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시장 예측을 깨고 현대차 지분을 매입해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사진은 2013년 9월 정 부회장이 자페르 차을라얀 터키 경제부 장관과 터키공장에서 열린 신형 i10 양산 기념식에서 신차에 시승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삼성이 삼성SDS와 제일모직 상장 등으로 후계구도 확립에 속도를 낼 때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은 정중동 행보를 보였다.
지난해 현대차 계열 광고대행사인 이노션 지분을 팔아 3000억 원을, 또 올해 이노션 상장 때 구주 매출에 참여하면서 추가로 952억 원의 현금을 손에 쥐었다. 특히 올 초에는 후계승계 ‘종잣돈’으로 여겨지던 현대글로비스 지분 8.59%를 시간외 대량매매 방식으로 매각해 7427억 원의 현금을 마련했다. 세금을 떼고도 약 1조 원의 현찰을 손에 쥔 셈이다. 세간의 관심은 정 부회장이 과연 이 돈으로 무엇을 하느냐였다.
정 부회장의 첫 행보는 예상을 깨는 일이었다. 정 부회장은 지난 9월 24일 현대중공업이 보유한 현대차 주식 316만 4550주를 5000억 원에 사들였다. 이 거래로 정 부회장은 현대차 주식 1.44%를 보유하게 됐다. 정 부회장이 이 지분을 매입하리라고 예상한 이는 거의 없었다.
증권가 한 관계자는 “현대차는 덩치가 가장 커 오너 일가가 직접 지배력을 높이려면 가장 돈이 많이 든다. 어차피 순환출자여서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은 기아차나 현대모비스 주식을 사도 그룹에 대한 지배력을 높일 수 있다. 현대중공업 지분이야 현대차가 주주이익을 명분으로 내세워 자사주 매입을 해도 그만이다. 정 부회장이 직접 나서 지분을 산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라고 평가했다. 이 때문에 증시 일각에서는 이번 정 부회장의 행보에 대해 후계승계와 연관이 없다는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재계의 시각은 다르다. 오너가 무려 5000억 원의 현찰을 들일 때는 분명 그 이상 뭔가를 염두에 뒀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당시 이재용 부회장이 옛 삼성물산 주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당시 합병이 삼성물산을 희생시켜 제일모직 주주들을 돕는다는 평가를 낳기도 했다. 아울러 정 부회장이 이미 현대차와 기아차 경영에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만큼 의미 있는 수준의 지분을 확보해 주주와 투자자들에게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게다가 이번에 확보한 현대차 주식은 맞교환(swap)이나 현물출자 등을 통해 어떤 형태로든 그룹 지배력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 부회장의 행보가 결국 후계승계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최근 현대모비스가 2123억 원 규모의 자사주를 매입한 데서도 엿볼 수 있다. 매입이 완료되면 현대모비스의 자사주 지분율은 1.86%에서 2.86%로 늘어난다. 또 정몽구 회장이 상당수 지분을 보유한 현대제철이 자기주식을 취득한 점도 눈길을 끈다. SK의 지주사 전환이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서 보듯이 자기주식은 최대주주 지배력을 높이는 데 여러모로 유용하다.
정 부회장이 그룹 지배력을 확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아차가 가진 현대모비스 지분 16.88%를 가져오면 된다. 시가로 약 3조 8000억 원대다. 이 지분만 확보하면 현대모비스를 통해 현대차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게 시장과 재계의 중론이다. 현재 2조 5000억 원인 정 회장 부자의 현대글로비스 지분 가치를 더 키워 현금을 마련하거나 맞교환을 시도하는 방법 등이 유력하다.
정 부회장은 아직도 약 5000억 원이 넘는 현금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정 부회장이 가진 현대엔지니어링 지분도 수천억 원대를 호가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모비스 지분을 가져올 자금력은 충분하다.
이에 앞서 현대차그룹의 복잡한 지배구조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삼성도 삼성SDI와 옛 제일모직을 합병하고, 삼성에버랜드와 패션부문을 합쳤다. 비록 실패했지만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 합병을 시도했다. 이처럼 지배구조 하단을 어느 정도 정리한 후에야 지배구조 정점을 완성할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들어갔다.
현대차그룹도 현대차와 기아차가 공동으로 대주주인 계열사들이 대부분이다. 현대차 또는 기아차 어느 한 쪽으로 교통정리가 필요하다. 어느 한 쪽으로 몰기 어렵다면 합치는 것도 방법이다. 이 때문에 제기될 수 있는 카드가 현대차와 기아차의 합병이다.
이미 두 회사는 컨트롤타워에서는 사실상 하나의 회사처럼 운용되고 있다. 대외적으로 규모의 경제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명분도 있다. 두 회사가 합병하더라도 ‘현대’와 ‘기아’라는 브랜드는 별도로 유지할 수 있다. 그룹 지배구조도 단순해진다.
아울러 현대차와 기아차의 합병은 기아차가 보유한 현대모비스 지분을 정 부회장에게 넘길 수 있는 중요한 명분을 만들어준다. 현대차와 기아차가 합병하면 현대모비스와 합병법인 간 상호출자 구조가 형성된다. 법 위반을 막기 위해 이를 해소하려면 기아차가 정 회장 부자의 현대글로비스 지분을 받고, 대신 현대모비스 지분을 넘겨야 한다.
이후 통합 현대-기아차와 현대모비스는 각각 인적분할로 사업회사와 지주회사로 나뉠 수 있다. 가칭 현대-기아차홀딩스의 대주주는 현대모비스 및 정 회장 부자, 가칭 현대모비스홀딩스의 대주주는 정 회장 부자다. 두 ‘홀딩스’를 합치면 정 회장 부자를 최대주주로 하는 통합 지주회사가 탄생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기존 현대차가 보유한 6%의 자사주와 약 3%의 현대모비스 자사주는 사업회사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는 데 요긴하다.
운용업계의 한 고위 펀드매니저는 “현대차그룹은 완성차와 자동차 부품, 유통, 철강, 건설, 금융 등 크게 5개 분야로 나눌 수 있다. 순환출자 고리를 끊고 정 부회장의 지배구조를 공고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룹 전체를 효율적으로 경영하고 통제하기 위한 새로운 지배구조를 구축하는 것도 중요하다. 여러 시나리오가 가능하겠지만 결국엔 이 두 가지를 모두 이룰 수 있는 묘안을 짜낼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최열희 언론인