을 직접 비판하고 있다. 지방 일선청의 검찰 고위 간부는 “저 정도까지 강하게 나오는 것은 VIP(대통령)의 의지가 아니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며 “문제는 사회구성원들의 인식을 바꾸면서 정착시켜 나가야 할 일을 검찰 수사로 해결하려 하다보면 반드시 부작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 문무일 고민 ‘갈 길은 멀고 손에 쥔 건 없고’
박 대통령이 이미 정치개혁 차원에서 고강도 사정을 주문한 데다, 4·29 재·보궐 선거를 통해 여당이 완승을 거두면서 앞으로 새정치연합 등 야권을 향한 기획사정 드라이브는 더욱 강도 높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지난 4월 29일 황교안 법무부 장관의 국회 발언은 이 같은 관측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황 장관은 이날 성 전 회장 특사 과정에 대한 수사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요즘 범죄가 다양하고 금품이 오간 것 말고도 아시다시피 여러 범죄가 있다”고 밝혔다. 즉, 성완종 리스트처럼 금품 제공과 관련한 구체적인 단서가 성 전 회장의 사면 과정에서 드러나지 않더라도 다른 범죄로도 처벌할 수 있도록 무엇이든 찾아내라는 주문인 셈이다.
문무일 특별수사팀장
하지만 앞으로 ‘청와대-법무부-검찰’ 간에 전개될 치열한 신경전에 비하면 지금 상황은 일도 아니라는 관측이 나온다. 야권 인사들까지 사법처리할 정도로 수사가 진척되지 않아 이완구 전 국무총리나 홍준표 경남도지사만을 기소할 경우 검찰은 청와대-법무부와 충돌이 사실상 불가피하다. 이 부분에서 애써 충돌을 피한다고 하더라도 이 전 총리나 홍 지사에 대한 사법처리 수위를 놓고서도 마찰이 예상된다.
문 팀장도 이런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또 다른 수사팀 관계자는 “성 전 회장의 사면과 관련해 새로운 단서가 나왔을 때보다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을 때의 가능성이 현재로선 더 큰 것으로 판단된다. 무엇보다 경남기업의 조직적인 증거 인멸 및 은닉 혐의에 대해 수사하면서 성 전 회장 측근들을 압박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유의미한 진술을 확보하지 못한 데다, 리스트 실체를 밝혀줄 비밀장부도 손에 넣지 못한 상황 아니냐”며 “지금 이 사건의 끝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청와대나 법무부가 원하는 대로 결론을 정해놓고 수사하는 건 사실상 수사가 아니고 수사팀은 그럴 여력도 없다”고 토로했다.
문 팀장이 이 사건 초기 출입기자들과의 면담에서 “없는 집구석에서 태어나 여기까지 억지로 왔는데 검사로서 지켜온 가치를 끝까지 마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다”면서 사실상 직(職)을 걸고 수사에 임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도 최악의 상황을 모두 감안해서 나온 발언으로 볼 수 있다. 김진태 총장이 이 사건 초기 문 팀장에게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에 검찰 내부에서는 김 총장이나 문 팀장이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나서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것’ 말고 이 사건과 관련해 검찰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는 평을 내놓고 있다.
검찰 입장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사팀과 수뇌부가 이 정도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만큼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처럼 마찰하거나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성완종 리스트 사건의 경우 문 팀장이 김 총장에게 수사 내용을 직접 보고하는 한편, 공보담당도 수사팀 내에 있는 구본선 부팀장이 맡고 있어 국정원 댓글 사건 때와는 달리 수사 보안이 비교적 잘 지켜지면서 수사 관련 잡음이 거의 없다.
검찰 간부 출신의 한 법조인은 “국정원 댓글사건 당시에는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이 수사 지휘라인의 총책임자였고, 특수통인 윤석열 부장이 수사를, 공안통인 이진한 2차장이 공보관 역할을 했다”며 “수사팀 생각과 다르게 이 차장이 국정원 공보관 같은 얘기를 언론에 계속 흘리니까 수사팀으로선 같이 가기 어렵다고 판단하는 등 일선 수사팀과 검찰 지휘라인 간 마찰이 심각했다”고 전했다.
김근호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