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서점가에서 핫한 책의 제목이다. LG전자 프랑스 법인장을 맡았던 에리크 쉬르데주라는 기업인이 한국의 군대식 기업문화를 꼬집었다.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책이나 서류를 던지는 건 예삿일로 받아들이며, 부회장의 사진을 찍었다가 ‘높으신 분’의 사진을 찍었다고 해고되고, 술에 취해 광신도들처럼 ‘하나 되기’를 외치는 임원들. 해당 기업은 “오래 전 얘기”라고 일축했지만 지금도 내 옆, 동료 옆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모두가 잘못됐다는 걸 알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는 문화 앞에서 사회초년생들이 겪는 스트레스는 더하다. ‘막장 드라마’에서나 볼 것 같았던 막장 한국식 기업문화의 민낯을 들춰봤다.
일요신문 DB
“그룹 방송 체조를 할 때도 자리를 벗어나면 심하게 질타를 받습니다.”
온라인에서 갑론을박을 오가게 했던 ‘한국 기업문화를 보여주는 6가지 사례’의 한 대목이다. 글에서는 홍보, IT, 의료회사 등 다양한 분야의 사원들이 겪은 기상천외한 기업문화의 단면을 고발한다.
글을 읽은 한 홍보대행업체 직원 민 아무개 씨(여·28)는 “정말 공감되는 얘기다. 나름 업계에서 알아주는 회사지만 대표의 전횡이 심각하다. 업무 특성상 야근과 출장이 잦아 늦으면 지방에서 행사가 자정 가까이에 끝나는 경우도 있다”면서 “그럼에도 사정이 어떻든 무조건 정시출근을 해야 한다. 1분이라도 늦으면 벌점을 받는다. 대표가 매일 직접 근태보고를 받는다”고 털어놨다.
많은 분야가 살인적인 업무강도를 자랑하지만 광고·홍보 대행업체는 그 정도가 심각하기로 유명하다. 거의 모든 회사의 면접 질문 1순위가 야근과 주말출근이 가능한지 여부다. 광고대행사를 다니는 김 아무개 씨(여·28)의 ‘증언’이다.
“입사 초기에 선배들이 ‘광고대행사는 법정근로시간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법에 명시돼 있다’라고 해서 진짜인줄 알았다. 밤 11시에 퇴근하는 건 일찍 가는 거다. 프로젝트가 임박했을 땐 매일 밤을 새우고 주말 이틀 모두 출근한다. 사실 누가 시키는 건 아닌데 회사 분위기가 그렇다. 야·특근 수당은 ‘제로’다. 업계가 박봉인 데다 추가근무 수당도 없으니 시급으로 따지면 최저임금에도 한참 못 미친다.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는 게 더 놀라울 따름이다.”
남성 직원이 대다수인 건설회사에서는 여직원들이 겪는 스트레스가 적지 않다. 특정 업무만 분리해 ‘여자가 할 일’이라고 강요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 건설회사 신입사원 A 씨(여·25)는 사무실 출입문이 열릴 때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바쁘다. 업무상 오가는 손님에게 커피를 대접하는 게 막내 여직원의 일이기 때문이다.
A 씨는 “부서 배치 첫날 팀장님이 ‘손님 접대는 본인이 하는 게 원칙이다’고 얘기했지만 선배들의 무언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매번 내가 한다”고 털어놨다. 그녀는 같은 팀 여자 선배에게 조심스레 불만을 제기했지만 “남자가 커피 타는 건 남 보기에 좋지 않다”며 되레 꾸중을 들어야 했다.
건설회사에 다녔던 또 다른 여직원은 남성 위주의 회식문화에 상처받고 결국 회사를 나왔다. “입사 직후 환영회부터 폭탄주 연거푸 마시기는 기본이었다. 어느 정도 술이 오르면 노래방에서 도우미를 불러 놀았다. 물론 여자는 나 혼자였다”고 박 아무개 씨(여·29)는 털어놨다.
대기업이라고 다르지는 않다. 아무리 기업문화 혁신을 위해 노력을 한다고 하지만 야근은 직장인들의 ‘숙명’과 같다.
한 대기업 계열사를 다니는 B 씨는 “8시 출근해서 10시까지 저녁도 먹지 않고 일한다. 아침도 거르는 때가 많아 정말 힘들다. 야근 다 끝나고 한잔하고 가자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정말 몸이 남아나질 않는다”며 “일이 다 끝나서 일찍 퇴근한다고 말했다가 된통 혼난 적이 있다. 정말 야근이 필요해서 하면 모르겠지만 팀장이 없을 땐 다들 일찍 퇴근한다. 누구를 위한 야근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하는 거다”고 말했다.
회사의 연혁, 창업주의 업적, 심지어 오너 일가의 취향까지 알아야 하는 게 우리나라 대기업의 문화다. 오너 경영의 색채가 짙은 대기업들은 연수 과정 중에 기업의 연혁 교육이 빠지지 않는다. 지난해 상반기 한 대기업에 입사한 C 씨의 경험담이다.
“연수 일정 중 그룹사 이해 시험이 있었다. 회사의 성장 과정, 창업주의 업적과 그 연도, 날짜, 경영 이념까지 달달 외워야 했다. ‘이런 걸 왜 외워야 하나’라는 회의감이 들긴 했지만, 정식 발령을 받고 난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확인하는 선배들이 있어 차라리 그때 열심히 했던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또 다른 대기업의 서비스 직군에 다니는 D 씨(여·30)는 “오너 일가가 ‘뜨면’ 취향에 맞춘 음료수까지 공수해야 한다. 마음에 안 드는 점이 하나라도 있으면 그날은 온갖 수모를 당하는 날이다”고 현실을 전했다.
우리나라만의 공채 문화 역시 사회생활을 힘들게 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기수별로 끊어지기에 동기끼리 끈끈한 우애를 과시하고 선배들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역기능도 만만찮다. 경력직 이동이 많아진 추세지만 여전히 비공채 출신은 기업에서 자리 잡기 힘들기 때문이다.
회사원 이 아무개 씨(여·29)는 “경력직으로 한 대기업에 이직한 친구가 너무 힘들다고 토로했다. 경력직은 승진이 쉽지 않은 건 기본이고, 공채 출신들이 공공연히 무시한다고 얘기하더라”면서 “심지어 상사가 승진하면 승진 턱을 쏘게 되는데 공채 출신 후배들만 쏙 불러냈다. 비공채 출신은 인사조차 안 받는 상사도 있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고 전했다.
한국만의 독특한 기업문화는 외국계 회사에서도, 심지어 해외에 있는 한국계 회사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유명 외국계 회사에 입사한 E 씨(여·26)는 선배들과 대화를 할 때마다 마음을 졸여야 한다. 몇 차례 압존법을 틀렸다가 번번이 지적을 받아 무안한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E 씨는 “외국계 기업은 수평적 문화라 들었는데, 이런 분위기일 줄은 몰랐다. 군대를 다녀온 남자 동기들처럼 금방 익숙해지기도 힘들고, 적응이 어렵다”고 토로했다.
호주의 한 한국계 회계법인에서 일하고 있는 박 아무개 씨(여·28)는 조직문화 때문에 이직을 준비하고 있다. 합리적인 사회생활을 꿈꾸며 호주로 떠났지만 한국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한국식 조직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박 씨는 “야근을 당연시하고, 회사를 위한 희생을 강조했다. 내 삶이 우선인 게 당연한데 권리를 주장하면 주변 사람들은 ‘불순분자’쯤으로 여겼다. 국내든 해외든 불합리한 문화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윤심 기자 heart@ilyo.co.kr
최선재 기자 sun@ilyo.co.kr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
‘혁신’ 외치는 대기업 조직문화 좀 나아졌나 사업은 ‘미래로’ 조직은 ‘과거로’ 구내식당 앞에 달린 카메라, 오전 시간 카페 출입 금지. 얼마 전 현대차그룹 본사는 사내 기초질서 확립을 위해 두 가지 조치를 했다. 오전 8시 출근인 현대차는 1층 로비에 위치한 사내 카페를 7시 50분부터 9시까지 휴장한다. 매일 아침마다 커피 한 잔을 들고 사무실로 올라가려는 사원들과 카페 직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진다. 하지만 이마저도 일부 직원의 얘기다. 한 직원은 “상징적 조치라고 생각한다. 그 시간에 카페에 들를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구내식당에 설치한 카메라는 점심시간이 시작되는 12시 이전에 식당을 찾는 직원을 적발하기 위한 조치다. 자유로운 조직문화로 유명한 SK이노베이션 역시 올해 초부터 직원들의 야근을 허용하고, 석식을 배식하며 기강을 다졌다. 여전히 다른 기업에 비해 합리적인 기업문화로 유명하지만 과거에 비해 쇠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기업 평가 사이트 ‘잡플래닛’에는 “옛 시절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평가가 올라오기도 했다. 10대 기업 중 유일하게 4점대(5점 만점) 사내문화 평가 점수를 받았지만, 여성 인력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게 평가자들의 의견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글로벌 기업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나 조직문화에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였다. 직원보다 회사가 먼저인 조직문화가 있다는 평가를 받은 삼성전자와 달리, LG전자는 선후배 관계없이 존댓말을 하고, 팀장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군대식 ‘갈굼’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게 내부인의 평가였다. 조직문화로 구설에 올라 ‘빨간불’이 들어온 기업도 있다. 롯데그룹은 이번 경영권 분쟁 사태를 겪으면서 제왕적 경영, 수직적 기업문화 등으로 도마에 올랐다. 지난 8일 롯데그룹은 사내외 인사를 모아 ‘기업문화개선위원회’를 구성했다. 최근 계열사인 롯데백화점은 ‘PC off’제도를 시행해 직원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은 기업문화로 구직자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현 직원들 사이에서는 조직문화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잡플래닛에는 끊임없이 개선되고 있으며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갖췄다는 평가가 있는 반면, 딱히 혁신적인 기업문화를 느끼긴 어렵다는 평가도 찾아볼 수 있다. 한 직원은 “여성이 많다보니 팀별로 남성이 이해하기 어려운 조직문화가 생기는 경우도 있다”고 귀띔했다. [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